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국 젊은이들에게 우라사와 나오키는 왜 인기인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국 젊은이들에게 우라사와 나오키는 왜 인기인가

[신기주의 이야기 속으로] 영화 <20세기 소년> 개봉을 계기로

2006년 7월 무렵이다. 일본에서 <괴물>이 개봉할 무렵 봉준호 감독과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본의 어느 호텔에서 만났다. 봉준호 감독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팬이었다. 그는 <플란다스의 개>를 찍을 땐 우라사와 나오키의 초기 만화인 <해피>를 읽었다. <살인의 추억>을 찍을 땐 <몬스터>를 읽었고 <괴물>을 찍을 땐 <20세기 소년>을 봤다. 봉준호 감독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들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대담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영화를 찍을 땐 항상 제 손엔 우라사와 나오키 선생의 책이 들려있었습니다. 항상 재미있게 읽었지요. <20세기 소년>에서 자주 먹는 장면이 나와서 참 좋았습니다. 스토리에는 꼭 필요하지 않지만 선생의 만화엔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요. <괴물>에서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먹인다. 보호하고 맛있는 걸 먹인다는 게 중요한 모티브였어요. 약한 자를 보호하고 먹인다는 거죠." 우라사와 나오키도 말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도 늘 먹는 장면이 나오죠. 먹어야지 살고 싸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 장면들을 보면서 결국 우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짐작을 했어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20세기 소년>에서도 동키가 죽을 때 옆에서 스님이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이 나오죠. 슬픔과 웃음이 교차되는 장면이예요. <괴물>에서 가족들이 장례식을 하는 장면과도 닮아있죠." 대담에서 두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깊이 교감한다. 슬픔과 웃음과 죽음과 삶과 선과 악은 서로 교차한다. 인간은 어느 쪽도 쉽게 구분하거나 선택할 수 없다. 煮洑構?둘 사이를 오갈 뿐이다. 그게 봉준호가, 그리고 우라사와 나오키가 바라본 삶의 정의다.

ⓒ프레시안무비

우라사와 나오키는 <몬스터>를 그리기 시작할 무렵 슬슬 시작한다는 생각을 했다. 1995년 무렵이었다. 10년 전에 그린 <파인애플 아미>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첫 번째 장편 만화였다. 그 10년 동안 우라사와 나오키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인물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법을 터득했다. <파인애플 아미>는 베트남 퇴역 군인의 이야기였다. 강인하지만 외로운 남자는 의뢰인들을 구원한다. <야와라>는 여자 유도 선수들의 이야기였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꼭 의사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출판사가 거부하자 <야와라>를 떠올렸다. <야와라>로 우라사와 나오키는 인기 만화 작가가 됐다. 다음은 여자 테니스 선수들의 야이기인 <해피>였다. 모두 인물이 살아 숨쉬는 따뜻한 만화들이었다. <마스터 키튼>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본과 유럽의 혼혈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마스터 키튼은 보험조사원이다. 그는 죽음의 진실에 접근한다. 키튼은 죽음의 참 모습에서 삶의 얼굴을 찾는다. <마스터 키튼>은 그림보다 대사가 많은 만화다. 유럽 문명과 일본 역사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이 들어있다. 주인공 키튼은 <파인애플 아미>의 주인공을 매만진 캐릭터였다. 키튼도 강하지만 외로운 남자였다. <마스터 키튼>으로 우라사와 나오키는 비로소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마스터 키튼>은 이야기의 추진력은 약했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이야기의 공백을 사유와 철학으로 채웠다. <마스터 키튼>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마침내 거대한 이야기에 손을 댄다. 인물과 인물의 인연은 거미줄처럼 엮인다. 인물의 인연은 거대한 철학적인 명제로 이어지고 명제와 명제가 만나면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세계가 형성됐다. 10년 동안 우라사와 나오키는 조금씩 작품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몬스터>였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본 만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었다. "<몬스터>를 그리고 시작할 무렵 이제 슬슬 시작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앞으로 끔찍한 일이 생길 거란 생각으로 제목도 <몬스터>라고 붙였다."

