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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의학에 반기를 들다"

[인터뷰] <인문의학> 펴낸 강신익 교수

"세상에서는 의학이 차가운 이성에 취해 따뜻한 인간미를 잃어버렸다고 하고, 인문학이 인간의 삶을 해명하지 못한 채 위기에 처했다고도 한다. (…) 의학은 인문학에서 삶의 의미를 읽고, 인문학은 의학에서 새로운 사유의 소재를 얻는다면 그 둘의 상승 작용을 통해 인간과 건강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인문의학>(휴머니스트 펴냄)이라는 생경한 제목의 책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인문의 창으로 본 건강'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가 연구 성과를 대중과 공유하고자 내놓은 첫 번째 성과이다. 이 연구소는 앞으로도 <인문의학>이라는 제목은 그대로 유지한 채 '고통', '윤리', '불평등'과 같은 주제를 내세운 책을 계속 낼 예정이다.

이 연구소는 지금까지 과학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건강, 질병, 고통, 생명의 문제를 인문학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성에 공감한 의학자, 인문학자들이 뜻을 모으고, 인제대학교가 후원해 지난 2007년 8월 설립된 연구 기관이다. '건강'을 화두로 의사, 한의사, 사학자, 철학자 등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한 결과를 묶은 <인문의학>은 이 연구소의 연구 방향을 잘 보여준다.

전직 치과의사이며, 의철학자로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강신익 인제대 의대교수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100년간 의학은 인간의 구체적 삶이 누락된 영혼 없는 상태였다"며 "'인문의학'은 이런 의학에 다시 영혼을 불어넣고자 한다"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밝혔다.

강신익 교수는 "그 '무엇'으로서의 건강에 딴죽을 걸면서 건강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것을 권하는 이번 <인문의학>에 실린 글에서도 이런 연구소의 지향이 잘 나타나 있다"며 "비록 명확한 대안은 없지만, 우리가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의 다양한 역사적·문화적 스펙트럼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을 위해서 어떤 가치와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성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지난 1일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있었던 강신익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
▲ 강식인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장(인제대 교수)·<인문의학> 편집주간. ⓒ프레시안

"인간 없는 의학에 반기를 들다"

- 최근 <인문의학>의 첫 권을 펴냈다. 제목부터 생소한 독자가 많을 것 같다. '의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뜻하는 것 같은데….

"지금은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학이 과학이다', 이런 인식이 널리 확산된 것은 사실 100년 정도밖에 안 된다. 아주 오랫동안 의학은 '과학'이 아닌 '인간'에 초점을 맞춰왔다. 의학이 기본적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학문이니까, 그 중심에 '인간'이 있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 100년간 '인간'이 사라지고 '과학'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 의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얘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 즉, 의학에서 '인간'이 사라진 상황을 반성하는 의미가 있다. 미국, 유럽에서는 이미 1960~70년대 의료 윤리 운동이 시작되면서 의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강조하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이런 인식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 한국에서 이런 인식이 확대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한 세 가지 계기가 있었다. 우선 1997년 보라매병원에서 보호자의 요구로 중환자를 퇴원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의사가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이 있었다. 2000년에는 의약 분업을 둘러싸고 의사와 약사가 대립해 전국의 병·의원이 문을 닫는 사태가 있었다. 2005년에는 잘 알다시피 황우석 사태가 있었다.

이 세 가지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이제 의사들이 사회와 사람을 몰라서는 안 되겠다, 이런 인식이 점차 확대하고 있다. 외국에 비하면 비록 2~30년 정도 뒤쳐지기는 했지만, 비로소 우리도 제대로 된 의학을 위해서는 '인간'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 이런 생각을 시작한 것이다. <인문의학>의 창간은 바로 이런 흐름 위에 놓여 있다."

"건강은 없다…'건강 중독 사회'에 대한 인문학적 처방"
▲ 강신익 교수는 "건강 불평등을 비롯한 의학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는 데 인문학적 사유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레시안

- <인문의학>의 첫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건강'이다. 첫 번째 주제로 건강에 주목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건강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정작 건강을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해본적은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이라는 개념은 채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역사를 가진 근대의 산물일 뿐이다. 근대 이전 대다수 사람에게 건강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당장 생존조차 버거운 현실에서 건강을 걱정하는 것은 소수의 특권이었다.

건강이 이렇게 전 국민의 화두가 된 것 자체가 굉장한 토론거리인데, 여태까지 진지한 성찰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간 건강과 관련된 발언은 의사, (제약·병원) 자본 등이 독점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을 화두로 동서고금의 논의를 정리하고, 환자를 비롯한 소외된 목소리를 부각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 이번 <인문의학>에 실린 첫 글에서 '건강은 없다', 이런 주장을 했다. 이 역시 건강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려는 시도였던 것 같은데….

