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제2회를 맞는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가 3일 개막한다. 올해부터 '내일의 고전영화가 될 영화를 발굴한다'는 차원에서 신작들을 중심으로 경쟁부문이 신설되긴 했지만, '발굴, 복원, 창조'라는 슬로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 충무로영화제만이 갖는 독창적인 점은 바로 고전영화들을 중심으로 상영한다는 사실이다. 영화광들에게만 익숙한 감독의 영화가 아닌 대중영화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고전영화들이 대거 상영된다는 점도 충무로영화제가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이유다. 이번에 상영될 총 170여 편이 모두 소중한 영화들이지만 그 중 어렵게 9편의 추천작을 추렸다.
. | 이누가미 일족 감독 이치가와 곤 |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탐정 캐릭터로 우리나라에선 소년탐정 김전일의 할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소설가 요코미조 세이시가 탄생시킨 명탐정으로, 국내에도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들이 번역, 출간돼 있다. <이누가미 일족>은 막대한 유산을 둘러싸고 이누가미 가문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활약하는 영화는 무수히 많이 만들어졌지만 이치가와 곤 감독이 만든 <이누가미 일족>은 긴다이치 영화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이치가와 곤 감독 자신이 원작의 팬이며 <이누가미 일족> 이후에도 네 편의 긴다이치 영화를 더 만든 바 있다. 이 영화는 76년 일본에서 개봉돼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거두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일본에선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나 국내엔 작품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이치가와 곤 감독의 영화세계를 긴다이치의 활약상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누가미 일족> 외에도 이치가와 곤 감독의 긴다이치 영화로 <악마의 공놀이 노래>, <병원 비탈길에 목 매는 집>이 함께 상영될 예정이다.
. | 미지와의 조우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외계인이 지구에 침략하거나, 외계인과 친구가 되거나. 여타의 다른 감독들이 주로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다루며 냉전 체제 당시 공포를 은유했다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적의 없는 낯선 '방문자'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고 우정을 나누는 영화를 선보이며 신선한 충격을 줬다. <미지와의 조우>는 스필버그 감독이 <이티>를 만들기 5년 전에 만들었던 영화로, 국내에서는 한때 영어원제를 직역한 '제3종 근접조우'라는 다소 괴상한 제목으로 알려져왔다. '미지와의 조우'라는 제대로 된 제목을 찾은 것은 90년대 후반 새로 디지털 마스터링된 비디오가 출시되면서부터다. <이티>처럼 본격적으로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지구를 찾아온 낯선 손님을 호기심과 경이감으로 맞이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인상깊다. 젊은 시절의 리처드 드레이퓨스가 주연을 맡았으며,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도 배우로 영화에 모습을 드러낸다.
. | 블레이드 러너 : 파이널 컷 감독 리들리 스콧 |
영화광들 사이에서 전설이 돼버린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저주받은 걸작 <블레이드 러너>는 사이버펑크 장르를 대표하는 영화로 82년 첫 공개된 이래 일부 컬트팬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오랫동안 팬덤을 형성했던 작품이다. 이번에 충무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블레이드 러너 : 파이널 컷>은 92년에 공개됐던 디렉터스 컷에 새로이 장면들이 추가됐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디지털 복원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화질을 선보일 예정이다. 시각효과와 사운드 효과를 새로 입히고 일부 장면을 다시 편집한 이 버전은 리들리 스콧 감독이 2007년에 새로이 공개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번 충무로영화제 때 극장에서 최초로 상영된다. 영화제 측에서 가장 섭외하기 어려웠던 작품 중 하나로 꼽는 이 작품은 기자회견 당시까지 상영이 확정되지 않은 탓에 인터넷 예매 시작 직전에야 상영 사실이 공지됐다.
. | 독일 자매 감독 마가레테 폰 트로타 |
총 40편을 상영하는 독일영화사 특별전 섹션에는 표현주의 무성영화들부터 뉴 저먼 시네마에 이르기까지 꼭 챙겨봐야 할 작품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뉴 저먼 시네마 영화들 중에서도 빔 벤더스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조그나 폴커 쉴렌도르프 등의 감독들이 아닌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독일 자매>를 굳이 추천하는 이유는 이 감독이 다른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에 비해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뉴 저먼 시네마의 여성 기수였던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은 폴커 쉴렌도르프 감독과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배우로 시작해 자신의 영화를 직접 찍었으며 <독일 자매>로 명성을 쌓았다. 개혁파 페미니스트 언니와 적군파 테러리스트 동생의 애증과 연대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독일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특히 여성의 시선으로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는 트로타 감독의 야심이 간결한 영화 형식과 맞물려 매우 파워풀한 힘을 발휘하는 영화다.
