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김경문 감독식 '빅볼'은 한국 야구계는 물론 세계대회에 참가하는 다른 팀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며 올림픽 금메달 획득의 밑거름이 됐다. 김경문 감독은 '성공하면 선수 칭찬, 잘못하면 감독 탓'을 하기 마련인 야구 무대에서 과감한 선수기용으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용기를 보여줬다.
김경문 감독이 데려온 선수 중 '한 방'이 있는 선수는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 이대호(롯데 자이언츠), 김동주(두산 베어스) 정도가 다였다. 올 시즌 성적만을 놓고 본다면 김동주와 이대호는 장타율보다 출루율이 더 돋보이는 선수들이다. 나머지는 전부 '잘 달리고 잘 치는' 선수나 수비가 튼실한 선수였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 홈런 순위 1위를 달리는 김태균(홈런 26개), 김태완(홈런 24개, 이상 한화)이나 그 동안 국제무대 해결사로 나섰던 박재홍(SK 와이번즈), '장사' 심정수(삼성 라이온스)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회가 직접 나서 선수선발에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김경문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프로야구에서 보여주고 있는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대표팀에도 안착시켰다. 된장 냄새나는 한국식 '빅볼'은 김경문의 과감한 용병술과 맞물려 이번 대회 최상의 시나리오를 써냈다.
김경문식 '발의 힘'의 야구
김경문이 짠 팀의 구성은 좋은 말로 신선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자면 상식을 벗어났다. 먼저 테이블 세터진이 1번에서 3번까지 이어졌다. 출루율 높은 1, 2번 타자가 나서 내야를 흔들고 3번에 배치된 거포가 불러들이는 현대야구와는 조금 달랐다.
대신 김 감독은 4번부터 6번에 한 방 능력이 있는 이승엽, 김동주, 이대호를 집중 배치했다. 이는 상위 타선의 출루가 잘 될 경우 상대 내야에 더 큰 부담을 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공격의 맥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한 편으로 우려를 낳았다.
1번 타순으로 공격을 이어가는 9번 자리에 타격이 가장 좋지 않은 박진만(삼성 라이온스)를 놓았다는 점도 예상을 벗어난 타순이었다. 지명타자까지 쓸 수 있는 규정을 감안하면 9번 자리에 출루율이 높은 선수를 배치해 상위타선으로 공격이 이어지게끔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대표팀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9번 타순에 발이 빠른 가와사키 무네노리(소프트뱅크 호크스)를 배치한 것은 바로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김경문의 구상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빠른 발의 이종욱(두산 베어스)과 이용규(기아 타이거즈)는 감독의 기대에 100% 부응했다. 김현수(두산 베어스)는 올림픽 본선에서 3할 후반대의 고타율로 찬스를 계속 이어나갔다. 예선 대만 및 미국과의 경기에서 승리 원동력은 이들의 빠른 발과 적시에 터진 진루타였다.
4-6번에 들어선 중심타자들도 제 몫을 다했다. 이승엽과 이대호는 필요할 때마다 확실하게 승부를 결정짓는 한 방을 터뜨렸다.
특히 김동주와 이대호의 높은 출루율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들은 안타를 치지 못하더라도 좋은 선구안으로 출루를 이어나가 7번 고영민(두산 베어스)에게 찬스를 이어줬다. 중심 타선의 출루는 상대 선발진의 집중력 저하와 수비진 피로를 이끌어냈다.
김 감독의 구상이 완벽하게 먹힌 대표적인 경기는 일본과의 준결승전이었다. 김동주는 4회 2사 이후에도 안타를 치고 나가 결국 선발투수 스기우치 도시야(소프트뱅크 호크스)를 마운드에서 끌어내렸다. 장거리 타자로는 드물게 선구안까지 좋은 이대호는 이 경기에서 볼넷만 세 개를 골랐다.
특히 7회 말은 이날 경기의 백미였다. 상대 투수 후지카와 큐지(한신 타이거즈)의 유인구에 말려들지 않은 이대호는 끈질긴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 나갔다. 뒤이어 나온 고영민의 좌측 안타로 후지카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대타 이진영의 동점타로 이어졌다.