끔직한 일은 이제부터였다. <몬스터>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질문으로 가득 찬 세계를 구축한다. 인간애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악은 나쁜가. 인간은 나약한가. 선과 악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인간은 과연 무언가를 선택할 수는 있는가. 의사인 주인공 덴마는 죽어가는 아이를 살린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덴마는 시장을 수술하라는 병원 원장의 명령을 거역하고 추락한다. 나약해진 덴마는 회의하면서도 아이를 살렸다는 자긍심으로 버티고자 한다. 그러나 아이는 악마였다. 아이는 악마로 키워질 운명이었다. 아이는 덴마를 위해 병원 원장을 죽인다. 덴마는 순식간에 병원의 권력자가 된다. 하지만 덴마는 병원을 떠난다. 아이를 죽일 결심을 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른 채 단지 무언가를 끝내고자 한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봉준호 감독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사회에서 봤을 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는 항상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거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항상 시대 상황이나 배경에 따라 달리 규정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린 항상 보편적인 정의를 찾기를 원하죠." <몬스터>의 덴마는 그걸 찾고 있다. 그러나 덴마가 발견하는 삶의 진실은 분명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20세기 소년>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역작이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평생 동안 그려왔던 단편적인 세계들을 <20세기 소년>에서 집대성한다. 거대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파인애플 아미>의 주인공과 <야와라>의 여자 유도 선수와 <해피>의 아이들이 <20세기 소년>에서 만난다. <마스터 키튼>의 사색과 사유가 등장하고 <몬스터>의 염세적인 세계관이 인물들을 감싼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세계를 창조한다. 그 세계의 크기에 따라 평가 받는다. <20세기 소년>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현실을 모사하지만 현실보다 더 커서 현실을 포개는 세계를 창조했다. <20세기 소년>에는 군국주의에 쉽게 매혹되는 일본 사회와 그 안에서 무기력하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이 등장한다. <20세기 소년>은 우선 친구라는 독재자에 매혹되는 민중과 친구에 대항하는 한 무리의 반정부 테러리스트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20세기 소년>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패러디물로 쓰였다. 사람들은 <20세기 소년>의 한 장면에 대사만 바꿔 달아서 대통령과 정부를 조롱했다. 그러나 <20세기 소년>은 무엇보다 21세기의 절망에 대한 이야기다. 인류가 영원히 절망과 희망과 파멸을 오가는 까닭을 탐구한다. 21세기의 절망은 20세기의 언제인가에 잉태됐을 거다. 아이가 인류의 희망이듯이 절망도 아이들에게서 비롯되는 법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인간을 영원히 지배한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만국박람회와 같은 공통의 기억과 비밀기지 놀이 같은 공통의 추억을 반복 재생하면서 같은 기억을 지닌 우리가 어떻게 다른 자리에 서게 되고 파멸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사회 역시 숱한 만국박람회를 경험했다. 세대마다 저마다의 만국박람회가 있다. 1988년의 올림픽과 2002년의 월드컵과 2008년의 촛불 시위가 있다. 1980년 광주였고 1987년 6월 항쟁이었고 1998년 외환위기였고 2003년 탄핵반대시위였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만국박람회에서 각자의 기억을 갖게 된다. 그 기억이 30년 뒤 한국을 결정한다. 어떤 이는 켄지 일파가 되고 어떤 자는 친구가 되고 어떤 이들은 친구를 숭배하게 되고 어떤 이들은 친구를 이용하게 된다. 어쩌면 절망과 파멸에서 벗어날 길은 켄지처럼 노래하는 것 뿐이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펜과 잉크만으로 만화 안에 우리의 모습을 포갠다. 만화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보잘것 없다.

<20세기 소년>은 3연작으로 영화화됐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한 컷 한 컷이 치밀하게 계산된 이미지다. 그래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은 영화로 만들기에 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한 컷 한 컷의 이미지가 너무 조밀하고 치밀해서 영화 감독은 도저히 다른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 일본 만화 <올드보이>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모티브만 제외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20세기 소년>은 1969년과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오간다. 이야기의 구조가 실줄과 날줄로 엮여있다. 2시간 길이의 영화 한 편으로 담아내기엔 방대하다. 영화 <20세기 소년>의 연출은 <내일의 기억>을 만든 츠츠미 유키히코 감독이 맡았다. 와타나베 겐의 다소 자전적인 이야기였던 <내일의 기억>은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한 신파 멜로였다. 하지만 츠츠미 유키히코 감독은 원래 건조한 다큐멘터리를 선호하는 사회파 감독이다. <20세기 소년>이 지닌 체제의 대한 비판과 인간에 대한 불신과 기대와 문화 혁명에 대한 희망은 츠츠미 유키히코 감독 같은 의식 있는 감독에겐 썩 잘 어울린다.

영화 <20세기 소년>
하지만 그에겐 그다지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이미지와 이야기는 더 이상 가필이 필요없을 만큼 완벽한데다, 보수적이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일본 문화 안에서 원작을 훼손하거나 변형할 수 있는 재해석은 거의 불가능하다. <20세기 소년>의 만화와 영화를 모두 기획한 나가사키 타카시는 일본에서 열린 <20세기 소년>의 첫 시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10년 전에 우라사와 선생과 처음 만화를 시작했을 때 우린 절대 영화화 할 수 없는 만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내가 이 영화를 준비하기 위해서 기획서를 들고 열심히 뛰어다니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사실 우라사와 나오키는 <20세기 소년>을 영화화하는 걸 오래 반대했다. 츠츠미 유키히코 감독은 원작에 최대한 충실하게 찍으려고 앵글 하나까지도 만화를 참조했다. 츠츠미 유키히코 감독은 말했다. "만화를 읽으면서 비교해줬으면 좋겠다. 만화의 한 컷 한 컷을 대본에 오려 붙여 복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 <20세기 소년>에선 역시나 T.REX의 <20TH CENTURY BOY>가 울려 퍼진다. 세 편 연작의 첫 영화 제목은 <강림>이다. 한국에선 9월에 강림한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20세기 소년>을 8년 만에 완성했다. 지금 그는 <플루토>를 그리고 있다. 데즈카 오사무가 <아톰>을 창조한 지 50년이 됐다. <플루토>는 반세기를 기억하지만 기념하진 않는다. <플루토>의 세계에서 아톰은 더 이상 해맑은 아기 로봇이 아니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철부지도 아니다. 아톰은 중동 전쟁에 참여했고 대학살을 저지른다. 아톰이 옳은가. 아톰은 죄가 없는가. 아톰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한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아톰의 고뇌하는 전자 두뇌 안에서 다시 한 번 보편적인 정의의 진리를 질문한다. 프랑스 르몽드는 일본 만화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우라사와 나오키를 가운데에 뒀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세계는 이미 전세계와 소통한다. 일본 만화계는 50년 만에 <아톰>을 부활시키기로 작심했다. 그러나 일본 만화계에서 데즈카 오사무는 신이다. 아톰은 신의 아들이다. 모두들 신의 아들을 재창조할 인물은 우라사와 나오키 밖에 없다고 했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일본 만화계의 새로운 신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