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이번 회부터 한국의 상황에 주목한다. 장대익, 김윤성 교수에 이어 신재식 교수가 답한다. 신재식 교수는 "한국 교회 안에서 창조 과학이 환영을 받는 근본 이유는 그 주장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 부족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과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피해 의식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창조 과학을 옹호하는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종교는 열등한 것"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 신재식 교수는 "신앙의 기초로 과학, 그것도 '사이비' 과학을 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라며 "창조 과학에 근거한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창조 과학에 호의적인 한국 교회의 특징은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에 맞닿아 있는 한국 교회의 보수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한국 교회가 이런 '보수주의'의 온실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결코 건강한 교회와 신학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신재식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 드루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존 템플턴 재단 '과학과 종교 교육 프로그램' 연구자, 풀브라이트 초빙 교수를 지냈다. <생태학과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쓰고, <근대 신학의 이해>,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을 옮겼다.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오래 전부터 깊은 고민을 해온 목사이다. 이 글의 초고는 2007년 6월 작성되었다. <편집자> |
저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창조론자입니다
김윤성 선생님과 장대익 선생님께
이번 봄 학기도 거의 다 지나가는군요. 장 선생님은 귀국을 앞두고 있으니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낄 겁니다. 두 분 선생님의 경험이 담긴 '탈출기'와 '논쟁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김 선생님이 창조 vs 진화 논쟁의 배경을, 장 선생님이 과학적 측면을 이미 언급하셨기 때문에, 저는 신학자로서 이 논쟁의 신앙적 또는 신학적 측면을 주로 말씀드리지요. 두 분 선생님의 제목에 운율을 맞춘다면, 이 편지는 '나의 창조 vs 진화 논쟁 관전평'에 해당하겠네요. 한국 교회에서 흥행에 성공한 창조 과학에 대한 평가가 될 듯합니다.
먼저, 창조 vs 진화 논쟁에 대한 제 입장을 밝히고 시작하지요. 저는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신학 작업을 하는 유신론자입니다. 목사로서 저는 진화가 그리스도교에 도전이지만 동시에 제 신앙과 신학을 다시 성찰하게 해 주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로서 저는 '진화'가 신과 세계, 생명을 해명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아주 유용한 개념이라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진화라는 사유의 틀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과학 이론으로서 진화론은 '여전히' 생명 세계를 아주 잘 설명하는 강력한 이론이라고 판단합니다. '여전히'라 함은 과학적 측면에서 진화론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이에 대해 제가 계속해서 비판적으로 주시할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러나 진화론을 형이상학 자연주의나 유물론적 무신론을 이념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입장이나, 진화론이 생명에 대한 '유일한' '충분한' 설명이라는 과학적 환원주의에는 아주 비판적이고요.
이런 저를 창조 vs 진화 논쟁에 자리 매김한다면 '진화론적 유신론자'나 '진화론적 창조론자'(창조론 명칭의 통일성을 고려할 때, 이 용어가 진화론적 유신론보다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신학적 입장을 좀 더 포괄적으로 함축하는 '진화론적 유신론'을 선호합니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진화론을 수용한 입장을 '유신론적 진화론(유신 진화론)'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 적절치 못한 용어입니다. 이 명칭을 고집하는 데는 특정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유신론이 수식어 역할을 하면서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측면을 은연중 강조하고 입습니다. 실제로 늘 '과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옹호자들이 이 명칭을 선호하죠. 창조 vs 진화 논쟁이 '과학'이라는 링에서 승부를 벌이는 것처럼 보이길 원하는 이들은, 진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입장을 전부 다 '과학'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말하는 '진화론적 유신론'은 진화를 수용하고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신학적' 입장, 즉 '종교적' 입장이지 '과학적' 입장이 아닙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그럼 제가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둘러싼 창조 vs 진화 논쟁을 어떻게 보는지 먼저 밝히지요.
우선 저는 그리스도교에는 진화론에 대한 입장이 거부에서 수용까지 '다양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창조 vs 진화 논쟁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지요.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운동이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지요. 이들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운동이 아닙니다. 과학계 밖, 종교계 안에 있는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운동은 뿌리도 동인도 그리스도교 신앙에 둔 종교 운동일 뿐입니다. 게다가 과학과 종교를 동시에 왜곡하는 문제 많은 운동입니다. 잘못된 신앙 행태를 조장하고,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한국의 교계가 이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이 주는 미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 과학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먼저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에 대한 제가 보는 관점을 말씀드리죠. 장 선생님께서 지적 설계론의 과학적 측면을 지적하면서, 이들의 신학적 논점을 질문했기에 저는 신학적 측면에서 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여기에는 진화론을 수용하는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제 입장이 당연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진화에 대한 다른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창조 과학의 '과학적'(?) 주장은 크게 두 측면으로 나눌 수 있지요. 진화론을 비판하는 측면과,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측면이 그것이지요. 저는 이 둘 모두 과학이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자신들이 말하는 '경험적' 모델의 과학이 '참(true)' 과학적일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진화론에 대한 비판이나, 창조 이야기에 대한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에 따른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자료 가운데 의도적으로 일부만을 취사선택하고 정교하게 가공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진화론자들이 진화를 주장하면서 언급한 자료마저 창조 과학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둔갑하지요. 이들이 제시하는 '과학적 증거'라는 것은 자신의 신학적 전제이자 결론을 합리화시키는 것을 취사선택한 것입니다. 즉 그들이 믿는 신학적 입장이 자료를 선택하고 가공하는 기준이지요. 창조 이야기의 문자적 해석이나 교조적인 신학적 신념을 빼면, 창조 과학의 논의에서 뭐가 남을까요?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특정 신념을 빼면 창조 과학은 존립 근거가 없지요.
