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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21세기…회색지대에서 해법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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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위기의 21세기…회색지대에서 해법을 찾자"

[아시아 과학자를 찾아서] 대만의 폴 호 박사

<프레시안>은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와 공동으로 '아시아 과학자를 찾아서' 연재를 진행 중이다. 대만, 베트남, 중국, 일본, 몽골 등 아시아 각국의 과학자를 직접 만나 그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 '아시아에서 과학자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따져보는 기획이다.

이 기획을 통해 독자들은 오랫동안 긴밀하게 교류해왔고,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꾸려갈 수밖에 없는 아시아 각국의 과학 현실을 직접 살피고, 현장 과학자의 생생한 고민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인공은 대만의 폴 호(57·Paul T. P. HO) 박사이다. 호 박사는 대만을 대표하는 천문학자로 현재 대만 중앙연구원 산하 천문물리연구소(Institute of Astronomy and Astrophysics·ASIAA) 소장을 맡고 있다.

호 박사는 12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후 MIT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대(1982~1990년), 스미소니언 천문대(1989~2005)에서 천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전파 천문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명성을 쌓았다. 그는 1993년 돌연 천문학의 불모지대였던 대만으로 돌아와 15년간 대만 천문학을 일으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호 박사가 3년 전부터 소장을 맡고 있는 천문물리연구소는 불과 15년 만에 세계 천문학계에서도 주목하는 연구 성과를 내면서 급성장하는 곳이다. 최근 이 연구소는 대만 정부로부터 10년간 2000만 달러(약 200억 원) 투자를 받기로 하고, 미국, 일본 등과 함께 칠레 알마(ALMA) 천문대 건설에 공동으로 참여하기로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내로라하는 지위를 다 포기하고 과학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대만으로 돌아와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는 호 박사는 온갖 과학을 둘러싼 사회 문제를 놓고 폭넓은 식견과 혜안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이번 인터뷰는 연세대 천문대 이명현 박사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 폴 호 대만 중앙연구원 산하 천문물리연구소 소장. ⓒ사이언스북스

"젊은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은 기성세대의 의무"

프레시안 : 미국에서 성공한 과학자로 지내다 대만으로 왔습니다. 대만에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호 : 제가 지금 있는 연구소는 15년 전인 1993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초대 연구소장은 타이푼 리 박사였지요. 그는 대만의 천문학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대 대만 정부는 대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그 목록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천문학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지요.

리 박사는 나처럼 외국에 있는 과학자들이 그 작업을 돕기 위해 대만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당신이 외국에 있다면 모국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비록 외국에 살고 있지만 항상 모국을 잊은 적이 없지요. 마침 기회가 온 터라 기꺼이 모국을 돕기로 결심하고 대만으로 왔습니다.

프레시안 :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여겼나요?

호 : 나는 미국에 45년간 있었습니다. 가끔 아시아에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연구를 하며 보냈습니다. 내가 아시아에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젊은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프레시안 : 모두가 다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호 : 두뇌 유출(brain drain)은 한국, 일본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만에서는 큰 문제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경제 상황이 낫다는 이유로 외국에서 계속 머물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왜냐고요? 식민지 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그 당시에는 제국주의 국가가 저개발 국가에 와서 금, 은,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을 수탈했습니다.

그 때 중국, 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저개발 국가는 앉아서 자원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근대화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였지요.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지금 21세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마지막 자원입니다. 그 사람이 다른 나라로 유출된다면 그 나라는 결코 발전할 수 없습니다.

프레시안 : 두뇌 유출을 막고자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호 : 연구 환경의 개선이 가장 중요합니다. 젊은 과학자들은 어디에서 훈련을 받았건 간에 모국에 미래가 있다고 믿으면 돌아올 것입니다. 저희는 그런 환경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어느 나라든 어느 분야든 최고의 인력을 보유하려면 연구 환경에서 앞서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외국으로 나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 연구소의 목적은 우수한 과학자를 유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가 이 분야를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꼭 천문학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는 과학의 모든 분야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분야 간 지식을 모으는 것은 더욱더 중요해질 테니까요.

