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대단한 민주당이다. 의석수가 한나라당의 절반도 안 되는 꼬마 정당이, 게다가 여당을 견제해야 하는 야당이 정치 교사를 자임하고 나섰다. 꼬마 야당이 공룡 여당에게 온몸으로 훈수를 두고 나선 것이다.
원혜영 원내대표가 그랬다. 청와대의 '장관 인사청문특위 비토'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해야 원구성에 응할 수 있다던 기존 입장을 뒤집고 국회의장과 한나라당 대표의 '대타 유감 표명 '을 받아들인 이유가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현실적으로 대통령 사과의 재발방지를 받아내는 건 포기했다"고 했다. "우리는 대통령의 사과 뒤에 원구성을 해야 한다는 단계론이었으나,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일괄로 하지 않으면 협의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고 했다.
원혜영 원내대표의 말은 장황했으나 설명 요지는 아주 간명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원혜영 원내대표의 이런 판단을 놓칠 리 없는 한나라당이다. 순간적으로 알아챘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무조건 밀어붙이면 이긴다'는 경험칙을 뇌리에 새겼을 것이다.
2.
참 통 큰 민주당이다. 한나라당에 귀중한 가르침을 줬는데도 수업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선물까지 선사했다.
원구성에 전격 합의하기 하루 전에 민주당이 밝혔다. 민노당·창조한국당과 함께 정연주 KBS 사장 해임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고, 이 방안을 원구성과 연계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거둬들였다. 이 연계전략을 전격적으로 거둬들이고 한나라당에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당초 합의했던 '상임위원장 6자리'만 재확인한 뒤에 조건없이 원구성에 응하기로 했다.
3.
참 기발한 민주당이다. 기존의 정치학 원론을 뒤집고 새 학설을 제기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연주 KBS 사장 해임 서류에 사인을 하자 언론장악저지대책위가 성명을 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언론자유는 오늘 죽었다"고 했다.
이 성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원혜영 원내대표는 원구성에 전격 합의를 해줬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전면적인 국정의 난맥상을 대처하는 데 있어 국회라는 공론의 장을 확보하고 이를 중심으로 대응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매우 새롭다. 언론이 자유로워야 여론의 공개시장이 살고, 여론의 공개시장이 살아야 대의제가 구현될 수 있다는 정치학의 ABC와는 사뭇 다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언론자유"가 죽었는데도 "공론의 장"을 살릴 수 있다고 하니 이 어찌 새로운 주장이 아니겠는가.
부활의식은 고사하고 위령제도 치르기 전에, 봉분에 풀이 돋아나기도 전에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하니 이 어찌 기발하지 않겠는가.
4.
어디 이뿐인가? 참 신묘한 재주도 지녔다. 하나의 논리를 갖고 만사에 갖다붙이는 고탄력 고무줄급 재주까지 선보였다.
대통령의 사과는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청와대가 '장관 인사청문특위'에 비토를 놓으면서 내건 명분이 '법과 원칙'이었다. 인사청문회법에는 국회의 임명동의를 받아야 하는 공직자 후보에 한해 인사청문특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며 "법을 어기라는 말이냐"고 반문했었다.
청와대의 이 주장에 따르면 민주당의 사과 요구는 씨알이 먹힐 수 없는 것이었다. 청와대 보고 "법과 원칙을 어겨 죄송합니다"라고 고개 숙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요구했다. "전면적인 국정의 난맥상"을 걱정했으면 대통령 사과와 같은, 가능하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은 요구에 매달릴 게 아니었는데도 요구했다. 그리고 또 다시 "전면적인 국정의 난맥상"을 이유로 이 요구를 거둬들였다.
그나마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던 '정연주 해임 국정조사' 방안까지 거둬들였다. 똑같이 "전면적인 국정의 난맥상"에 시급히 대처해야 한다는 이유로 '없던 일'로 만들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언론자유"의 죽음을 선포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급하고 중한 상위의 '국정'을 설정하며 뒤로 물러났다. "전면적인 국정의 난맥상"에 "국회라는 공론의 장"이 채택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대처방법을 스스로 포기했다.
5.
그래서 그렇다. 민주당이 참으로 대단하고, 통 크고, 기발하고, 신묘한지는 몰라도 지켜보는 느낌은 참으로 칙칙하다.
그럴 바에는 뭣하러 뛰쳐나왔느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신네들의 오락가락 행보가 오히려 "국정의 난맥상"에 진지하게 대처하려는 '거리의 국민들'을 지치게 만들고, 황당하게 만들고, 진을 빼게 만든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묻는 것만으로 부족하니까 이 말을 덧붙이자.
정당이 자리할 곳이 국회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니까 인정할 수 있다. 이것저것 다 제쳐놓고 국회로 돌아가는 걸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일 수 있다.
대신 내놓기 바란다. 국회에서 어떻게 "전면적인 국정의 난맥상"에 대처할 것인지, 그 전략을 내놓기 바란다. 이번과 같이 지리멸렬하게 대응하다가 "어쩔 수 없었다"고 푸념하면서 무기력하게 끌려가지 않을 방책이 뭔지를 제시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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