이행되는 일련의 구조 개편 방안은 이른바 '선진 금융'으로 나아가는 길로 평가된다. 외국의 대형 은행과 맞먹을 덩치를 가진 토종은행을 키워 세계 금융시장의 주도자로 나서자는 의지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정부의 입김이 지나치다는 경고가 나온다. 금융산업 종사자들은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을 '관치금융' 재현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처럼 금융기관을 자신들의 뜻대로 주무르고 싶은 욕망은 억제하지 않으면서 정작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규율과 감시자로서 정부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선진 금융'을 얘기하면서 규제 완화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규제 완화의 전제가 돼야 하는 감시 체계 구축을 위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정부는 이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큰 실패를 겪은 미국식 시장주도 경제 구조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다.
메가뱅크 논의는 금융산업 재편 신호탄
지난 9일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말한 메가뱅크 구상안은 규모 면에서 정말 '메가톤급'이다. 국민·신한·우리 등 상업은행 순위로 상위 3사를 염두에 둔 '빅3'간 대등합병을 주창했기 때문이다. 만약 대형 은행 3사의 합병이 실제 이뤄진다면 자산만 400조 원이 넘는 초대형 은행이 탄생하게 된다.
황 회장만 이런 구상을 하는 게 아니다.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역시 취임식에서 총자산 규모 600조 원대의 세계적 은행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하나금융지주는 자사가 금융시장 재편을 주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중평이다. 당장 지난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통합 과정에서도 드러났듯 내부의 복잡한 절차가 이번 KB금융지주 출범 과정에서도 하나하나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여 KB금융지주의 시장 재편 주도가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만에 하나 자산규모가 이 정도로 큰 은행이 출범한다면 공정 경쟁을 해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역시 변수다. 이 때문에 시장 관계자들은 이명박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으로 새 주인찾기에 나선 산업은행이 KB금융지주에 흡수합병되는 수준에서 그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메가뱅크 논의가 나오는 것 자체에 담긴 의미가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난 노무현 정권 때부터 끊이지 않고 제기된 이른바 '선진 금융 체제'로 한국 금융경제가 나아간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투자은행 육성과 금융업의 해외 진출을 생각한다면 대형화 논의는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게 당연하다. 규모의 경제가 가지는 이점이 분명 있기 때문에 투자은행으로 가겠다는 방침이 있다면 대형화 논리 자체는 타당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효근 대우증권 경제금융팀장은 "사실상 외국계 은행이 많은 한국 금융산업 특성상 토종 대형금융기관이 탄생한다면 정부 정책과 상업 은행의 정책 조화가 보다 쉽게 이뤄질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은행업뿐만이 아니다. 자통법 시행을 시발점으로 한국형 투자은행(IB)이 출범할 것이라는 기대도 크다. 외환위기 이후 메릴린치, JP모건, 골드만삭스 등 외국계 투자은행에 입은 아픔을 의식해 한국 관가와 금융계에서는 꾸준히 "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증권사 간 합종연횡을 통해 대형 IB가 탄생해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진다.
협상이 결렬되긴 했지만 산업은행이 미국 4위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시도한 것도 'IMF 체제를 겪은 한국 금융자본의 세계 진출'을 꿈꾸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마치 '일제시대 아픔을 겪은 한국 기업이 만든 반도체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팽창적 느낌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자하는 열망이 여기에 일정 부분 녹아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관치금융의 추억을 떠올리는 정부
금융산업 재편 과정에서 정부의 입김이 지나치게 시장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역시 팽배하다. 당장 자통법 추진 후 이어진 일련의 과정이 시장을 지켜보는 이들의 의심을 키우고 있다.