"외국인 연구자가 필요한 네 가지 이유"

프레시안 : 대만에 온 지 벌써 15년이나 되었습니다. 또 최근 3년간은 이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왔는데…. 그 동안 가장 강조해온 활동은 무엇입니까?

호 : 이 연구소가 생긴 이래, 추구한 목표는 오직 하나입니다. 최고의 과학 연구를 하는 것이지요. 최고의 과학 연구는 최고의 스태프가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소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우수한 인력을 키우고, 그들이 우수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이 연구소는 아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국제 교류가 활발합니다. 당장 연구소에는 중국, 대만 외에도 일본, 베트남, 유럽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연구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국제 교류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곳의 외국 연구원들이 대만 과학자의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을까요?

호 : 좀 자세하게 얘기를 해볼게요. 외국인 연구자가 필요한 이유는 많습니다. 첫째, 대만 천문학은 아직 발전 단계입니다. 훌륭한 연구 인력과 인프라스트럭처가 부족합니다. 당연히 연구를 하기 쉽지 않아요. 천문학을 잘 아는 학생도 별로 없고, 수준 높은 연구를 진행 중인 과학자도 없습니다. 당연히 외국 과학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둘째, 대만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과학자가 모이는 국제적인 연구소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연구소 발전에 큰 자극이 됩니다. 외국 과학자가 연구소를 찾아오게 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연구 성과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15년간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셋째, 연구소에 외국 과학자가 많아야 하는 이유는 언어 때문입니다. 언어는 아시아의 모든 대학, 연구소가 강조해야 할 부분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바로 영어입니다. 국제적으로 경쟁하려면 반드시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실제로 외국에서 온 과학자와 공동 연구를 하면서 이 연구소의 모든 사람들이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넷째, 과학은 모든 곳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속한 지역의 문화에 따라서 똑같은 연구 과제에 접근하고 수행하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세계 곳곳의 과학자가 모여 있는 연구소를 만들면 그 모든 아이디어를 다 모를 수 있습니다. 같은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끼리 모여 있으면, 언제나 똑같은 것만 반복할 뿐입니다.

이런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 연구소가 외국 과학자를 유치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성과가 계속 나타나고 있고요.

"왜 아시아 과학자들이 서로 협력해야 하는가?"
▲ 폴 호 박사는 "아시아 과학자의 연대는 쉬울 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은 물론 인류를 위해서도 긍정적"이라고 말한다. ⓒ사이언스북스

프레시안 :
얘기를 듣다보니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보통 아시아 과학자들끼리 좀 더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방금 얘기한 대로라면 아시아 과학자보다는 미국, 유럽의 과학자와 협력하는 게 모든 면에서 이익입니다. 더구나 이 연구소의 여러 과학자를 만나다보면 종종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 유럽에서 훈련을 받은 아시아 출신 국가의 과학자들은 모든 면에서 일본과 같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온 과학자보다 미국, 유럽의 과학자와 같이 일하는 게 편하다고 얘기합니다. 자, 아시아 과학자들이 왜 협력해야 합니까? 아니 굳이 아시아 과학자들끼리 협력할 필요가 있나요?

호 : 굉장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에요. 왜 아시아의 과학자들이 서로 협력해야 하는가?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선 아시아는 다른 지역 그러니까 유럽, 미국과 경쟁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서양은 아주 강력합니다. 만약 당신이 대통령이라면, 국제 무대에서 아시아 국가가 서양 국가와 동등하게 대우 받지 못하는 걸 실감할 겁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천문학도 그렇지요.

우리는 그들을 넘어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 더 성장해야 합니다. 서양과 동등해지려면 모든 면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강해지기 위해선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 국가 간 연대가 필요합니다. 이게 아시아 과학자들끼리 연대해야 할 첫 번째 이유입니다.