둘째, 지적 설계론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장 선생님 지적처럼, 지적 설계론은 기본적으로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한다고 '믿는' 사례를 제시하면서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을 취하고 있지요. 지적 설계론이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한 신학자가 그 정당성이나 오류 판정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건 과학자의 몫이고요.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적 설계론이 하나의 연구 프로그램으로서 진화론과 경쟁하는 과학 이론이라면 이 둘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자는 겁니다. 순수 과학 이론으로서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력, 일관성, 예측 가능성 등등의 조건을 걸어놓고 지적 설계론과 진화론을 비교해 보자는 것이지요. 물론 장 선생님 말씀처럼 자연 과학자들은 이런 시도 자체를 연금술과 화학을 똑같이 과학으로 대우하는 것처럼 느껴 무지 싫어하겠지만. '맞장'을 뜨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설계자의 정체까지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명시적으로 신에 대해서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학이 될 수는 없지요. 내부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변증을 위해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고 있는 분명한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이 빠진 지적 설계론 운동 상상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그리스도교 신앙 변증이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정당한 태도로 보입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 참 문제가 많은 신앙 운동입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신학적 관점에서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으로 말씀드리죠. 신학자인 제 눈에 이 둘 모두 신앙 운동이지요. 두 운동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제거한다면, 사실상 존립 근거를 잃게 되기 때문이죠.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말씀드리지요.
첫째, 종교와 과학의 관련성 문제입니다. 진화론이 오류이면 창조론은 저절로 정당성이 증명된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모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상당히 편향적인 흑백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갑'이라는 이론이 특정한 사례를 해명하지 못한다면, '을'이라는 이론이 옳은 것이 분명하다는 논리이죠.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니까 창조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들에게 종교와 과학은 완전히 경쟁하는 동일한 영역에 있는 겁니다. 이들은 과학에서 오류가 발견되면, 그 오류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증거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모두 스스로의 설명력을 지니고 자체의 증거를 지닌 과학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의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겁니다.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예외 사례 찾기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설사 진화론이 정말 과학적으로 오류라고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저절로 맞는 과학 이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론의 오류 여부를 떠나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진짜 과학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요. 창조론이 저절로 사실로 증명되는 것도 더더욱 아니고요.
종교와 과학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화론을 선택하는 순간 신앙이 배제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과학 이론으로서 진화론을 동일한 영역이나 동일한 수준의 논의라는 오류에 빠지는 겁니다. 명시적으로 성서를 인용하는 창조 과학은 종교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를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고 평가하는 겁니다. '내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라고 말하는 '고백'과, '키, 체중, 외모 등 아내의 실제 모습을 재고' '기술'하는 것과의 차이마저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죠. 아니 어쩌면 이들은 아내의 키와 체중과 외형 모습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기준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둘째, 목회적인 차원에서 문제입니다. 교회 현장에서 보면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에 대해 대부분 교인들은 환영하고 안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국 교회 안에서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주장을 제대로 평가를 할 능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지만, 더 근원적인 원인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피해 의식과 두려움입니다. 과학이 이 시대의 사제가 된 이래, 종교는 열등한 것이고 신앙 지식은 유사 지식이라는 의식이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듣고 싶은 소리가 들립니다. "자, 여러분! 과학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진짜라는,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신앙의 적인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오류라고 증명되었습니다. 성서는 과학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동안 신앙을 왜소하게 만들었던 과학, 그것을 과학자(?)가 와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니 얼마나 신이 납니까? 우리의 신앙이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기뻐합니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제는 이런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표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니, 우리 신앙은 이제 확실한 토대를 갖추었다고요? 이런 신앙 태도가 교회를 지배한다면 그 결과는 아주 심각합니다. 이건 과학을 신앙의 토대를 삼는 겁니다. 신앙이 과학을 기반으로 성립한다고 했을 때, 그 기반인 과학이 무너지면 신앙은 당연히 함께 무너집니다. 제가 아는 한 과학은 항상 잠정적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도킨스 같은 강성 진화론자도, 만약 진화론에 반하는 증거가 나타난다면 자신은 얼마든지 진화론을 포기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지경입니다(아직까지 그런 증거는 없다고 덧붙이지만 말입니다). 과학자 사회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날 때 과학 이론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런 과학에 근거해서 존립 근거를 확보한다면 정말 문제지요. 게다가 그들이 환호했던 '과학'이 사실은 제대로 된 과학이 아니라 '사이비' 과학이라면, 더 문제입니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좀 더 개방되고 교회 안에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될 때, 기존의 과학적 토대가 부실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것에 의존한 신앙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목회자로서 우려한 것이 이런 것이지요. 창조 과학에 근거한 신앙 '모래 위에 세운 집'입니다. 비가 오고 태풍이 불면 어떻게 되는지요?