상식을 벗어난 빅볼
김경문 감독이 내놓은 타선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상위 타선이 왼손타자 일색, 하위 타선은 오른손 타자 일색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현미경 야구'를 구사하는 일본은 물론 잔 작전을 잘 구사하지 않는 미국 야구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라인업이었다. 확실한 왼손 중간계투를 보유한 팀이라면 위기 때 당연히 왼손투수로 불을 끄려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상대팀은 이런 한국 타선의 특징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일본뿐 아니라 쿠바와 미국도 왼손 타순에는 왼손 투수를, 오른손 타순에는 오른손 투수를 중간계투로 내보냈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은 '왼손 타자가 왼손 투수에 약하다'는 속설을 믿지 않았다. 16일 일본과의 예선전에서는 주니치의 최고 왼손 투수 이와세 히토키 앞에 왼손 타자 김현수를 내보냈다. 23일 쿠바와의 결승전 승부의 분수령이었던 7회초 공격에서 오른손 투수 페드로 라소가 올라왔음에도 타격감이 나빴던 박진만을 왼손 대타로 교체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김현수는 결승타를 날렸고 박진만은 대회 첫 안타를 때려 두 점차로 달아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선발은 선발답게…원포인트 릴리프 배제
투수 운용에서도 김경문표 '뚝심'이 돋보였다. 그 동안 국제대회 때면 투수진 '벌떼 운용'을 통해 강팀과 승부를 대등하게 이어나가던 한국 고유의 전략이 이번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김 감독은 류현진-김광현으로 이어지는 젊은 원투펀치에 대회를 맡겼다. 류현진은 캐나다와의 피말리는 투수전과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김광현은 일본과의 두 차례 접전에서 6이닝 이상을 소화해내며 선발투수로 제 몫을 120% 소화했다.
구원투수진 운용도 볼만했다. 기아의 한기주만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을 뿐, 나머지는 위기 때마다 확실하게 불을 끄며 '투수진이 약하다'는 여론을 잠재웠다. 특히 대표팀에 마지막으로 승선한 윤석민, '버리는 카드'라는 비아냥을 듣던 송승준과 장원삼은 한국 투수진이 강팀과의 접전을 앞두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데 더없이 큰 도움을 줬다. 그것은 장기 레이스에서도 대표팀에 피로가 누적되지 않도록 하는데 일등 공신이 됐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구원투수를 투입해 불을 끄는 김 감독의 절묘한 투수교체 타이밍은 다른 팀과 한국을 차별화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반면 '스몰볼'의 전형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 일본의 호시노 감독은 교체해야 하는 순간에 투수를 교체하지 못해 실패했다. 한국과의 경기에서 이와세를 바꿀 타이밍을 놓친 것은 대표적 사례다.
미국의 데이비 존슨 감독은 단기전에 맞지 않는 미국식 빅볼을 지나치게 고집했다. 한국 전에서 선발 브랜든 나이트가 초반 대량 실점했음에도 투수교체 없이 그대로 경기를 밀고 나간 게 그 예다. 장기 레이스를 위해 웬만해서는 선발투수를 조기 강판하지 않는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케네디 스코어로 한국에 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김경문은 젊은 선수들 위주로 팀을 꾸렸지만 꼭 필요한 포지션에는 노장의 경험을 높이 샀다. 백업 내야수로 출전한 김민재, 결정적인 위기에 불을 끈 정대현, 국제무대에서 큰 힘을 발휘한 김동주, 한국 최고의 포수 진갑용은 젊은 팀에 부족한 큰 대회 경험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적용한 김경문 감독과 그 뒤를 받쳐준 조계현 투수코치, 김기태 타격코치, 그리고 감독의 기대에 120% 부응한 선수들은 사상 초유의 올림픽 금메달 달성을 합작해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올림픽 금메달 달성으로 적어도 단기 레이스에서는 한국 야구가 세계 어느 나라와 맞붙어도 절대 밀리지 않음을 증명해냈다. 사상 가장 많은 14명의 병역 면제는 메달보다 더 값진 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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