시중 증권사는 올해 들어서만 8개사가 더 늘어나 총 62개사가 됐다. 경쟁이 그만큼 심해진 것이다.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결국 자통법 시행을 전후로 증권사 간 인수합병(M&A)이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경쟁이 가중된 데다 증권 유관기관이 일제히 결의한 수수료율 일괄 20% 인하 방침이 수수료 경쟁까지 부추겨 결국 승자와 패자가 갈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다는 주장은 노무현 정권 때부터 나왔다. 지난해 10월 심상정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은 "정부가 대우증권을 통해 관치 금융을 펴 증권업계 M&A를 인위적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산업은행 자회사인 대우증권이 정부의 자통법 추진과 발맞춰 위탁매매 수수료 인하를 본격 고려했기 때문이다. 수수료 인하-경쟁강도 강화-승자와 패자 갈림-승자의 대형IB화로 이어지는 과정을 정부가 자통법 시행 이전에 인위적으로 유도했다는 논리다.
이명박 정부 역시 이런 비판에 자유롭지 않다. 당장 메가뱅크 논란에 불을 댕긴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캠프의 경제살리기특위 부위원장을 지낼 정도로 정부와 가까운 인사라는 점이 그 근거다. KB금융지주와 함께 '은행 대형화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창하는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또한 고려대 출신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하나라는 점에서 관치 논란에 자유롭지 못하다. 둘은 이명박 정부 들어 국내 대형 금융지주사 회장 자리에 올라 '낙하산 인사' 논란이 일었다.
새로운 금융 환경에 맞는 정책을 제시하고 금융사를 감독할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금융위원회 위원 구성 역시 정부의 관치 욕망을 강하게 반영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총 9명으로 구성되는 금융위 위원 중 6명이 관료와 관료 출신 인사다. 금융위원장과 부위원장, 기획재정부 차관 등이 혐의를 받는다. 반면 정부에서 완전히 독립된 인사라고는 사실상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추천 1명에 불과하다. 종전 금감위에서 3명이었던 민간 비상임위원 자리는 1명으로 줄어들어버린 셈이다. 금융위가 합의제 성격을 가진 조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금융시장 감독은 물론 금융정책 입안에도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어느 정도의 리더십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관치 마인드를 가져서는 곤란하다. 금융시장은 특성상 한번 문제가 생기면 큰 파급효과를 몰고 오기 때문"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역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방식이 문제"라며 "직접적으로 시장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없도록 시장 운영 원칙을 훼손해서는 곤란하다"고 충고했다.
선진화 구실로 있던 규제도 풀려는 시도 위험해
보다 큰 문제는 금융산업 재편 과정에서 함께 이뤄지고 있는 금융규제 완화 방안이 가져올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는 점이다. 당장 정부는 금융산업 선진화의 한 방침으로 금산분리 완화를 거론하고 있다. 딜로이트 컨설팅 회장 출신의 전광우 금융위원장부터가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금융위의 철학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더군다나 이 틈에 정부는 선진화 논리를 다른 산업에도 끼워 맞추며 출자총액제 제한 폐지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
그 동안 금융시장과 산업시장의 방만화, 자본 집중화를 막던 빗장은 풀어 젖히려는 반면 이를 보완하기 위한 감시·감독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위험하다. 금산분리만 해도 엄밀히 말하면 '은산분리'가 맞다. 이미 제2금융권은 재벌 자본이 휩쓸 정도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경계가 무너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가뱅크 논란과 자통법 시행 논란이 연일 계속되는 와중에도 새 시스템에 걸맞은 규제 장치에 대한 논의는 어느 한 곳에서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준경 교수는 "금산분리 규제 완화의 옳고 그름을 떠나 새 금융시스템 도입을 거론할 때 그에 걸맞은 선진국 수준의 감시 시스템 구축에 대한 논의가 같이 이뤄져야함은 당연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종태 연구위원은 특히 정부가 대폭 규제를 완화하면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금융시스템 모델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기 이전 미국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본땄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했다. 한국보다 금융감독 체계가 훨씬 강력한 미국에서도 시장 통제의 실패로 대형 금융사고가 터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새 금융감독 체계 구축에 대한 논의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미국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통화감독청(OCC),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등 다양한 층위의 금융감독 시스템을 구축한 국가다.