다시 강조하지만, 그 어떤 종교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함해서, 그 존립 근거를 과학적 증거에 둘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성서의 내용이 증명되어 내 신앙이 확실해진 것이라면, 그 근거가 되는 과학이 어떤 과학인지, 거기에 근거한 신앙이 어떤 신앙인지 진지하게 다시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문자적 성서 읽기, 성서를 왜곡합니다
신학적 측면에서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짚어 보겠습니다. 제가 이 둘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들이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성서 해석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명시적으로 성서를 인용하는 창조 과학이 더 문제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들은 성서의 글자 자체에 절대성을 부여하면서 창조 이야기를 비롯해 성서의 글자 한자 한자가 오류가 없다는 주장합니다. 극단적으로 과격한 성서 해석 방법인 '성서 문자주의' 이게 문제지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서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해되어 왔습니다. 성서 자체가 여러 문헌이 모인 것으로, 다양한 양식으로 씌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교부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을 비롯해 대부분의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기만을 고집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문자적, 역사적, 교훈적, 은유적 방법 등 다양한 관점에서 성서 읽기를 시도하면서 최선의 성서 이해를 추구했습니다. 이게 성서에 대한 전통적이며 정통적인 접근입니다. 창조 과학이 맹신하는 문자적 성서 읽기는 당시 세계상이 반영된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성서의 메시지를 상당 부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은 성서 해석뿐만 아니라 신학 작업에서도 문제입니다. 제가 창조 vs 진화 논쟁이 그리스도교 신학 전반에 걸친 문제도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이와 직접 관련된 신학 주제는 창조론과 신론 정도가 될 겁니다. 그런데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가 이런 주제를 다룰 때, 신학 작업 적절한 절차마저 무시하고 있지요. 과학적 절차를 무시하듯이, 신학적 절차도 무시하지요. 아니 기본적으로 신학에 무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성서, 전통, 경험, 이성 등을 그 자원으로 삼고 있지요. 물론 그 중에서도 성서가 가장 중요한 전거 역할을 했지요. 그런데 이들의 논의를 따르면,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선 성서적 근거부터 왜곡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창조론은 창조에 관한 그리스도교 담론을 전부 다루지요. 물론 그 전거는 성서와 전통 등이며, 가장 중요한 자료는 성서이지요.
그런데 창조 과학은 성서의 극히 일부, 특정 구절만을, 그것도 특정 신학적 입장에서 이루어진 성서 해석을 가지고 창조론 전체를 재단하는 겁니다. 창조론은 적절하게 다루려면, 성서 전체에서 창조에 대한 논의를 전부 고려하는 것이 기본이지요. 창세기뿐만 아니라 욥기와 시편의 여러 곳, 요한복음에도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부 다 검토와 고려의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가 주장하는 창조는 철저하게 창세기 일부 구절에 한정됩니다. 신학자 입장에서 이들은 신학적 주장을 적절한 방식으로 다룰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의도적인 왜곡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창조 과학의 뿌리와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이 진영에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드물고, 물려받는 신학적 경향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이렇게 대담할 수 있는 일차적인 원인으로 보입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 사이비 종교 운동이 그리스도교를 잡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적절치 못한 신학화는 교리적인 문제를 초래합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창조론과 신론은 정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논점은 신이 태초에 현재의 모습으로 설계에 따라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창조론은 모든 사물이 태초에 완성된 상태로 있었으며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세계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이해와 아주 동떨어져 있지요. 창조 이후 더 이상 세계 속에서 개입하지 않는 신, 활동하지 않는 신은 자연 신학이나 이신론(理神論)의 신에 더 가깝습니다. 또한 완성된 세계라는 이들의 전제는 완벽하지 않는 설계의 모습을 보이는 생명계의 현실과 이들이 주장한 전능한 신과 당연히 모순을 이루고 있지요. 그리스도교의 신은 시간 속에서 세계와 관계를 가지는 역동적인 신입니다.
또한 창조에 대해 기존의 논의와 큰 차이를 보이지요. 정통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에서는 창조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태초의 창조(original creation), 계속 창조(continuing creation), 궁극적 창조(final creation) 이렇게요. '태초의 창조'는 우주가 처음 만들어진 것을 말하며, '계속 창조'는 신이 우주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개입하면서 사물을 늘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궁극적 창조'는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종말에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최후의 창조, 완성된 창조를 말합니다. 이런 창조론에도 불구하고, 창조 신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논의에 따르면 결국에는 '최초의 창조'를 그리스도교 창조와 동일시하는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신학계에는 유물론적 형이상학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진화론을 가지고 씨름하는 신학자는 많지만, 지적 설계론을 가지고 그리스도교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논지를 따르면, 신은 역사에서 더 이상 개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일회성 창조로 끝이 납니다. 신의 활동 여지를 아주 없애 버리지요. 활동을 멈춘 신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 신이 아니죠.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근원은 창조 과학이 말하듯이 설계로 완성된 태초의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역사가 열려 있다는 약속에 놓여 있지요. 신학적으로 말해서 종말론적 개방성이라고 하지요.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이 함축하고 있는 이런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신학자로서 이들의 논의를 더 심각하게 비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들어서는 순간 그리스도교 신학은 중단됩니다.