다른 이유를 말해볼까요? 천문학의 경우만 놓고 보면, 여러 과학 분야 중에서 국제 교류가 아주 활발한 편입니다. 내 동료는 세계 도처에 있습니다. 나는 어디를 가든 그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눕니다. 나의 경우에는 아시아의 동료와 저녁 식사를 할 때 가장 편합니다. 수천 년간 쌓아온 공통의 역사 덕분에 쉽게 친해질 수 있습니다.

만약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외면하고 서양 국가와 협력한다면, 우리는 아시아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그냥 또 다른 서양 국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다양한 아이디어'는 바로 개인, 지역이 고유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질 때 나옵니다. 그런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부딪칠 때 더 창조적인 생각이 나올 수 있지요.

하나의 생각, 예를 들어 서양이 추구해온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은 아시아 국가는 물론 인류 전체로서도 큰 손실입니다. 아시아 과학자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돼 온 아시아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아시아적인 생각, 방법을 정립해 나가야 합니다. 서양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말입니다.

여기서 조심할 게 있습니다. 아시아의 정체성을 강조한다면서 아시아 전체가 한국, 중국처럼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아시아의 각국은 또 저마다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요. 또 서양은 서양끼리, 아시아는 아시아끼리만 연대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의 개성은 최대한 살리면서 모두와 연대해야 합니다.

단, 비슷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시아 과학자의 연대는 더 쉬울 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은 물론 인류를 위해서도 긍정적입니다. 바로 우리 연구소에서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지요. 지난 15년간 많은 일본, 한국 과학자들이 우리 연구소에서 일했고, 눈에 띄는 성과를 공동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의 정체성, 새로운 과학의 자극제"

프레시안 : 아주 흥미로운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소를 포함해 지금까지 만난 많은 천문학자는 특히 과학 활동에 있어서 아시아의 가치, 이런 식의 접근에 굉장히 부정적이었습니다. 과학은 어디서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동양의 과학, 서양의 과학, 이런 생각은 난센스라는 지적이지요.

호 : 과학이 어디서나 보편적이라는 지적은 맞습니다. 나 역시 이견이 없습니다. 내 나름대로 덧붙여서 더 설명하자면, 과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과학자의 창조물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의 발전에는 국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과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은 고유한 역사 속에서 형성된 정체성을 잃어서는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우리는 생명 활동을 하려면 끊임없이 먹을거리를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먹을거리가 맥도날드 햄버거와 피자헛 피자뿐이라면 그건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벨기에 맥주는 아주 맛있지만, 맥주가 그 한 종류뿐이라면 아주 끔찍한 일이지요.

똑같이 생명 활동을 위해서 먹을거리를 먹지만 각 지역마다 그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바로 과학도 그래야 합니다. 당연히 과학에는 국경이 없어야 하고, 그 결과는 어느 지역에서나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또 공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역 고유의 접근 방식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전혀 다른 과학 분야, 전혀 다른 과학 주제를 연구할 수도 있어요. 확신하건대, 이런 다양성이 꽃을 피울수록 훨씬 더 빛나는 과학의 성과가 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아시아의 정체성, 아시아의 가치 이런 걸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천문학 분야에서 그 '다른 관점'이 성과를 낸 예가 있을까요?

호 : 우리는 칠레에 지름 12미터(m)짜리 전파망원경 64대를 배열해 마치 큰 전파망원경 하나로 관측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ALMA' 천문대를 칠레에 건설 중입니다. 유럽, 미국, 일본이 주요 파트너로 참여하는 큰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하는 과정에서 특히 우리 연구소가 긴밀하게 협조하고 교류하는 나라는 바로 일본입니다.

우리와 일본은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최고의 성과를 내고자 여러 가지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미국, 유럽 과학자는 절대로 생각해낼 수 없는 해결 방법이 제시되는 경험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는 이런 긍정적인 성과가 공동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시아의 연대가 갖는 힘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오랫동안 미국에서 과학자로 살아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서양 과학자와 동양 과학자 중에서 누구와 일하는 게 더 편한가요?

