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의 생선가게, 정육점, 건어물 점포 사이 사이로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과 전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예술품 전시를 위해 따로 마련된 게 아니다. 경제 침체로 입주자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생겨난 빈 점포들에 예술가들이 입주해 그들만의 색깔로 재탄생시킨 점포다. 비엔날레 개막 한 두달 전부터 대인시장 7개의 빈 점포에 망치질과 톱질 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젊은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만들고 전시작품으로 단장했다.
대인시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복덕방(福德房) 프로젝트'는 광주비엔날레 '제안' 섹션의 한 공공 프로젝트다. 개막식이 열리기 전인 지난 3일 일찍부터 개장해 시민들 속에서 함께 하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재래시장을 임시 전시공간으로 활용한 적은 있지만 작가들이 상인들과 함께 하는 입주 창작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인시장은 1950년대 이후 광주 도심 근처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재래 시장으로 광주 시민과 역사의 굴곡을 함께 했다. 예전에는 시장 입구 회센터와 먹자골목 등으로 크게 붐비기도 했지만 최근에 대형마트의 출현으로 상권이 크게 위축됐다.
이처럼 쇠락하는 재래시장에 예술이 스며들어 새로운 문화공간의 창출로 이어질 수 있을지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시민과 예술, 그리고 예술가 간의 의사소통의 부재로 고심하고 있는 예술에도 어떤 활력소를 불어넣어줄 수 있을지도 관심을 모은다.
상인, 시민, 작가가 한 곳에… '레지던시 공간'
대인시장에서 먼저 눈에 띄는 곳은 '광일 상회'다. 이곳은 대인시장 동편의 동계천 입구에서 50미터 가량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다. 올 초까지만 해도 땅콩 등 안주류와 건어물을 팔던 가게였지만 장사가 안돼 주인이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상인들이 떠난 자리에 신호윤, 김현돈, 노유승 씨 등 5명의 작가가 입주했다. 이들은 무려 25년이 된 이 오랜 건물의 독특함이 마음에 들어 이 곳을 택했다. 각 층이 미로처럼 나뉘어져 따로 공간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됐다. 이들은 자연스런 80년대 풍을 자아내는 건물의 느낌을 살려 원래의 벽지를 그대로 두고 종이를 붙여 설치미술을 꾸몄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들의 프로젝트 명은 <3355 Plan-E : 즐거운 집창촌>. 과거 이 근처에 터미널과 광주역이 있을 때 집장촌이 있었던 역사를 반영한 한편 '창작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가 더해진 이중적 의미다.
이들은 이 공간을 단순히 작업실로 이용하기 보다는 공간 내에 전시를 하고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열린 공간으로 꾸몄다. 최근 예술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작가 레지던시'다. 즉 시장 상인과 일반 시민, 작가간의 교류를 꾀하는 공간이다. 비엔날레 기간 동안 아시아 해외작가를 섭외해 '생활 속의 어학당'을 함께 진행하며 '夜시장'프로그램도 매주 화~토까지 열어 시민들의 관심을 모을 예정이다.
재래시장과 예술이 만날 때…바느질, 홍어 등이 작품 소재로
작품 자체에서 '광주'와 '시장' 그리고 예술을 통합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도 눈에 띄었다. 구헌주 작가는 시장 곳곳에 벽화를 그리는 '그래피티' 작업을 선보였다. 인적이 드물어 오랫동안 방치된 낡은 점포 외관에 재치 있는 그래피티를 채워 시장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점포 전체가 작업 중인 커다란 직물로 채워진 곳도 있었다. 마문호 작가는 대인 시장과 상인들의 구체적이고 소박한 삶을 바느질 드로잉으로 형상화해 '열망-천개만개 꽃을 피우자'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시장이 지닌 열망, 사람들이 지닌 열망, 채워지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한 열망의 내용들을 한땀 한땀 바느질의 행위를 통해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바느질 행위는 하나하나 조각난 삶들을 봉합하는 과정이자, 삶의 회복을 꾀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온갖 음식재료를 파는 재래시장의 장소적 특성을 살려 기획된 작품도 있다. 박문종 작가는 '홍어'라는 지역 특유의 음식 문화를 통해 음식이라는 보편성과 지역성의 접합을 시도했다. <1코-2애-3날개-4살>프로젝트다. '1코 2애 3날개 4속살'은 홍어 부위의 명칭이자 맛을 가름하는 우선 순위를 의미한다. 그는 20여 개의 홍어 가게가 줄지어 있는 일명 '홍어거리'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상업 행위 자체를 예술로 승화한 백기영 작가의 '파프리카 프로젝트'는 가게에 비엔날레 기간 동안 점원이 실제로 상주해 과일과 야채를 판매한다. 먹을 거리 문제를 생물학, 유전공학적 잣대로 바라보며 한국 사회를 들여다본다는 취지다.
10억 들여 대인시장 조성사업… 성공사례 기대
이곳 대인시장의 '복덕방 프로젝트'는 다른 전시장의 진지하고 엄숙한 예술작품에 뒤지지 않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예술품이 전시된 특정 장소를 찾아가 '제대로' 예술을 음미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고 무엇보다 시장과 상인들이 만들어내는 활기넘치는 공간 속에서 잘 융합된 전시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덕방 프로젝트'의 박성현 큐레이터는 "재래시장들은 개발과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이것이 현대의 모습이다"며 "이 프로젝트는 시장의 문화예술의 가치를 대인시장이라는 장소성에서 발견해보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인시장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단지 비엔날레 기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은 광주에 7대 문화관을 조성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대인시장 예술인 공방거리 조성사업'을 이 달부터 본격 진행하고 있다.
1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시장 점포 30여 곳을 임대한 뒤 예술인들에게 무료 제공해 창작과 전시공간으로 활용토록 한다는 방안이다.
대인시장이 작가들의 창작, 작품 판매활동 주무대로 자리매김되고 시민들에게는 생활 속의 문화공간이 되게 해 재래 시장의 활성화를 꾀하려는 의도이다. 문화전당의 개관에 맞춰 국내외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질 수 있도록 이곳에 북카페와 휴게공간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이 같은 새로운 시도가 재래시장 활성화의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지 관심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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