. | 바그다드 카페 : 뉴 디렉터스 컷 감독 퍼시 애들론 |
지베타 스틸의 인상적인 노래 'Calling You'가 지금도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에서 단골 신청곡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은 모두 이 영화, <바그다드 카페> 때문이다. 영화광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조용한 입소문을 타며 꾸준히 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보석같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낡은 카페인 '바그다드 카페'를 배경으로, 처음엔 말도 통하지 않고 서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 여성과 미국 흑인 여성이 서서히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린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납고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와 하루종일 소리만 질러대고 짜증을 부려대던 여자가 어떻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는가. 영화 시작 10분만 잘 넘기고 나면, 주인공들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마법을 부리는 이 영화의 마력을 황홀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이번 상영버전은 2008 감독이 새롭게 공개한 디렉터스 컷이다.
.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감독 밀로스 포먼 |
<이지 라이더>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다가 주연이자 감독이었던 피터 폰다와 데니스 호퍼마저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명연을 펼쳐보이며 눈길을 사로잡았던 젊은 시절의 잭 니콜슨의 열연을 볼 수 있다. 1975년작인 이 영화는 미국 작가 켄 키지의 동명 원작소설을 밀로스 포먼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감옥에서 나가기 위해 일부러 미친 척을 해 정신병원에 후송된 맥머피는 병원의 극심한 억압과 통제 속에서 정말로 미친 사람이 되어간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회 부적응자, 나아가 정신병자로 낙인찍히며 병원에 갇힌 다종다양한 소수자들의 모습을 통해 미국 사회를 통렬하게 고발했던 이 영화는 지금은 주로 심술궂은 노인으로 출연하는 잭 니콜슨이 젊은 시절 얼마나 섹시하고 위험한 매력으로 어필했는지 확인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 | 체도 감독 셈벤 우스만 |
우리에겐 낯선 영화의 땅, 아프리카는 서구 제국주의의 상처와 독립 이후 내전과 군사독재로 얼룩진 상처 속에서도 아프리카 특유의 영화 미학을 발달시켜왔다. 비록 나라에 따라서는 여전히 영화산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도, 그 흔한 극장 하나 없는 곳도 존재하고,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감독들 역시 대체로 프랑스나 러시아에서 유학한 감독들이지만, 이들이 만드는 '아프리카 영화'는 여전히 그 상처를 드러내면서도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역사를 개척하려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셈벤 우스만 감독 역시 그런 감독들 중 하나다. 아니, 그런 감독들의 시조가 되는 사람이다. 아프리카 대륙 최초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세네갈이 배출한 세계적인 감독으로, 아프리카 영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작년에 아깝게 유명을 달리한 그의 76년작 <체도>는 평소 그의 신념대로 아프리카 사회를 관통하는 복잡다단한 갈등들을 치열하고도 예리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칸영화제 감독주간 40주년 특별전 섹션에서 상영된다.
. | 우묵배미의 사랑 감독 장선우 |
장선우 감독은 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영화는 매번 발표될 때마다 주목을 받으며 논쟁의 중심이 됐지만, <우묵배미의 사랑>은 영화팬들 사이에서 유난히 애정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 영화다. TV에서 이재룡, 배종옥 주연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한 이 작품은 원래 소설가 박영한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영화는 봉제기술자 일도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매맞는 아내 공례 사이의 불륜을 다루지만, 영화가 다루는 것은 불륜의 치덕한 땀냄새보다는 가장 밑바닥에서 삶을 영위하면서도 일생에 한번 찾아온 사랑에 설레어하고 절망하는, '낮은 사람들'의 일상이다.
. | 버스터 키튼 단편 모음 감독 버스터 키튼 |
국내에서는 미국 무성영화 중에서도 유난히 찰리 채플린의 영화만 회자되지만, 버스터 키튼 감독의 영화는 찰리 채플린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무성영화의 특징과 매력을 오롯이 드러냄과 동시에 소심한 보통 사람들의 고난과 역경을 코믹하게 표현하는 한편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로 가득차 있다. 이 모든 혁신적인 시도는 오로지 버스터 키튼이 '어떻게 하면 관객들을 더 웃길까' 골몰한 결과다. 젊은 음악가 집단들의 즉석 라이브 연주와 함께 상영되는 '무성영화의 향연' 섹션에서 버스터 키튼 감독의 단편 세 편이 상여된다. 아직도 버스터 키튼 감독을 만나지 못했다면, 감히 당신의 영화인생은 이제까지 반쪽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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