신학적 측면에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지적 설계에서 '설계 논증이 신학적으로 적절한 신 존재 증명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저는 굳이 신 존재 증명을 해야만 그리스도교가 존립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신학자로서 혹시 그리스도인들이 지적 설계론이 세계가 진짜 설계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설계자가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풀어야 할 문제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런 논의의 지적 설계론은 이미 흄이 언급했던 설계 논증의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무슨 말인가 하면, 설사 설계자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설계자가 한 명인가 아니면 복수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며, 설사 설계자가 한 명이라도 그 설계자가 그리스도교의 신인가, 힌두교의 브라흐마인가, 이슬람의 알라인가는 여전히 논증해야 할 또 다른 문제로 남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적 설계론이 좀 더 진전된 신학적 주장을 하려면, 그 설계자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이라는 것을 또다시 증명해야 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적 설계론의 설계 논증을 신 존재 증명으로 볼 때, 그 원조라 할 수 있는 19세기의 페일 리가 제시한 설계 논증보다 후퇴한 것입니다. 페일리는 적어도 세계 속에서 발견되는 속성이 성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지닌 속성과 유사하다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그 설계자가 그리스도교의 신이라는 것을 개연적이나마 논증하려고 했기 때문이죠.
지적 설계론의 주장을 설계 논증으로 본다면 신학적으로는 근거가 빈약한 논증이며, 별로 고려할 가치가 없는 논증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몰라도, 지적 설계는 이런 논의를 전개하지 않죠.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서. 어쩌면 그래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 해석부터 시작해 신학적 논쟁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신학 분야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주류를 이루는 상황 자체가 창조 vs 진화 논쟁에서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제대로 된 신학도 없고, 과학도 없고, 사이비 신학과, 사이비 과학만이 있을 따름이지요. 결코 좋은 종교도 좋은 과학도 아닙니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은 결국 그리스도교와 신학의 종말을 자초하는 부메랑이 될 것입니다. 이게 아직까지 채 잉크도 마르지 않는 책들을 포함해서 최근까지 검토한 결론입니다.
왜 한국 교회는 창조 과학에 환호하는가?
이번에는 김 선생님께서 던진 질문, '왜 한국 교회에서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가 압도적으로 수용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죠.
원래 창조 vs 진화 논쟁은 미국과 한국의 보수주의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으로 종교 지형에서 보면 아주 국지적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교 전체나 신학에서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지요. 다만 한국 교회가 그 영향권 안에 있고, 그 사회적 파급 효과 때문에 고려하는 것이지요.
김 선생님도 언급하셨듯이, 이 논쟁은 철저하게 미국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지요. 미국의 백인 주류 그리스도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반 산업화와 세속화 등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안팎으로 사회적 주도권을 상실할 위기에 봉착합니다. 이들 중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위기 원인으로 교회 안에서는 '성서 비평학'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신학을, 교회 밖에서는 공산주의와 나치즘 등을 출현케 한 온갖 악의 원인으로 '진화론'을 규정합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새로운 자유주의 신학을 추방하고, 외부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진화론을 척결하는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창조 vs 진화 논쟁은 이런 변화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근본주의가 선택한 '퇴행적' 대안으로 결과로 오늘날까지 확대 재생산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서도 창조 과학의 목소리가 환영받고 있지요. 미국은 그렇다고 치고, 왜 한국 교회까지 창조 과학에 덩달아 환호하는가? 미국에서는 반진화론적 창조론의 주류가 지적 설계로 넘어갔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창조 과학이 압도적입니다. 창조 과학을 수입한 1세대가 여전히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기에 아직은 그 영향력이 유지되지만, 아마 조만간에 지적 설계로 주도권이 넘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최근 창조 과학 진영 일부가 우주가 오래전에 창조되었다는 오랜 지구 창조론의 견해를 제시했는데, 2008년 8월 한국창조 과학회는 우주 나이 6000년을 지지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 필자)
창조 과학 지지자들이 교회 안에서 성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선언하면, '아멘'과 '할렐루야'로 화답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요. 교회 안에서 이들은 무신론을 타파하는 복음의 '십자군'입니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이런 현상이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과학 앞에서 신앙의 정당화를 추구하려는 이런 태도를 한편으로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이것은 결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잘못된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김 선생님이나 장 선생님 모두 한국 교회는 왜 창조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해 했지요? 한국 교회에서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경계가 모호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이런 말씀을 했지요. 복음주의나 근본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다소 정교한 논의가 필요한데,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죠.(제가 대학원에서 개설하는 과목 주제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주의는 신학적으로나 신앙 양식에서 근본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질문에 대한 제 답은, 한국 교회가 창조 과학에 환호하는 데는 보수적인 신앙과 창조 과학의 주장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 과학이 근본주의 흐름에서 나온 것인데,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성향의 교회에서 환영받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요. 한마디로 서로 잘 맞기 때문이죠. 정확히 말하면, 창조 과학은 보수적인 교회나 신앙인들이 '듣기 원하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 성향을 생각하면, 문득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초기 한국 교회를 지배하던 신학이, 바로 20세기 초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을 경험한 미국 교회를 보고 오히려 보수 반동으로 되돌아선 사람들과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하지요.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 성향은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지요. 그런데 이들은 지역을 나누어 선교를 담당했지요. 함경도를 담당한 캐나다 선교회를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배경을 가졌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 주류 교단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벌이던 1920년대 이전에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복음과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보수적인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었지요. 이들은 자신들의 모국 교회가 신학으로 인해 분리되는 아픔을 선교지 교회에서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조심했고요. 좀 말하기 뭐하지만, 당시의 신학적인 논의를 객관적으로 다룰 능력을 갖춘 선교사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튼지 이런 저런 이유로 초기 한국 교회나 신학 교육은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제한적으로 소개하는 수준이었을 뿐입니다.