호 :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둘 다 일하기 편합니다.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과 만나는 게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일대일의 관계에서는 누구나 편합니다. 스페인, 멕시코, 일본, 중국, 한국, 대만 등 각국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일하고 있지만 그 모두와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서양 학생과 동양 학생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학생과 교수의 관계가 동등합니다. 학생은 교수와 논쟁하고, 교수에게 도전합니다. 그러나 동양 학생은 교수를 존경합니다. 교수가 무엇을 하든지 학생은 그것을 따릅니다. 어떤 쪽이 좋을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최선이라고 여기는 것은, 바로 그 중간입니다.

교수에게 대들기만 하고 의견은 듣지 않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고 도전하지 않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지요. 저는 서양 학생과 도양 학생을 그 중간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속 강조한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최선의 성과를 내는 방식입니다.

"개별 과학자의 협력이 공동 연구의 전제 조건"

프레시안 : 아시아권을 아우를 수 있는 공동 연구 기관을 구상하고 일본, 한국의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포항에 본부가 있는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도 그런 연구 기관일 텐데요.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국제 연구 기관을 이끄는 입장에서 어떤 조언을 하고 싶나요?

호 : 협력은 언제나 일대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연구소 대 연구소의 협력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과학자 사이의 협력입니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우리 연구소는 연구 단위(working level)에서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연구 단계에서의 협력이 활발해진다면 연구소 간의 협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입니다.

내가 일본과 공동 연구를 많이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내 친구들이 일본에 많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주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들이라 함께 일하기가 편합니다. 일본에 가서 대화하고, 질문하고, 요구 사항을 이야기하는 것이 쉽습니다. 공동 연구 기관의 출발점은 과학자 사이의 연구 협력을 늘리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상향식의(bottom up) 방식을 선호하는 건가요?

호 : 그렇습니다. 과학자들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지면 당연히 그 과학자가 소속된 기관 간의 교류도 활발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기관 간 네트워크는 아주 생산적이고 단단하지요.

프레시안 : 아시아에서도 유럽연합(EU)과 같은 정치적 공동체가 느슨하게라도 만들어진다면 과학 교류가 더 활발해질 수 있을까요?

호 : 글쎄요. 정부의 의제는 과학자 공동체와는 방향이 다릅니다. 정치인은 과학자와 아주 다른 차원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요. 정치인은 과학자들이 국제 교류를 통해 기대하는 성과를 넘어서는 이익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어요. 그런 구조가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아시아 각국 간에 좀 더 긴밀한 협력 관계가 마련된다면 아시아 과학자들이 안정적으로 공동 연구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과학 연구에 대한 재정 지원은 언제나 다른 요인들(경제 상황, 정치 문제, 자연 환경, 시민의 가치관 등)에 종속되기 마련입니다. 갈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하고 있지요.

만약 아시아 각국이 긴밀하게 협력한다면,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 큰 과학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의 거대 연구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예산은 결코 한 국가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프로젝트는 여러 나라가 협력을 해야만 현실이 될 있지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자 필요해"
▲ 폴 호 박사는 "정부가 균형 있는 과학 정책을 추진하려면 정부와 시민을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과학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국민이 존경하는 과학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이언스북스

프레시안 :
화제를 바꿔볼까요? 한국, 일본 정부는 과학 정책을 추진할 때 당장 성과가 나타나는 분야, 예를 들면 생명공학과 같은 과학 분야에 집중 투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만 정부는 상대적으로 순수과학 전반을 골고루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호 : 그것이 가능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과학자들이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정부, 시민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는 강한 목소리를 가져야 합니다. 당연히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내는 과학자만이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바로 과학 정책과 직결됩니다. 정부는 항상 집중 투자할 부분을 선정할 때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요.

