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최고위원회의에서 그랬다. "어청수 경찰청장이 특정 종교에 편향적인 자세가 있는 것 아니냐. 이런 상황을 수습하려면 어 청장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불교계가 불교도대회를 열기 이틀 전에 한 말이다. 불교계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인 '어청수 경질'을 수용하는 말이다. 누가 봐도 명백하다. 발언 의도는 불교계 달래기다.
궁금하다. 불교계가 '어청수 경질' 요구를 끈질기게 폈는데도 꿈쩍 안 한 여권이다. 그런 여권의 핵심부에 있는 박희태 대표가 돌연 경질을 주장하고 나섰다. 어떤 것일까? 입장을 바꾼 것일까? 정말로 '어청수 경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렇게 볼 여지는 있다. 박희태 대표의 발언이 있기 전에 물밑 움직임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이 '사찰 순례'에 나섰고 청와대의 맹형규 정무수석 등이 불교계와 대화를 가졌다. 그런데도 불교계는 요지부동이었고 불교도대회를 취소하지도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면 좀 더 성의 있는 자세를 보이는 건 불가피하다. '반성'과 '다짐' 만으로 설득할 수 없다면 몸으로 진정성을 보이는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어청수 경질'이다.
박희태 대표가 '어청수 경질' 발언을 한 어제의 최고위원회의에 김장실·신재민 문화부 1,2차관이 동석했다는 점, 그들이 동석한 이유가 문화부가 마련한 불교계 달래기 방안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유추는 더욱 힘을 얻는다. 문화부 방안에 여당의 구체적인 주문이 들어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른다. 박희태 대표가 '어청수 경질'을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을 기정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인사권자는 박희태 대표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어청수 경질'을 작심했다는 후문이나 정황은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어제 청와대 수석들에게 "공직자들은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종교 문제와 관련해 국민 화합을 해치는 언동이나 업무 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 말에서 경질 의지를 읽을 수는 없다. 그저 원론적 당부로 해석될 뿐이다.
오히려 김장실·신재민 차관이 박희태 대표의 발언을 청와대에 전달하기로 했다는 얘기가 더 또렷하게 들린다. 이 얘기를 곧이곧대로 들으면 문화부의 애초 불교계 달래기 방안에 '어청수 경질'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럴 만도 하다. '어청수 경질'은 이명박 대통령이 쉽게 꺼내들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어청수 경찰청장의 '충심'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계획이다.
요즘 들어 유난히 '법치'를 강조하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법치를 국정운영의 3대 중심축의 하나로 삼겠다"고 하고 "법치 없이는 선진일류국가도 이를 수 없다"고 단정하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이런 이명박 대통령이 과연 어청수 경찰청장을 하루아침에 경질할 수 있을까? 쉬운 일이 아니다. '법치'의 손발이 돼야 할 경찰을 독려해도 부족한 판에 그 수장을 경질하면 흔들린다. 경찰 조직이 흔들리고 이른바 '공권력'이 흔들린다.
이것만이 아니다. 정부의 그간 태도와 주장에 견줘보면 어청수 경찰청장은 경질될 만큼 중과실을 범하지 않았다. 경찰관이 조계종 총무원장 승용차를 검문검색한 건 '과잉수사'와 '결례'에 해당할지는 몰라도 '위법'은 아니다. 어청수 경찰청장의 사진이 조용기 목사와 함께 경찰 복음화 금식대성회 광고지에 실린 것도 '부적절'한 처신이었는지는 몰라도 '탈법'은 아니다.
이런 어청수 경찰청장을 불교계가 요구한다고 해서 단칼에 베어버리면 자기모순에 빠진다. '법치'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기실 '정치'를 우선시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쪼개놓고 보니 난감하다. 한나라당으로선 조직표,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조직표를 갖고 있는 불교계와 마냥 척을 질 수 없다. 어청수 경찰청장을 싸고돌아 불교계와 척을 지는 건 자기 무덤을 파는 것과 같다. 이명박 대통령으로선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하고 자기 소신을 실천해야 한다. 어청수 경찰청장을 경질하면 '법대로 통치' 기반이 일시적으로나마 흔들린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풀 것인가? 참으로 복잡한 방정식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익히 보아온 '소나기 피하기' 방법이 남아있다.
내일로 예정된 불교도대회만 넘기면 어떻게 해볼 여지가 생길지 모른다. 불교도대회가 더 거센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로 매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불교도대회를 계기로 불심의 반발이 소강국면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차후에 조근조근 설명하고 하나하나 시행할 방책을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어청수 경질'은 빼고….
이렇게 보면 박희태 대표의 '어청수 경질' 주장은 애드벌룬 띄우기에 해당한다. 일단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립서비스에 해당한다. 현재로선 그렇다. 내일 일은 모르겠지만….
* 이 글은 뉴스블로그 '미디어토씨(www.mediatossi.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