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라크루아는 1863년 사망한다. 들라크루아가 죽고 1년 뒤에 틀라크루아를 추모하는 전시회가 열린다.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가 전시회에서 개막 연설을 한다. <삼총사>와 <철가면>을 쓴 뒤마와 들라크루아는 평생 친구였다. 뒤마는 <민중을 이끄는 여신>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기를 자유의 여신 오른쪽에 나팔총을 들고 있는 자가 화가 자신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들라크루아는 무법자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투쟁에 뛰어는 것입니다. 틀라크루아가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따는 이야기도 나돕니다. 가엾은 들라크루아! 무기를 든 남자의 모습이 들라크루아라고요? 설마, 그럴 리가요!" 뒤마는 틀라크루아가 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질병, 죽음, 빈곤, 영혼의 고통은 영원하고, 모든 체제라는 것들은 인류를 괴롭히는 도다! 민주주의니 군주제니 하는 형식은 아무 소용이 없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지금은 유로화가 대신한 프랑스 프랑화의 기본 도안이었다. 200년 동안 프랑스 혁명 정신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들라크루아 자신은 혁명과 체제에 냉소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냉소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여기 저기에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근위병의 시체를 짓밟는 혁명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모두 약탈한 물건들을 지녔다는 걸 알 수 있다. 나팔을 든 사내는 근위병들이 휴대했던 무기를 들고 있고 여신 옆의 꼬마는 맹목적이며, 꼬마가 밟고 선 포석 아래의 시체는 흉물스럽다. 자유의 여신은 민중을 이끌지만, 민중은 언제까지나 자유의 여신을 따르지는 않는다. 모두가 여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탐할 뿐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엔 혁명과 반동의 진실이 담겨 있었다. 여신을 숭배한다던 자들은 여신을 두려워했던 진짜 이유였다. <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는 1864년 12월 10일 들라크루아 추모 전시회에서 뒤마가 했던 개막 연설을 정리한 책이다. 들라크루아에 대한 뒤마의 언급들은 미술사가들이 들라크루아를 논할 때마다 자주 인용되곤 했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다. 뒤마의 언급들은 평자들의 시선에 따라 뒤틀리고 뒤바꿔져서 왜곡되곤 했다. 뒤마가 1830년 혁명 당시 들라크루아가 바리케이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겁에 질려있었다고 말했다던가, 뒤마와 들라크루아가 몹시 사이가 나빴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는 뒤마의 연설 전문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는 그림책이다. 그림에 관한 책이면서 그림이 곁들여진 책이다. 저자인 카트린 뫼리스는 아르데코를 졸업한 미술학도이면서 신문과 잡지에 그림을 그리는 삽화가다. 그녀는 뒤마의 연설 사이 사이에 알렉상드르 뒤마와 외젠 들라크루아의 캐리커쳐를 곁들였다. 들라크루아의 작품들 역시 카트린 뫼리스의 삽화를 통해 재구성된다. 그림 사진이 곁들여진 그림책은 많다. 하지만 저자의 느낌대로 그림이 재현된 그림책은 따로 없다. 들라크루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는 저주 받은 걸작이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왕의 죽음을 그렸고 샤를10세 시절엔 불경이었다. 1826년 살롱전에서 평단은 들라크루아를 기꺼이 외면했다. 그런데 프랑스의 풍경화가인 조셉 베르네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살롱전에서 함께 전시되고 있던 루벤스의 그림들 한 가운데로 옮겨놓는다.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에 둘러싸인 자신의 그림을 보고 감격한다. 저자 카트린 뫼리스는 루벤스에 둘러싸인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삽화로 재현한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치의 마르세유 도착>을 뒤죽박죽 그려놓는 식이다. 가장 자리엔 삽화로 앙증맞게 그려진 들라크루아가 감격한 채 서 있다. 혁명을 빼놓고 들라크루아를 이야기하긴 어렵다. 들라크루아가 살았던 1798년부터 1863년까진 혁명의 시대였다. 혁명과 반동과 다시 혁명과 반동이 거듭됐다. 그림이 상징적인 이미지로서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던 그 시대에 들라크루아는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민중을 이끄는 여신>이 그랬다. 들라크루아는 인상주의의 문을 열었다. 들라크루아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선거에 일곱 번이나 떨어졌다. 평단은 들라크루아를 몹시 싫어했다. 뒤마는 들라크루아에게 모두 반대표를 던졌던 한 아카데미 회원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는 들라크루아에게 표를 주라고 설득하러 온 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 돼요. 안 돼. 나가시오... 좋소. 들라크루아에게 가서 내가 표를 주겠다고 말해도 좋소. 어쨌든 그는 훌륭한 화가니까." 대신 평단은 극사실주의 화풍을 추구했던 앵그르를 추앙했다. 들라크루아에 대한 혐오가 깊어질 수록 앵그르에 대한 충성은 높아졌다. 미술 평단은 앵그르를 영웅으로 내세운 자신들만의 아성을 지었던 셈이다. 혁명의 세기를 살다간 들라크루아가 혁명과 체제에 냉소적이었던 건 여신을 이용만 하는 시대에 대한 관조와 결탁과 모의를 서슴지 않는 미술계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 탓이었다. 들라크루아의 냉소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영원한 아웃사이더이고자 했다. <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는 혁명의 세기에 예술가가 지닐 수 있는 존엄한 냉소와, 시대의 풍랑에 흔들리는 예술 작품의 운명과, 예술을 깃발로 사용하려는 정치적인 의도와, 평론가와 예술가의 숙명적인 불화를 이야기한다. 19세기 초반에 있었던 일이지만 21세기 초반에도 현재성을 지닌다. 촛불시위가 잦아들고 반동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들라크루와는 예술가와 예술의 제자리가 어디여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엔 한 문필가가 지닌 다른 예술가에 대한 따뜻한 진심이 있다. 뒤마가 아니었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들라크루아의 속내가 있다. 글과 말로 남겨진 기록만이 지닐 수 있는 힘이다. 출판사 세미콜론 | 저자 카트린 뫼리스 | 옮긴이 김용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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