물론 정부의 과학 정책은 사회적으로 결정됩니다. 과학자들의 생각이 100% 반영될 수 없습니다. 최종 결정은 당연히 국민과 그것의 의견을 수렴한 정부가 내립니다. 만약 국민의 깊은 신뢰를 받는 과학자들이 많다면, 정부는 좀 더 과학계의 목소리가 반영된 과학 정책을 수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레시안 : 대만에는 그런 과학자가 있나요? 예를 들면 당신도 그런 과학자인 것 같습니다만….

호 : 네, 있습니다. 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웃음) 예를 들어서 당신도 인터뷰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 리위앤저(李遠哲) 박사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노벨상(1986)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과학계의 권위자일 뿐만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책임있는 행동을 한 덕분에 국민으로부터도 깊은 존경을 받고 있지요.

"기초 과학이야말로 혁신의 기본 조건"

프레시안 : 대만도 최근 생명공학 분야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호 : 네, 맞습니다. 성과가 빨리 나타나는 과학은 중요합니다. 천문학이 암 치료 연구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초 과학이 장기적인 과학, 경제 발전의 중요한 초석이 된다는 걸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최고의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런 논쟁은 이미 미국, 유럽에서는 끝났습니다. 미국, 유럽은 기초 과학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만,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아직도 논쟁 중입니다. 왜냐하면 발전 수준이 미국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성과를 내서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기초 과학과 같은 장기 투자가 필요한 부분을 소홀히 대하는 원인입니다.

그 결과 계속 미국, 유럽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왜 혁신적인 과학기술이 미국, 유럽에서 나타나는지, 아시아 국가들은 그것을 모방만 하고 있는지를 잘 따져봐야 합니다.

프레시안 : 대만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천문학에도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으니까요.

호 : 그건 천문학이 갖는 특징 때문입니다. 천문학은 여러모로 비실용적인 학문입니다. 당장 더 좋은 자동차를 만들려면 오늘 어떤 연구를 해야 할까, 이런 발상이 천문학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천문학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기초 과학입니다. 우리는 '존재(existence)'를 둘러싼 질문을 던집니다. '물질은 어디서 왔는가?' '우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것인가?', '외계 생명체는 존재할까?' 이런 질문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을 법한 것입니다.

물론 천문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질문 중에는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질문도 있습니다. '쿼크는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고에너지 입자가 있나' 이런 질문 말입니다. 대중이 관심을 가지는 질문이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질문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 견해를 말하자면, 천문학자는 대중 특히 젊은이들이 더 매력을 느낄 법한 질문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천문학의 가장 큰 기능은 젊은이들이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미래를 탐험하는 것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초 과학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안내자 같은 역할이라고 할까요? 물론 이 과정에서 부산물도 있지요. 예를 들어 CCD 카메라나 공항에서 쓰이는 엑스레이 검색기 같은 거요.

"과학자는 대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 폴 호 박사는 "대중은 방향을 설정하는 똑똑한 사람들"이라며 "과학자는 대중이 관심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주시하고, 그 분야를 연구 주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이언스북스

프레시안 :
여러 번 언급했듯이 과학 연구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중의 동의를 얻는 게 갈수록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는 그 동안 대중을 가르치려고만 했지,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미숙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호 : 따지고 보면 모든 과학은 정부의 지원을 받습니다. 그건 결국 시민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기꺼이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에 과학자는 그 예산을 통해서 원하는 과학 연구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과학자는 우리의 진짜 고용인이 바로 시민이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합니다.

따라서 과학 연구는 반드시 시민에게 설명되어야 합니다. 대중과의 소통은 단순히 더 많은 연구비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반대로 과학자들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고용인인 시민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대중과 과학자의 소통은 과학 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과 과학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프레시안 : 이 연구소는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호 : 2007년에는 고등학교 과학 교사를 초청해서 하와이의 천문대 시설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이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대만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의 교수가 천문대 시설을 견학하고 수업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원격 영상 포럼을 열기도 했지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교사와는 계속 연락하면서 과학과 천문학에 대해 토론합니다.

