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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멋대로 만든다

[신기주의 이야기 속으로] 영화 <다찌마와 리> 리뷰

류승완 감독의 몸은 여전히 가볍다. 다리가 쭉쭉 올라간다. 카메라 주위를 사뿐사뿐 맴돈다. 하지만 몸이 꼭 여전한 건 아니다. <짝패>를 찍으면서 무릎 십자 인대가 끊어졌다. 무리한 액션 연기는 정말 무리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찍던 시절처럼 몸을 초개처럼 내던질 순 없단 얘기다. 요즘은 대련 대신 수영을 한다. "수영이 아무래도 몸에 무리가 덜 가더라." 거세게 운동하던 사람은 나이가 먹으면 골병이 든다. 그럴 나이다. "요즘 갑자기 얼굴에 주름이 늘었다." 눈가 주름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카메라 앞에 선다. 갑자기, 번개 같이 주먹을 날린다. 어디 한 번 해볼까. 다리를 뻗는다. 훅훅. 다시 몸을 던질 기세다. 나 아직 안 죽었다고. 마음만 먹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그의 주먹은 그가 내뱉는 진심이다.
다찌마와 리
<다찌마와리>는 류승완 감독과 꼭 닮았다. 류승완은 영화 감독으로서도 골병이 들었다. 몸을 겁 없이 굴렸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정권을 맞았고 <아라한>에서 겨우 급소를 피했다. <주먹이 운다>에서 필살기를 날렸고 <짝패>에서 남은 힘을 다 썼다.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이젠 몸이 무거워질 때도 됐다. 액션 대신 수영을 선택할 시기다. 거세게 영화 찍던 사람은 나이가 먹으면 골병이 든다.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 그도 이제 조심해야 할 나이다. 그도 말한다. "요즘은 한 번 중심에서 밀려나면 다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니까." 그러다가, 번개 같이 영화를 찍었다. 어디 한 번 해볼까. <다찌마와리>는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멋대로다. 8년 전 인터넷 버전 <다찌마와리>보다도 더 나갔다. 성수대교를 임진강이라고 우기고 강원도 스키장을 스위스라고 우긴다. 훅훅. 다시 몸을 던진다. "사실 나도 오락 가락 했다. 이렇게 저렇게 물어도 봤고 투자사의 압력에 미친 듯이 굴복도 했다. 그런데 말이다. 대중영화를 만들다 보면 과연 대중의 실체가 뭐냐. 이거에 심각한 회의가 들 떄가 있다. 항상 우리가 기억하는 좋은 영화나 재밌는 영화는 결국 취향의 흔적이 남아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 게 기억되는 게 아닐까." 10년 전 그의 영화가 그랬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상업 영화권에서 파동을 만든 건 겁없는 취향의 영화여서였다. 꼴리는 데로 만들어서였다. 나 아직 안 죽었다고. 보편이 아니라 개성을 좇는다. 마음 먹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다찌마와리>는 그가 내뱉는 진심이다. <다찌마와리>는 희대의 걸작 따윈 아니다. 어떤 부분에선 웃기지만 어떤 부분에선 웃기지도 않는다. 감독 개인의 호불호가 강인한 탓에 영화를 보는 관객의 호불호도 또렷하다. 투자사의 압력에 미친 듯이 굴복하다가 또 미친 척 고집을 세웠다. 지난 10년 동안 류승완 감독은 액션과 장르를 탐험하는 취향의 내공을 상업 영화권에 접목시키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의 재능이 돈이 될 것이냐의 실험대 위에 늘 드러누워있었다. <다찌마와리>에서 류승완 감독은 다시 한 번 해 본다. 여러 길을 돌아서 결국 자기 색깔과 자기 취향에 집중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시절의 결기다. 그 때만큼 몸이 가볍지도 않고 십자 인대도 끊어졌고 눈가엔 주름이 늘었지만 그는 류승완이기로 결심했다. <다찌마와리>에선 그런 속내가 언뜻 발견된다. 007 제임스 본드처럼 굴던 다찌마와리는 갑자기 외팔이 검객이 된다. 악당의 바지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라는 수모를 당하더니 돌아온 외팔이 검객이 돼서 순식간에 적을 물리친다. 홍두깨 같은 장면이다. 이 장면의 장르적 쾌락은 대단하다. 그 시절 한국영화와 홍콩영화를 섭렵했던 영화광들이라면 무릎을 치게 된다.
다찌마와 리
그러나 류승완 감독조차 알고 있다. 그는 이미 경험했다. <짝패> 때였다. "모두가 <짝패>에서 <킬빌> 얘기를 하는 거야. 내 영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내 영화에서 내가 낸 퍼즐을 맞추면 맞춰준 사람이 고맙고 기분이 좋다. 가끔 심각하게 오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해 주고 싶은 말이 생긴다. 그런데 <짝패>에서 엉뚱하게 자꾸 <킬빌>을 읽어내니까 미치겠는거지." 영화광의 영화는 오독되는 걸 피할 수 없다. <킬빌>로라도 읽히면 다행이다. 장르의 규칙을 몰라도 쾌락을 누려준다면야 고맙다. 그러나 관객은 늘 충분히 준비가 안 됐고 이젠 준비가 될 거란 기대조차 어렵다. 영화에서 만든 이와 보는 이가 취향을 나눈다는 건 이제 꿈이다. 관객은 보편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고 산업도 보편성을 안전제일 수칙으로 삼는다. 류승완 감독 같은 영화광 세대가 취향으로 대중을 설득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다찌마와리>는 한국영화가 갈수록 잊어가고 있는 재능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영화의 평단과 관객과 제작자들은 모두 완성체 영화를 꿈꾸게 됐다. 개성이 있지만 보편적이고 볼 거리고 있지만 이야기도 있고 장르적이지만 대중적인 영화에 마케팅적으로도 거리가 많으면서 흥행도 보장되는, 그런 영화 말이다. <다찌마와리>는 그런 완성체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불량식품에 가깝고 먹고 나도 기분만 나쁠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한국영화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했다. 저열한 수준인 주제에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만들고 싶다는 분기탱천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평단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열광했고 산업이 그에게 한 방 먹었던 건 한국영화의 그런 본질을 함축해서였다. 다시 <다찌마와리>로 한 방이다. 상업 영화 연출자로서 류승완 감독의 운명은 관객의 취향에 따라 웃기거나 혹은 화내거나가 되겠지만 그의 진심만큼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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