"그렇다. 사실 우리가 얘기하는 건강은 어떤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질병을 없애는 것이 그런 과정이었다면, 최근에는 배우 김태희 씨와 같은 외모를 만들고자 성형을 하는 것이 새롭게 그런 과정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어떤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을 건강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은 어떤가? <인문의학>에 실린 대담에서 황상익 교수가 잘 지적했듯이 '건강할수록 더 건강에 관심을 쏟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전 어느 세대보다 건강하면서도 늘 건강에 대한 결핍을 느끼는 역설적인 상황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없다.

'건강은 없다', 이런 주장은 바로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는 일종의 인문학적인 처방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좇을 게 아니라,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것. 이렇게 건강에 대한 생각을 바꿈으로써 우리는 환상을 좇으면서 끊임없이 자본이 요구하는 의료 상품을 소비하는 대신,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건강 불평등, 인문적인 사유가 정확한 진단 돕는다"

- 그런 처방이 과연 현실에서 효과가 있을까? 현대 사회는 그런 주관적인 처방을 용납하지 않는다. 젊은 여성이 굳이 김태희 씨를 닮고자 성형 수술을 하는 것은 외모가 곧 권력인 한국 사회의 맥락 때문이다. 지난 총선 때, 홍정욱 씨가 노회찬 씨를 누르고 당선될 수 있었던 데는 외모가 한몫했을 거라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왠지 <인문의학>에서 얘기하는 그런 처방이 한가롭고, 현실과 유리돼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 우려는 타당하다. 내 경험을 얘기하는 게 게 도움이 될 듯하다. 의학은 크게 자연의학, 사회의학, 인문의학, 이렇게 나뉜다. 내가 그간 공부해온 순서가 자연의학, 사회의학, 인문의학 순이었다. 처음에는 의학의 온갖 문제를 과학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가, 그 한계를 알면서 다시 사회의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지금은 인문의학을 강조한다.

지적한 대로 사람들이 성형 수술을 하는 데는 분명히 외모가 곧 권력이 된 사회 요인이 존재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김태희 씨, 홍정욱 씨의 외모를 닮고자 하는가? 바로 여기에는 사회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인문적 요인이 있다. 바로 이 인문적 요인에 관심을 두지 않고는 결코 외모가 곧 권력이 되는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인문의학의 중요성이 나온다. 앞으로 <인문의학>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룰 텐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건강 불평등'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은 이 '건강 불평등' 문제를 주로 사회적 요인에만 초점을 맞춰서 다뤘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적 요인뿐만 아니라 인문적 요인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일단 평균 수명을 건강의 지표로 놓고 보자. 세계적으로 봤을 때, 평균 수명은 평균 소득에 비례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즉 국민 소득 5000달러 이상이 되면 평균 수명이 꼭 평균 소득에 비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국민 소득이 3만 달러 정도 되는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평균 수명이 가장 낮다.

국민 소득이 높은데도 평균 수명이 낮은 이유를 많은 사회의학자는 소득 격차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소득 격차에 따른 건강 불평등은 바로 인문적 요인을 염두에 두고 설명하면 훨씬 더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왜 사회 격차가 나를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가? 왜 사회 격차가 낮으면 나는 불행한가? 이런 질문은 지극히 인문적인 질문이다.

- 리처드 윌킨슨 박사 같은 학자는 <평등해야 건강하다>(김홍수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와 같은 책에서 소득 격차가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강조한다.

"그런 접근은 일종의 소득 격차와 건강 불평등의 관계를 자연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방식이다. 그런데 스트레스 자체가 단순히 호르몬 분비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복합적인 것 아닌가? 자연적, 사회적, 인문적 요소가 엮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은 인문적 요소의 중요성이 도외시돼 왔다. 우리가 인문의학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이다."

"자본의 문제, 침묵할 수 없는 상황이 왔다"
▲ 강신익 교수는 "결국 <인문의학>이 자본의 문제점을 짚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레시안

- 최근에는 건강보다 '웰빙'이라는 말이 더 선호되고 있다.


"맞다. 왜 건강이 아닌 웰빙일까? 바로 여기서도 건강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인 수준에서 넓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건강을 생물학적 개념으로만 여기다 보니, 여기에 사회적, 인문적 개념을 덧붙인 웰빙이라는 개념이 선호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쓰는 건강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미 과학적, 사회적, 인문적 개념이 다 들어있는데…. 다만 웰빙이라는 말 속에도 여전히 어떤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것에 도달하려는 강박증이 보이는 것은 똑같다.