지금 그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직접 망원경을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낸 세금으로 어떤 과학 연구가 진행되는지를 설명하는 한편, 그들이 이런 과학 연구를 놓고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솔직한 의견을 듣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중에게 최신의 과학 정보를 제공하고, 또 이해를 돕지요.

과학자는 좋은 연구 결과를 얻으면 보람을 느낍니다.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걸 대중과 공유해야지요. 더 나아가 과학자들은 대중이 관심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주시하고, 그런 분야를 연구 주제로 삼아야 합니다. 대중은 상식을 만들어내고, 방향을 설정하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과학자는 대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프레시안 : 젊은이를 과학으로 인도하는 걸 얘기했습니다. 한국, 일본은 지금 큰 위기감을 갖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젊은이들이 이공계를 지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공계 위기가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호 : 역시 그런 위기는 항상 있었습니다. 지난 10년은 경영학이 대세였습니다. 그 이전 10년 동안은 아마도 법학이었지요. 그 이전 10년은 의학이 인기였습니다. 사회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찾아 움직여 왔습니다. 젊은이들은 어떤 직업이 전도유망한지 늘 촉각을 세웁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정해주기도 하고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나 역시 그랬어요. 어머니는 항상 내가 엔지니어가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지요. 그게 안정적인 직업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젊은이들이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야하지 않을까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좇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타고난 재능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불행히 지금 대부분의 사회는 돈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죠. 우리는 교사로서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학생에게 일깨워야 합니다. 그것이 교사의 의무입니다. 모든 사람이 물리학, 천문학을 공부할 수 없겠지만, 여전히 일부는 기초과학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의 바람입니다.

프레시안 : 젊은 사람이 과학계를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불안정한 연구원의 지위 문제도 있습니다. 연구원을 고용하는 입장에서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십니까?

호 : 과학자와 같은 학문을 하는 이들의 목적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닙니다. 좋은 성과를 내서 큰 만족감을 느끼는 게 목적입니다. 이런 과학자는 부자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빈자는 아닌, 생활을 유지할 정도로 소득을 올릴 수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학자는 학계의 바깥에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소장으로서 나는 고용한 사람들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학생, 연구원, 교수, 기술자 등을 고용할 때, 나는 그들의 다음 자리를 명확히 언급합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연구소 식구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합니다.

이런 불안정한 시대에는 모든 직업에 '보장'은 없습니다. 변호사도 오늘 당장 해고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 나가던 회사도 하루아침에 망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학생에게 뭘 강조해야 할까요? 핵심은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최고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런 방법을 습득한 이들은 설사 천문학자가 되지 않더라도 어느 분야에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아주 생산적이고 똑똑해서 어떤 문제든 풀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요.

과학자들은 젊었을 때 아주 생산적입니다. 교사, 선배로서 그들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저를 찾아와서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일단 지금 하고 있는 연구를 끝내라. 그 연구를 끝내면 너는 개인적으로도 큰 보람을 느낄 뿐만 아니라, 더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 학생은 연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훨씬 더 좋은 조건의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나는 항상 다음 단계를 염두에 두고 그들이 최고가 될 수 있도록 훈련을 합니다. 물론 이 훈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선택한 삶을 책임져야겠지요.

"공동체 외면하는 과학자는 불행하다"

프레시안 : 과학자 중에는 과학자는 사회와 상관없이 내 연구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호 : 나는 늘 연구소의 모든 사람에게 과학자의 의무를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족이 바로 책임감을 느껴야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일은 그저 일일 뿐입니다.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연구가 아니라 매일 이야기하는 사람들, 함께 사는 사람들, 함께 있으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일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족과 친구가 없으면 그것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 작가, 샐러리맨 등 모든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학생에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얘기했지요? 거기에 더해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런 게 강조가 돼야 학생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헌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프레시안 : 과학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입니까?