한국 교회 보수주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박형룡 목사나 한경직 목사는 평안도 출신으로 미국 북장로교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미국 주류 교단이 서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던 1920년대에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신학으로 인한 교단 분열의 부정적 결과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보수주의 신학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통일성 유지하는 그 자체였죠. (그 신학 때문에 교단이 수도 없이 분열된 것 또한 아이러니입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진보적이라 알려진 기독교 장로회의 상황은 좀 다릅니다. 초석을 놓은 김재준 목사가 함경북도 출신이지요. 이 지역은 성서 비평학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캐나다 선교부가 담당한 곳이어서, 일찍부터 자유주의 신학에 노출된 거지요. 한국 교회의 보수와 진보는 뿌린 대로 거둔 결과입니다. 미국 교회가 1920년대 겪은 교단 내 주도권 싸움을 우리는 1950∼1960년대에 겪고, 교단 분열로 마감한 거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를 지배하게 된 보수주의 신앙은 창조 과학이 활개 칠 수 있는 아주 좋은 마당이 된 것입니다. 늘 과학 특히 진화론의 피해 의식에 젖어 있는데 그게 거짓이라니 그것도 신앙심 깊은 과학자가 와서 단언을 하니. 이건 '복음'이죠! 한국 교회의 본류 보수주의는 창조 과학이라는 방계 보수주의가 안착하기에 아주 적합한 토양인 겁니다.
창조 과학, 실력보다 타이틀로 승부하다
이번 학기에도 '종교와 과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에서는 교양 필수로 개설하는 과목이죠. 교수가 되고 보니, 이 과목이 학부에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강사는 이 지역 대학의 기계 공학 전공 교수님이었습니다. 교과 과정을 보니 창조 과학 일색이었지요. 창조 과학은 그렇게 신학 대학에 자리를 틀고 신학생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학기부터는 제가 그 과목을 담당했습니다.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서 종교와 과학의 역사적 관계부터 최근 이슈까지 소개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학생들이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당혹해하거나 당황해 합니다. 자신들이 알던 내용과 사뭇 다르거든요. 대부분의 학생이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이미 이런 저런 세미나를 통해 창조 과학을 접하고 수업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런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제 대학 시절이 생각납니다.
제가 창조 과학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1학년 때인 1981년도입니다. 모태 신앙인 저는 그 전에 창조 과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하죠. 창조 과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1981년이니까요. 아마 한국에서 창조 과학에 노출된 첫 세대가 아닌가 합니다.
교양 과정으로 자연 과학 개론을 들었지요. 한 학기 동안 들었던 강의가 대부분이 '창조 과학'이었습니다! 그것이 '젊은 지구 창조론'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죠. 미국에서 막 공부하고 온 젊은 교수였죠. 당시 '졸업 정원제'(두 분은 아실지 모르겠네요. 전두환 정권이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입학 정원의 10%를 졸업시키지 않던 규정이죠.)가 목을 조르던 시절, 교수에게 항의는커녕 학점을 위해서 자연 과학 개론 교과서보다 창조 과학 책들을 더 열심히 파고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학기 말 보고서도 창조 과학에 관련된 주제였지요. 썩 유쾌한 기억이 아닙니다.
왜 그때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을까요? 제 경우는 학기가 지나면서 창조 과학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유학 시절 서구 지성사에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비롯해 이 분야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 말도 못했던 이유가, 교수-학생 사이의 불평등한 제도적 권력 관계도 있었지만(제 학점을 쥐고 있었으니까요.), 이쪽을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보다도 교수와 박사라는 타이틀에 눌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경우만이 아니라, 지금도 한국 그리스도인이나 목회자가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와 마주치는 전형적인 상황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데, 전문가가 말하니 들어야지!
창조 과학에 관련된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 우리 사회의 엘리트 계층입니다. 한국 창조 과학회를 설립한 사람들 대부분이 미국 유학한 이공계 엘리트였죠. 이들 대부분은 유학시절 창조 과학을 접했지요. 창조 과학은 자신의 전공이, 그것이 과학이든 공학이든, 그리스도교 진리를 확산시키는 첨병이라는 '사명감'을 넘치도록 부어줍니다. 이런 사람들이 귀국해서 '교수'나 '박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깊은 신앙을 가진 '과학자'로 교회에서 등장합니다. 교인들은 물론 목회자도 우선은 그 '타이틀'에 눌립니다.