- 최근에는 건강이든 웰빙이든, 일종의 도달해야할 목표로서의 이념형을 제시하는 게 매스미디어와 그 이면에 있는 자본인 것 같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인문의학의 관심과 실천도 결국 그런 (언론·병원·제약) 자본의 문제점을 짚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구조적으로 보면 분명히 그렇다. 오늘날 의학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의 근원에 그런 자본의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의사들이 그런 구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얽매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심각한 문제이고, 앞으로 차근차근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게 있다. 최근에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고, 그 상당수가 의사의 번역이다. 그런 의료 산업의 맨 앞에 있었던 한 의사가 의료 산업의 마케팅을 비판한 책을 번역한 것을 놓고 흥미롭게 보기도 했는데…. 이런 현상은 이제 이런 문제가 당사자조차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최근 시민·사회단체의 <식코> 보기 운동과 그에 대한 대중의 호응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문제가 부각될수록 정책을 둘러싼 논쟁뿐만 아니라 인문학적인 접근의 필요성이 커질 것이다. <인문의학>이 그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 구체적인 실천으로 염두에 둔 게 있는가?

"아직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라서 구체적인 상은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의료생활협동조합 운동, 이런 게 아주 중요한 실천의 고리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관여하고 있지도 않고, 실제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많겠지만…. 이런 의료생활협동조합 운동이 성공하는 데 인문학적 사유가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의학이 몸이라면 인문학은 영혼"

- <인문의학>을 보면, 의학과 관련해 기존에 발언을 독점해오던 이들에게 불편한 내용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의 1차적인 독자는 아무래도 일반인보다 의사일 가능성이 크다. 의사들의 반응이 있는가?

"아직은 반응이 없다. 솔직히 얘기하면 의사들은 이런 내용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다. 몇몇 인문·사회의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나 관심을 가질까?

사실 기존 의사한테 큰 기대를 갖지 않는다. 지금 40대 이상의 의사들이 살아왔던 역사를 염두에 두면 그들이 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이 지금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조건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다.

학생들이 좀 관심을 갖는 것 같아서 고무적이다. 젊은 의사, 학생 이런 쪽으로 독자가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긍정적인 현상이다. 실제로 학생들은 3~40대 이상의 의사와 확실히 다르다. 적어도 <인문의학>에서 논의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윗세대가 인문학, 한의학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적대시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 강신익 교수는 "의학이 몸이라면 바로 인문학은 영혼"이라며 "<인문의학>은 바로 영혼 없는 의혹에 영혼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레시안

- 다음 책을 꿰뚫는 키워드는 '고통'이다.

"1권보다 훨씬 더 알찬 얘기를 많이 담을 것이다. 고통을 둘러싼 풍성한 담론이 담길 예정이다.

물론 핵심 메시지는 1권과 똑같다. 지난 100년간 의학에는 인간이 없었다. 당연히 영혼도 없었다. 이렇게 인간의 구체적 삶과 영혼이 빠진 자리를 돈이 채웠다. 바로 이런 의학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 그게 바로 <인문의학>의 역할이다. 의학이 몸이라면 바로 인문학은 영혼이다. 다음 책에서도 이런 노력은 계속된다."
옛날 사람도 건강을 기원했을까?
▲<인문의학>(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엮음, 휴머니스트 펴냄). ⓒ프레시안

강신익 교수가 <인문의학>에 기고한 '건강은 없다 : 복잡성의 진화와 의학'을 살펴보면 우리가 쓰는 건강이 어원을 따져보면 얼마나 폭넓은 개념인지 잘 알 수 있다. '건강(健康)'은 튼튼함(建)과 편안함(康)을 뜻하는 두 글자의 합성어이다. 강 교수는 "건(建)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강건한 체질, 강(康)은 그런 몸을 부양할 물질적 조건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건강'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근대 이후이다. 강 교수는 "전통 시대의 의서에는 건강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며 "전통 시대에 '양생(養生)', '섭생(攝生)', '장생(長生)'과 같은 말이 바로 건강과 유사한 개념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전통 시대에는 '강하고 편한 정해진 상태(건강)'를 추구하기보다는 삶을 북돋우고 길러(양생과 섭생) 자손을 낳고 편안하게 오래 사는 것(장생)을 중시했다"고 지적했다.

서양으로 눈을 돌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건강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헬스(health)'의 어원은 신성함(holy), 전체성(whole), 치유(heal)의 뜻으로 종교적 뉘앙스가 강했다. 강 교수는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세속적이고 분별적이며 기계적인 건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의미가 넓다"며 "어떤 면에서는 전혀 반대의 뜻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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