호 : 모든 과학자의 목표는 진리 추구입니다. 그건 과학자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늘 진리가 무엇인지 파고듭니다. 어떻게 작동하고, 작동하는 원리는 무엇인지 찾는 것이 진리 추구입니다. 진리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그것을 과학자는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과학자가 진리를 밝혀내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최고의 과학을 연구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의 진리 탐구는 인문·사회과학자보다 쉽습니다. 맞거나 틀리거나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인문·사회과학에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들의 진리 탐구는 그래서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과학 진리 역시 상대적이지요. 지금 알고 있는 진리가 유한하고 한시적이라는 걸 과학자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발전할 수 있지요.
▲ 폴 호 박사는 과학 연구만큼 가족과 같은 과학자가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 ⓒ사이언스북스

"젊은 세대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프레시안 : 이제 몇 가지 개인적인 질문을 해볼까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어머니는 반대를 했다고 얘기했습니다.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때는 언제입니까?

호 : 저는 천천히 과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은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도약대입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제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이전의 삶은 흐릿한데, 대학에 들어오면서 뭘 해야겠구나, 이렇게 각성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물리학을 전공했습니다. 물리학을 아주 좋아했고 교수들이 꼭 마법사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리학은 정말 멋진 학문이었습니다. 당시는 1960년대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반전 시위에 참여했지요. 학문의 즐거움과 사회적 책임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섞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공부를 본격적으로 계속하기로 결정했지요. 그러자 공부 자체가 재미있기 시작했습니다. 지도교수의 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훌륭한 연구자인 동시에 좋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와 하는 연구에 점점 더 빠져들었죠. 어떤 일이든 좋은 동료와 흥미로운 주제,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건 선순환(feedback circuit)됩니다.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계속 하게 되지요.

나를 과학자로 이끈 건 연구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유였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여자 친구였습니다. 여자 친구가 같은 대학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저도 공부를 계속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아까 말했듯이 일은 일이고, 인생은 인생입니다. 그 두 가지를 통합적으로 생각해야지요.

프레시안 : 그 여자 친구와는 어떻게 됐나요?

호 : 지금의 내 아내입니다. (웃음)

프레시안 : 당신은 미국, 대만에서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유능한 과학자로 키워냈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언제쯤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정하나요? 한국의 경우는 보통 석사 과정을 하면서 취업을 할 것인지, 공부를 계속할지 결정하곤 합니다만….

호 : 학생은 언제나 진로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선택의 시기가 나라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각 나라의 경제 사정이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선진국의 학생은 선택의 폭이 넓습니다. 후진국의 학생은 아무래도 선택의 폭이 좁지요. 특히 그들은 경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차이는 뚜렷합니다.

중국 본토에서 미국으로 유학 간 학생을 보면 졸업 후 백이면 백, 기업에 취직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이주자로서 저 역시 취직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 세대보다는 그 걱정이 덜 했고, 다음 세대보다는 많았습니다. 내 아이들은 비교적 윤택한 삶을 살아왔고, 하고 싶은 일을 어렵지 않게 지원받을 수 있지요.

나는 젊은 세대가 하고 싶은 일을 돈 걱정 없이 할 수 있어야 그 나라의 또 인류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우리가 가진 자원을 현명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내 말의 핵심은 사람이 자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능력을 즐겁게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바로 사회의 역할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 경이로워"
▲ 폴 호 박사는 "갈등은 폭력이 아니라 대화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사이언스북스

프레시안 :
지금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물리학과 천문학을 선택할까요?

호 : 네. 물리학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분야였으니까요. 내 아내는 생화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둘은 항상 티격태격하지요. 나는 항상 아내에게 물리학이 더 낫다고 얘기합니다. 물론 아내는 반대입니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나 역시 속으로는 그녀의 연구가 아주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최근에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는 생명과학입니다. 생명과학은 과학의 미래를 선도하는 개척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은 생명과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과학 외의 분야로 범위를 넓힌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호 : 모든 종류의 예술입니다. 저는 모든 종류의 예술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회화와 조각에 관심이 많습니다.

