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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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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김민웅 칼럼]지금도 출몰하는 여우와 숲 속의 평화

밥 먹는다, 무슨 반찬?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죽었니, 살았니?" 이 동요놀이가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는지 설왕설래가 많은데, 일본 에도 시대에 유행했던 노래라고 해서 "왜풍(倭風) 시비"에 걸리기도 한다. 그게 맞는다면, 이걸 우리 전래 놀이처럼 가르치는 것은 사실관계상의 오류지만, 그렇다고 출처의 국적논란으로 이를 배척까지 하는 것은 옹졸해지는 일이다. 문제는 도대체 이 노래와 놀이가 무슨 뜻을 가진 것인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여우가 무슨 반찬으로 밥을 먹는지 물어보는 일은 너무도 난데없지 않을까?
  
  생존놀이
  
  그런데, 이 놀이에서 핵심은 술래로 뽑혀 여우 역을 맡은 아이가 등을 돌리고 앉아서 다른 아이들이 부르는 "죽었니, 살았니?"에 대한 대답으로 아이들 모두의 동작을 결정하게 되는 상황이다. 어릴 적 놀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해 졌을지 모르겠으나, 여우가 이 물음에 "죽었다"고 하면,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 말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살았다"고 하면 어떻게든 목표 지점까지 뛰어야하고 술래에게 잡히지 않거나 그 손에 몸이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우에게 반찬이 되어 이미 죽어버린 목숨처럼 된 존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말지만, 아직 살아 있다고 판정되면 어떻게든 탈출해 살아남아야 하는 이른바 <생존놀이>의 한 유형이 된다. 죽고 사는 문제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술래에게 잡히지 않는 장난을 치는 것이지만, 이 놀이에 스며있는 현실의 의미는 고도의 긴장을 뿜어내고 있다. 놀이의 장을 좌우하는 여우의 말 한 마디에 죽고 사는 문제가 판가름 나는 입장에서는, 아직 살아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 어디로 튈 지 모를 개구리처럼 자기의 운명이 가야 할 길을 여우가 가늠하지 못하도록 아주 빠르게 선택하고 종횡무진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서 여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목표지점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을 깨우쳐 나간다.
  
  개구리 반찬 안 되고 싶어서
  
  말하자면, 현실에서 여우가 노리는 개구리처럼 되고 마는 상황이 닥칠 때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가를 아이들은 이 놀이를 통해 자기도 모르게 배우는 셈이 된다. 민중들 자신에게는, 여우가 자신들을 반찬으로 삼고 싶어 하는 권력이라면 자신들은 이 권력이 겨냥하고 짓밟는 개구리 신세가 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도 빠져나갈 길이 있다면 결코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생존의 지혜와 능력을 터득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놀이로 다가오는 것이다. 민중들의 일상을 괴롭히는 권력에 대해 아이들의 놀이와 노래로 조롱하고 풍자하는 동시에, 동요와 놀이라는 형식을 앞세워 권력의 경계심을 무장 해제시키면서 민중들의 생존 훈련을 해나가는 힘이 이 안에 녹아 있다고 하겠다. 권력이 모르는 비밀이 놀이와 동요에 숨겨져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개구리 반찬이 죽었는가 살았는가를 확인하는 절차는 민중의 입장에서 매우 절박한 현실 판단과 이어진다. 권력자가 죽었다고 여기면 가만히 죽은 척 하고 있다가, 아직 살았다고 판정을 내리면 곧 죽이려 들 것이기 때문에 재빨리 살 길을 찾아 냅다 뛰어야 하는 것이다. 이 놀이의 기원이 만일 에도 시대라면 막부 말기의 횡포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자신이 여우의 개구리반찬처럼 되고만 현실을 탄식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생존의 기회를 신속하게 엿보면서 살아나갔던 상황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직도 버젓이 살아 있는 여우와 개구리의 공포
  
  그런데 그건 단지 그때만의 상황으로 그치지 않는다. 여우는 아직도 버젓이 살아 있고 개구리 반찬이 되는 처지의 목숨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하고 물으면, 이 여우는 백성들을 개구리 반찬으로 삼아 "밥 먹는다"고 대답하기 일쑤다. 애초에는 숲 속의 동물들을 위해 살겠다고 나섰지만 그 정체가 알고 보니 여우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백성들을 섬기는 일보다는 자기 밥 찾아 먹겠다고 눈을 번득이며 여기저기를 열심히 쏘다니는 모습은 백성들의 형편에서는 공포다.
  
  예수는 로마제국에 빌붙어 권력을 유지하면서 백성들 앞에서는 폭군노릇을 하는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한다. 그 "여우"는 혹시 지금도 우리 앞에서 활개치고 다니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면 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는 권력에 대한 신랄한 질문공세가 된다. 여우는 우리 전래 민담에서 사람을 홀리기까지 하는 상징이다. 그 여우에 홀려서 속아 넘어가면 우리가 개구리 반찬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솝 우화에 <여우와 황새 이야기>는 여우의 교활함에 황새가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황새를 저녁식사에 초대해놓고 여우는 납작한 접시에 수프를 담아 내놓는다. 황새가 이걸 먹을 방법이 없다는 것은 뻔하다. 이번에는 황새 차례다. 여우가 초대받아 간 황새 집 식탁 위에는 주둥이가 좁은 병 속에 고기조각이 들어 있었다. 피장파장이 되었는가? 아니다. 현실에서 여우는 병 속의 고기보다는 황새를 잡아먹는 편이 빠르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너구리 부대와 여우
  
  이런 이야기 만들어보았다. (등장하는 동물들의 명예훼손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히며 심심한 양해를 구한다.)
  