사실 지금 목회하는 기존의 목사님들 거의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이어지는 군사 독재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연히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제대로 신학 교육을 받을 여건이나 기회가 거의 없었지요. 성서 비평학은 물론이거니와 신앙과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자연 과학은 더욱 그렇지요. 언제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니, 이들이 과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마저 자연 과학을 잘 모르니 교인들의 상황은 말할 나위가 없지요.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이야기를 정확하게 가늠해서 평가할 수 능력을 지닌 사람이 교회 안에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상황에서 대놓고 비판할 수 있는 그런 '불경한' 교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말하는 사람이 진화 생물학자인지, 기계 공학자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지요. 그저 과학자라니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한 성서 해석을 들이대고, 화석을 이야기하면서 진화론을 비판해도 그저 '아! 그런가!' 보다 하지요. 머리에 각인된 것은 그저 '진화론은 무신론이고 오류'라는 슬로건뿐이지요. 이게 오늘의 교회 현실입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진화 보기
그런데 진화론에 대해서는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그리스도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앞서 편지에서도 간간이 언급했지만, 진화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지요. 진화론에 대한 이런 다른 반응들이 창조 vs 진화 논쟁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창조 vs 진화에 대해 주요 입장을 창조에서 진화까지 자리매김한다면 이런 순서가 될 겁니다: (창조)젊은 지구 창조론-오랜 지구 창조론-지적 설계 창조론-진화론적 유신론(진화론적 창조론)-유물론적 진화론(진화).
현재 상황은 창조 vs 진화 논쟁이라는 링에 세 진영의 선수들이 올라와 있지요. 진화론을 부정하는 젊은 지구와 오랜 지구, 지적 설계론이 한 팀이며, 진화론을 수용하는 진화론적 유신론이 또 다른 팀이며, 유물론적 진화론이 마지막 한 팀입니다. 각 진영은 다른 두 진영을 동시에 상대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상대에 따라 서로 다른 전략을 사용하면서 비판하고 있지요. 이들의 입장을 간략히 말씀드리지요.
젊은 지구 창조론과 오랜 지구 창조론을 '과학적 창조론'이라는 한 묶음으로 먼저 말씀드리죠. 이들의 차이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지적 설계나 진화론적 유신론과 같은 다른 입장과 비교할 때 둘의 특징적 유사성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창조론은 미국 근본주의의 반진화론 운동의 유산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입장이지요. 근본주의는 신학적으로 특정 교리를 고수하는 것 외에, 진화론을 비롯한 현대 과학에 대한 반대와, 성서의 모든 글자 하나하나가 신의 영감에 따라 기록되었다는 '축자 영감설'과 성서에는 전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성서 무오설'의 주장을 그 핵심적인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과학적 창조론은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이며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진화론을 비롯한 자연 과학이 제시하는 생명의 오랜 진화의 역사 과정을 부정합니다.
이 창조론에서 가장 극단적인 흐름이 흔히 '과학적 창조론'과 동일시되기도 한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입니다. '젊은 지구'라는 이름은 세계가 지난 수천 년 또는 1만 년 안에 창조되었다는 이들의 주장에서 비롯합니다. 장 선생님 이야기처럼, 우리나라에서 창조 과학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진영에 속해 있지요.
이들의 주된 주장은 이런 겁니다.
우주의 창조는 6000∼1만 년(길어야 2만 년) 이내에 있었으며, 24시간의 6일 동안 창조가 진행되었으며, 기본적인 생명 형태는 창세기 1-2에 나타난 창조가 발생했던 창조 주간에 신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직접 창조했으며, 창세기 3:14-19의 신의 저주로 인해 자연계에 죽음이 들어왔으며,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 사건이며 지구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젊은 지구 창조론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는 엄청나게 많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저작이나 인터넷 홈페이지는 주로 지구의 나이가 아주 짧다는 것을 뒷받침한다고 선택된(?)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과 진화론을 반박한다고 믿는(?) 과학적 사례를 제시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구의 나이를 아주 짧게 계산하는 이들은 천체 물리학, 지질학, 생물학 등 대폭발과 진화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과학을 당연히 거부하지요.
오랜 지구 창조론(Old Earth Creationism)은, 젊은 지구 창조론과 달리 지구 나이가 40억∼50억 년, 우주 나이가 100억∼200억 년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오랜 지구'라는 이름도 여기서 연유했지요. 이들은 현대 우주론과 지질학이 제시하는 오랜 우주와 지구에 대한 자료와 창세기의 기록을 동일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들 주장에서 핵심은, 오랜 기간 동안 신의 예정된 계획에 따라, 진화라는 절차 없이 신의 초자연적인 '직접' 개입에 의해 우주와 생명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랜 지구 창조론은 과학이 보여 주는 우주의 오랜 시간을 창조론과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 주지요. 결국 창세기의 창조 본문을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이 입장은 이렇게 성서 해석에서 다소 여유를 갖는 것 외에도, 진화론을 제외한 현대 과학의 여러 분야의 업적을 그대로 수용하는 점에서 젊은 지구 창조론과 다릅니다. 그렇지만 진화를 부정하고, 생명의 형식이 신에 의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직접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젊은 지구 창조론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지요.