프레시안 : 현대 미술은 어떤가요?

호 : 모든 미술을 좋아합니다. 과학은 배운 것을 적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예술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작품이 탄생합니다. 그래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교조주의,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적"

프레시안 : 종교가 있습니까?

호 : 저는 가톨릭 학교에 다녔지만, 가톨릭 신앙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종교는 개인과 신 사이의 관계이므로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 공동체는 별로 좋지 않은 것을 주입하려는 것 같습니다. 종교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은 그 부작용이겠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종교인은 달라이 라마입니다. 그의 책들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에서 그는 '수천 명의 사람에겐 수천 개의 종교가 있다'고 말하더군요. 저도 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프레시안 : 서양의 과학자 중 일부는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 아주 비판적입니다. 심지어 일부 과학자는 무신론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습니까?

호 : 많은 사람은 종교가 '무지'를 탈피하기 위한 노력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종교는 설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과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은 모든 것의 답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증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것이 과학과 종교가 서로 겹쳐지는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과학과 종교는 철학이라는 한 뿌리에서 출발했습니다. 어떤 종교는 유연하고, 어떤 종교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종교는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고 종교 안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주 진보적인 생각입니다. '과학자도 종교를 가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물론입니다'라고 답하겠습니다.

제가 가장 경계하는 태도는 교조주의입니다. '오직 이 답만 옳다, 다른 대안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과학자와 종교인은 둘 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공론장에서 토론해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는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확신을 갖는 건 위험하지요.

프레시안 :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달라이라마 얘기가 나와서 질문을 합니다. 티베트는 중국과 갈등 관계입니다. 대만 역시 그렇지요. 중국의 대국주의를 놓고 많은 아시아 국가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호 : 나는 정치 얘기를 할 때 늘 주의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공식적으로는 중국 시민도 대만 시민도 아닙니다. 개인으로서 의견을 밝히는 건 상관이 없지만, 연구소장으로서 인터뷰를 할 때는 특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더구나 내가 아는 건 아주 제한적입니다. 나는 물리학, 천문학도 다 알지 못하는데 정치는 두 말할 것도 없지요.

이런 전제 조건을 염두에 두고, 사견을 말해보겠습니다. 나는 갈등이 폭력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도 대화를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통해 지금 진행 중인 많은 문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흑백논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회색 지대에 서자"
▲ 폴 호 박사는 "교조주의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적"이라며 "21세기의 위기의 해법은 회색지대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이언스북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입니다. 새로운 세기가 되면서 온갖 문제들이 우리 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테러, 전쟁, 지구 온난화, 에너지 위기, 경제 위기 등…. 어떤 이들은 이런 문제를 과학이 해결할 수 있으므로 인류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과학기술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낳을 것이라고 불안해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호 : 나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해결해가는 것이 내 스타일입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도 좋게 사용될 수도, 나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위기의 원인을 과학이라고 탓하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미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흑백논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회색 지대에서 문제를 봐야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학자들이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또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과학자도 많습니다. 그들이 책임감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만 동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만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강조했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니까요.

프레시안 : 생물학에 관심이 있는 자녀가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들이 살아갈 미래는 더 나은 세상일까요?

호 : 그러길 바랍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가능합니다. 또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우리는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든 단계에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했습니다. 고통을 피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그걸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들도 있었지요. 결론은 어떤가요? 그걸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과학자로서의 삶에 행복합니까?

호 : 네. 저는 아시아의 과학자로서 아시아에서 과학하는 게 행복합니다. 내 가족이 여기있어서가 아니라 아시아 사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참 편안합니다.

프레시안 :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요?

호 :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한국 방문은 내가 늘 겪어온 실패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 많은 친구와 동료가 있는데 한 번도 못 갔습니다. 올해는 꼭 한국을 방문해볼 생각입니다.

(이 인터뷰는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가 운영하는 웹진 '크로스로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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