  "숲 속에 여우가 살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나 곰이 없는 이 숲에서 여우는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숲 바로 옆에는 호수가 있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이 호수에는 온갖 새들이 날아들었습니다. 숲과 호수가 어우러져 있는 이곳은 이 여우가 왕 노릇을 하기 전까지는 아주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여우는 숲과 호수를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건 모두의 숲이었지만, 이 여우는 너무나 탐욕스러워 도무지 함께 더불어 사는 법을 몰랐습니다. 이 여우는 약한 동물들을 마음껏 포식하면서 날이 갈수록 점점 몸이 더 커져갔고 성격도 더욱 포악해져갔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은 이런 여우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힘이 약해 어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 여우는 언제까지나 이런 영화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여우는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너구리를 불렀습니다. 너구리는 그간 하도 남 속이고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다녀 숲 속의 동물들과 호수의 새와 물고기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우의 신임만큼은 대단했습니다. 너구리는 여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우는 너구리를 자기 집에 초대한 날, 커다란 상을 차려놓고 너구리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너구리도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여우 앞에서 여우 춤을 마구 추었습니다. 여우 춤을 열심히 추고 있던 너구리는 이 춤을 더욱 열심히 추면 언젠가는 자기도 여우가 될지 모른다고 속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이런 너구리가 너무너무 귀여웠습니다.
  
  여우의 초대를 받은 황새의 운명
  
  여우는 숲과 호수를 잇는 작은 밤섬에 살고 있는 황새도 따로 불렀습니다. 이 황새는 여우 앞에만 가면 기이하게도 얼굴이 누렇게 되는 황(黃)새였습니다. 황새를 초대한 여우는 보기에는 그럴 듯한 식탁을 차려 내왔습니다. "천천히 들게나, 내 자네한테 할 말이 있네." 황새는 긴장했습니다. 여우가 말했습니다. "밤섬의 일부를 내가 좀 써야겠어. 아주 자유롭게 말일세. 너구리 부대를 창설했는데 아무래도 그곳이 훈련장으로는 딱 제격이야."
  
  황새가 살고 있는 밤섬은 숲 속의 동물들이 때때로 모여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숲에서 일어난 일을 서로 전하고 숲의 장래에 대해 토론도 하고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여기만큼은 그래도 여우가 자기 것으로 삼기에는 숲 속 동물들의 눈치가 보이는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이걸 그대로 두고 여우는 밤잠을 편하게 자기는 어려웠습니다. 그곳에서 자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이미 오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너구리 부대를 이곳에 주둔시키려는 까닭은 그래서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습니다. 여우의 이야기대로면 밤섬은 못된 짓만 일삼는 너구리의 난장판 놀이터가 될 판이었습니다. 너구리는 여우와 그 뻔뻔함에 있어서 맞수가 될 정도였으니, 밤섬이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이 황새로서도 사실 우울해졌습니다.
  
  그러나 여우와 너구리가 밤섬을 자유롭게 쓰게 해주는 대신 무언가 자신에게도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여우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게 해주면 내가 자네에게 밤섬의 주인자리는 확실하게 보장해주지." 황새의 입가에 미소가, 아니 부리 근처에 은근히 웃음이 배어 나왔습니다. 말을 마친 여우는 황새에게 먹을 것을 권했습니다.
  날리는 깃털
  
  아까는 잔뜩 긴장하느라 잘 몰랐는데, 여우가 차려놓은 식탁 위 그릇마다 모두 넓적했습니다. 자신의 부리가 그 그릇에 닿기만 하면 음식은 모두 그릇 밖으로 삐져나오는 바람에 황새는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우의 심기를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만찬은 어느새 끝났습니다. 황새는 밤섬으로 돌아오자 밤섬의 동물들 앞에서 "끄윽"하고 평소 별로 하지 않던 트림을 아주 크게 그리고 자주 했습니다. 이쑤시개로 부리를 쓰-윽 쓱 문질러댔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그래, 음식은 역시 좋은 그릇에 담아야해."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여우가 바라던 대로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여우는 이 모든 일을 다 해결했다고 생각하고 어느 날 혼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언젠가 아득한 옛날에 들었을까 말까 했던 노래 하나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아, 정말 눈물이 자기도 모르게 주루룩 나는 <추억의 가요>다, 여우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우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밥 멍~는~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뒤이어 노래 가락은 "무슨 바~안찬?" 하고 이어졌습니다. 여우는 이번에도 자기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개구리 바~안찬"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바람이 창문을 스치며 여우의 식탁으로 휙 하고 불어왔습니다. "개구리 바~안찬" 하는 소리와 함께 황새깃털들이 여기 저기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멀리 밤섬에서는 너구리의 지겹도록 반복되는 합창만 들리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그 가사를 들어보니, '여우 만세, 여우 만세'. 아, 그건 노래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더랍니다."
  
  개구리를 잡아먹고 사는 황새가 여우에게는 개구리 반찬이 되었더라, 하는 이야기. 여우에게 속으면 겪게 되는 숲의 비극이다. 숲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이런 여우, 어떻게 해야 할까?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이렇게 묻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신랄하게, 그리고 물러섬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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