창조 vs 진화 논쟁에서 또 다른 한 축이 '지적 설계론'입니다. 장 선생님이 편지에서 이미 언급하고, 저도 지난 편지에서 조금 말씀드렸기에 짚고만 넘어가지요. 지적 설계론은 창조 vs 진화 논쟁의 본질이 과학적 증거의 문제가 아니라,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상충된 세계관의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보다 정교한 형태의 과학적 창조론을 제시합니다. 이들은 진화론만 거부하고 다른 현대 과학의 성취를 받아들이지요.
창조 vs 진화 논쟁에 관련해서, 이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렇습니다. 자연주의에 근거한 과학은 특히 다윈주의 진화론은 과학적으로도 오류이며, 자연 세계는 고도의 지성을 지닌 지적 존재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그 설계의 증거는 '경험적' 모델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증명된다.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 설계를 검증할 수 있는 과학적 기준 제시, 이것이 지적 설계의 구성 요소입니다.
진화론적 유신론의 진화 보기
이제 진화론적 유신론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이 입장은 진화를 수용하는 신학적 입장이기에, 상당히 전문적인 신학 논의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신학 내용보다는 창조 vs 진화 논쟁과 관련해서 지적 설계나 유물론적 진화론과의 차이를 중심으로 설명 드리죠.
진화론적 유신론은 생명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 유효하며, 생명은 진화론이 기술하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진화론적 유신론은 비록 생명이 진화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입장이지만, 그 과정은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자연적인 힘의 결과가 아니며, 신이 진화의 전 과정을 주관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입장은 '과학' 작업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구분합니다. 이런 구분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지적 설계론과 달리, 진화론적 유신론은 전자를 수용하고 후자를 거부하지요.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과학적인 차원에서 현대 자연 과학이 제시하는 진화론적 생명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와 그 메커니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 vs 진화 논쟁의 맥락에서 보면, 진화론적 유신론은 진화론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적 진화론과 일치하며, 생명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 신을 도입하는 측면에서 창조론과 관점을 공유합니다. 즉 진화론적 유신론은 진화론과 결합된 유물론적 자연주의를 배제하면서, 진화와 유신론적 세계관을 결합한 것이지요. 결국 진화론적 유신론에서 '진화는 신이 생명을 창조할 때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진화론적 유신론에서 창조와 진화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과 진화, 또는 종교와 과학은 기본적으로 배타적이거나 모순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의 양극단에 있는 창조 과학과 유물론적 진화론자들이 창조와 진화를 문제를 양자택일로 몰고 갔을 뿐이라고 판단합니다.
창조를 창조 과학 유형의 '특별 창조론'과 동일시하고, 진화를 '과학 개념'에 제한하지 않고 '무신론적 자연주의'나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라는 세계관을 포함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이 결과 창조 vs 진화 논쟁을 단순히 '창조론적 유신론'과 '진화론적 무신론' 사이의 선택의 문제로 끌고 가서 일반인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
진화론적 유신론은 창조 과학을 '종교적 환원주의'로 유물론적 진화론을 '과학적 환원주의'로 비판합니다. 진화론적 유신론이 양자택일적 관점을 비판하는 근거는, 생명에 대한 설명은 모두 한 가지 수준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창조 과학과 유물론적 진화론은 모두 생명 현상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수준과 가치를 무시하고, 창조와 진화 또는 종교와 과학을 동일한 차원에서 같은 수준의 설명을 제시하는 경쟁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적 유신론에서 진화와 창조는 서로 다른 수준의 설명이기 때문에, 둘이 모순되거나 양자택일의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에게 생명과 세계는 여러 수준의 계층적 설명 방식의 상보적 해명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실재입니다. 생명 현상에서 발견되는 여러 수준의 구조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게 제가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린, '설명의 다윈주의'와 '비환원주의적 인식론'과 관련을 갖고 있지요.
진화론적 유신론의 진화와 손잡기
앞서 제가 진화론적 유신론은 진화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라고 말씀드렸지요. 하나의 신학적 입장으로서 진화론적 유신론자의 일차적인 관심은 진화 이론 자체에 있는 것보다, 진화 개념을 통해 신학 개념을 재구성하는 데 있습니다. 즉 진화가 과학적으로 논증되는 사실이라거나, 진화론이 제시하는 생명의 역사나 자연의 역사가 성서의 증거와 일치하는가와 같은 문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들은 진화라는 개념이 기존의 신학적 설명 체계에 어떤 새로운 통찰력을 줄 수 있으며, 신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더욱 강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진화 과학이 제공하는 세계관의 빛 아래서 '신학적 개념'이나 '종교적 의미'들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신학화'에서 성서와 진화를 어떻게 보는지 말씀드리지요.