이종태 연구위원은 "미국이 얼핏 보기에 탄탄한 금융감독 시스템을 가진 것으로 평가됐지만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사실상 금융주체들의 분식회계를 막지 못했다"며 "한국 정부는 미국의 위험관리 자율규제를 그대로 본 따 부채담보부증권(CDO), 커버드본드 등을 활성화시킨다는 목표는 세웠으면서도 그에 대한 감독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CDO는 일반 대출을 비롯해 회사채, 자산유동화증권(ABS) 등의 유동화를 위해 이들을 한데 묶어 만든 유동화채권이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 미국 투자은행들은 신용등급이 낮은 채권을 묶어 CDO로 만든 후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를 통해 시장에 대거 유통시켰다. 사실상 페이퍼컴퍼니에 부채의 위험을 떠넘겨버린 셈이다.
이런 식으로 활발해진 파생상품 거래는 미국발 위기를 세계 경기 침체로 이끈 주원인으로 꼽힐 정도다. 신자유주의 바람을 타고 급성장한 금융 경제가 파국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첨병' 미국에서도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 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8일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80년 이후 20여년 간 미 정부는 '시장에 대한 규제는 약해야 한다'는 신념을 흔들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취한 구제 조치와 일련의 처방은 정부가 '행동주의'로 회귀했음을 분명히 한다"고 보도했다.
이종태 연구위원은 "CDO는 서브프라임 사태의 원흉이라 불릴 정도로 위험한 상품이다. 쉽게 말해 미국의 투자회사는 CDO를 이용해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유동화 과정에서 생기는 위험을 상품 간, 혹은 금융기관 간에 떠넘기기만 해 위험을 키운 셈이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상품을 선진화 명목으로 도입하려 하면서 미국의 실패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사태 발발 이전의 미국을 막연히 따라가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하다"라고 경고했다.
금융시장 빅뱅, 비극적 결말 맺을 것인가 금융산업 경쟁력이 높아지길 원치 않는 이는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한 은행 대형화 논리에 타당성이 있음을 부인하는 이도 많지 않다. 대형화는 금융시장 개방 이전 당연히 준비해야하는 수순이라는 성격마저 가진다. 문제는 정부가 생각하는 '대형화를 통한 투자은행으로의 길'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다.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당장 다른 나라 투자은행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을지가 확실치 않다. 일본의 경우 은행산업 재편을 통해 미쓰비시도쿄UFJ, 미즈호파이낸셜, 미츠이스미토모 등 3대 공룡은행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덩치만 커졌을 뿐, 그에 걸맞은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해 이 조치는 실패로 끝났다는 게 금융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대형화 부작용으로 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세계적 성공사례로 꼽혔던 일본의 은행산업 중 현재 자산순위 세계 10대 은행에 이름을 올린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금융지주회사의 '투자은행화' 변신 후 뒤따를 후폭풍에 대비할 준비가 됐는지도 역시 따져봐야 한다. 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금융지주회사의 대형화 후 예대마진을 추구하던 전통적 은행업이 자본신용업 중심으로 옮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금융소외현상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며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정부에서 신용회복기금 등을 마련했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는 부족하다"라고 지적했다. 투자은행 쏠림현상에 따른 부작용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소리다. 산업 재편에 따라 금융기업이 일제히 투자은행화 변신을 꾀할 경우 이 중 시장 경쟁에서 탈락하는 기업이 생긴다면 금융업의 특성상 예상 이상의 위험을 시장에 몰고 올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특히 이 새로운 생존경쟁에 재벌그룹이 끼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산업 재편에 은행업은 물론 보험, 증권 등 제2금융권 역시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 부문은 이미 재벌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이다.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동반한 산업재편으로 재벌 금융기업 역시 금융투자지주회사 등을 만들어 경쟁에 뛰어든 결과, 특정 재벌자본이 금융산업에서도 지배력을 나타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이종태 연구위원은 "결국 기업을 사고팔아 마진을 남기는 게 투자은행업의 주된 돈벌이다. 금융산업 재편으로 자연스럽게 재벌이 제조업을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라며 "은행은 물론 재벌도 종합금융그룹을 지향하게 되면서 국내 기업공개(IPO) 시장이나 인수합병 시장에 재벌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된다. 지금까지 한국에 없었던 형태의 '산업-금융 복합체'가 탄생하는 길이 열릴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과연 이를 막을 수 있는 장치를 정부가 마련할지 의문"이라고 우려를 제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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