먼저 성서부터 볼까요. 사실 진화론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은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판가름 납니다. 진화론적 유신론은 거의 전부가 역사·비평적 성서 해석 관점을 지닙니다. 이것은 이들이 창세기의 창조를 설명하는 구절들이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와 관련된 창세기 1-11장의 기록을 비역사적인 설명으로 보는 것이지요. 성서가 특히 생명이나 우주의 기원에 관해서 '과학적인 증거'를 전혀 또는 거의 제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특히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신앙 고백 결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기록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이 고도로 비유적이고 시적인 문학 형식으로 이해합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을 비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진화론적 유신론자들에게 있어서, 성서는 신의 계시가 담겨 있지만 이를 과학 이론과 일치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잘못입니다. 창세기의 기록 목적이 21세기 과학 이론의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물론 창조 이야기가 역사적이나 과학적 기록이 아니라고 해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지요. 창조 이야기는, 이 세계가 본질적으로 선하면 질서 있으며, 이 세계는 신에 의존에 있으며, 신은 주권자이며 자유로운 존재로서 목적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깊은 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둘째, 진화와 창조는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며, 진화는 신학에 아주 유용한 개념입니다. 자연 과정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은 창조 이야기의 의도하는 신학적 의미와 그 영역이 중첩되지 않기 때문에, 진화를 신학적 체계 안으로 수용하는 데 아무런 장벽이 없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생명의 역사 전체를 포함하는 거대한 체계를 설명하며, 진화는 그 생명의 역사가 진행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진화론적 유신론은 진화 개념이 유신론적 세계관에 아주 유용하다고 주장합니다. 자연선택과 변화를 포함하는 진화 개념은, 피조세계에 보다 많은 활동성과 자율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더 잘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지요. 이렇게 진화론적 유신론에서 진화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 그리스도교 신학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더 나아가, 진화는 신학이 새롭게 성찰할 수 있는 계기와 정황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신학의 구성을 촉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진화론적 유신론은 그리스도교가 다윈 이전이 아니라 다윈 이후의 세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진화하는 우주는 전통적인 신학을 형성해 온 세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화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세계의 창조, 계속 창조, 세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신, 세계 속에서 신적 창조성 등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지요. 진화론적 유신론에 근거한 신학은 진화를 그리스도교 신학이 변증해야 하는 도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화를 그리스도교 신 이해를 위해 가장 중요한 맥락으로 삼고 이를 성찰하는 신학적 대응인 것입니다.
한국 그리스도교, 온실에서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신학에 문외한인 어설픈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에 신앙과 신학의 문제까지 위임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저를 비롯한 신학자들과 목회자의 책임이지요. 한국 교회 안에서 제대로 신학 교육을 받고 진화론을 비롯한 자연 과학에 정통한 목회자를 배출하는 과제입니다. 이런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은 책임 회피이고 직무 유기입니다.
사실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그리스도교가 우리에게는 100년이라는 단기간에 들어왔지요.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오랜 기간 동안 치열한 논쟁을 통해 형성되어 왔는데, 한국에는 마구 뒤섞여 들어오면서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문제의식이 간과되었지요. 오늘날 한국 신학계가 '현대 이후(post-modern)' 시대의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 대부분은 여전히 '근대 이전(pre-modern)'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요. 교회는 여전히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 이전의 신학 틀을 여전히 고수하는 보수주의 신학이 지배하고 있지요.
이렇게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교회나 신학 대학 상황에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데 진화론을 비롯한 현대 과학에 대해 적절한 소양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교과 과정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인문계와 자연계를 구분하고, 학문 간에 담쌓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신학교육이 양자를 포괄하는 통합적인 교육으로 나가기는 요원하지요. 제가 신학을 공부할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몇 학교를 제외하고는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없고, 가르칠 의지도 없고, 가르칠 능력을 갖춘 사람도 없고, 가르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까요. 현실에 안주하는 것, 보수주의, 무섭습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우리가 지금 보수주의라는 신앙의 '온실'에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온실에서나 가능한 폐쇄적인 신앙적 독단으로 인해 교회는 이미 한국 사회와 소통부재라는 중병을 앓고 있지요. 이미 가진 자가 되어 현실에 안주하는 교회와, 비만증 환자가 되어 이제 질병 저항력이 약해져 무균실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 머무는 곳이 바로 온실입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생기도 없는 온실을 버리고, 생존을 위해 '광야'로 나가할 때입니다. '광야'에서 '온갖' 거친 '바람'을 겪는 겁니다. 그런 바람 속에서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겁니다. 그런 연후에야 들꽃 같은 생명력을 지닌 건강한 교회와 신학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방학이 시작되면 다시 티베트로 갑니다. 장 선생님이 짐을 꾸려 들어오는데, 저는 짐을 꾸려서 나가네요. '바람'이 필요해서요. 제 자신이 자꾸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보스턴의 '바람'도 좋지만, 설역고원의 '바람'이 그립습니다. 라싸에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거쳐 네팔로 빠질 겁니다. 가을에는 보스턴에서 맞은 '과학'의 바람과, 티베트에서 겪을 '종교'의 바람을 함께 나누는 자리를 갖도록 하지요.
2007년 6월 20일
빛고을에서
신재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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