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수 감독이 말했다. "<반포치킨> 알지? 거기서 만나요." 시인 황동규의 시에도 등장하는 <반포치킨>은 마늘치킨으로 유명하다. 밖에서 보면 호프집인데 안에 들어가면 경양식집이고 맛을 보면 소문난 집이다. 장사한지 25년이나 됐다. 최종수 감독은 한 가운데 자리에 식객(食客)마냥 앉아 있었다. "여기 잘 아네? 난 집이 여기에서 가깝거든. 자주 와." 그는 마늘치킨 한 접시를 더 시키며 말했다. " 오늘 촬영이 없어요. 내일 운암정 세트가 있는 태백으로 가. 지금까지 방영된 십 여부는 다 미리 찍어놓았던 거야. 시청자들 반응이 좋은데 그걸 바로 바로 작품에 반영시키진 못하고 있었지. 이제부턴 따끈하게 바로 찍은 거야.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궁금해요. 시청자들과 바로 바로 마주할 수 있다는 게 드라마의 장점이자 특징이야. 그렇게 따지면 사전 제작자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거 같기도 해요." 그는 디씨인사이드에 있는 <식갤>에서 수시로 드라마에 대한 반응을 살펴본다고 했다. 최종수 감독은 <대장금>을 찍은 이병훈 감독과 <여인천하>를 연출한 김재형 감독과 함께 몇 안 되는 현역 노장 드라마 연출자다. 김재형 감독이 건강 탓에 은퇴한 다음엔 숫자가 더 줄었다. 그러나 최종수 감독은 여전히 팔팔하다. 그는 말했다. "MBC프러덕션 사장을 하고 <한강수 타령>으로 현장으로 복귀했어요. 프러덕션 사장까지 하고 나면 다들 연출은 은퇴하기 마련이지. 그런데 난 다시 연출을 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시기를 맞이한 거 같아요. 연출을 맛을 다시 알았달까. 예전엔 배우들을 윽박지르곤 했어요. 지금은 기다릴 줄 알게 됐어. 나이가 드니까 사람이 변하더라고." 최종수 감독은 원래 <식객>을 연출할 생각이 없었다. "오리지널리티가 없잖아. 원래 JS픽쳐스에서 다른 사극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식객>을 연출할 생각이 없느냐는 거야. 그래서 허영만 화백의 만화를 찬찬히 읽어봤는데 이게 드라마가 되겠더라고. 영화로도 크게 성공을 거뒀지만 어쩌면 영화보단 드라마가 더 어울려. 그래서 해보기로 했지요." 그가 연출한 드라마 <식객>은 영화와 만화와는 또 다르다. 느리지만 지루하지 않고 울먹하지만 신파는 아니고 구수하지만 젊다. 잘 끓인 된장국 같다. 잔잔하게 감정을 끌고 가지만 울컥하게 만들 땐 제대로 들이댄다. 요즘 드라마처럼 팩팩 달리지 않고 힘을 주지도 않는다. 옛날 드라마 같지만 구닥다리가 아니라 자꾸 보게 된다. "그냥 울려 버리려고만 해선 안 돼요. 사람의 마음을 만진다는 건 음식의 맛을 내는 거하고 비슷해요. 조미료를 잔뜩 치면 맛이 과해지지. 난 음악을 잘 안 써요. 그냥 배우의 표정을 진득하니 보여주면 거기에서 감정이 나오는 거야." 그는 드라마에서 자기를 드러낼 생각이 없다. 경험과 연륜은 과시할 필요가 없다. "드라마는 영화가 아닌데. 영화라면 이미지적이고 빨라야 할 거야. 하지만 드라마는 시청자들한테는 삶의 활력소 같은 거거든. 세상이 너무 빠른데 드라마까지 빠르면 보는 사람이 지치지 않겠어.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행복하게 해줘야 해요. 진솔하게 사람 냄새를 전해주는 것도 좋지요." 드라마 <식객>은 촌스러운 듯 하지만 충분히 진솔해서 사람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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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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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배우 최불암과는 오랜 인연이다. 1970년대 <수사반장>을 찍을 때 최불암과 최종수 감독은 배우와 연출자로 파트너였다. "최불암 씨는 정말 감각적인 연기자예요. <식객>에서도 독특한 발성과 표정을 보여주는데요, 누구는 변신이라고 하지만 그런 건 변신이 아니라 감각이라고 해야 할 거 같아요. 평소에 삶의 요모조모를 관찰하고 기억해 놓았다가 그걸 적재적소에서 풀어놓는 거죠. 그건 재주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그는 배우 김래원한테도 최불암과 같은 재주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둘이 함께 있으면 아주 연출하는 게 재미나요. 감각이 착착 감기니까. 본능적인거지. 권오중이도 잘해요." 뚝배기 같은 드라마를 더 좋아하지만 이번엔 최종수 감독도 요즘 유행을 좀 따랐다. "게임 구조라고 하죠. 관객들이 매 회 흥미롭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구조인데요. 사실 예전에는 없던 이야기 형태죠. 예전 드라마는 훨씬 정적이고 서사적이었어요." 하지만 고집은 있다. "대신 대립 구조를 단선적으로는 안 끌고 가려고 해요. 착한 놈은 착한 짓만 하고 나쁜 놈은 나쁜 짓만 하는 권선징악 구조는 식상하니까요. 우리 삶은 어디 그런 가요. 착한 놈이 따로 있고 나쁜 놈이 따로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최종수 감독이 지나온 세월 동안 느낀 삶의 맛이다. "봉주는 계속 한식의 세계화를 부르짖지요. 성찬은 전통의 맛을 지키려고 하고요. 나도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어요. 둘의 차이는 아주 작은 지점에 있을 거예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옳은 말을 하고 있지요. 둘 다 분명한 명분을 가지고 맞서는 거죠. 어느 한 쪽이 이긴다면 착해서가 아니라 어떤 작은 선택을 잘 해서겠죠." 요즘 그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어떤 음식이 제일 맛이 있었느냐 다. "사실 촬영 끝나고 남은 음식은 잘 안 먹게 되잖아요. 찍기 바빴지 많이 먹진 않았어요. 하지만 주변에선 다들 <식객>의 감독이라고 부러워하죠." 그는 껄껄 웃는다. 그리곤 말한다. "난 복 받은 편이예요. 아내가 음식 솜씨가 일품이거든요.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찌개가 가장 맛이 있어요." 그는 현장에서 젊은 친구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애쓴다. 스태프들은 아직도 그의 옆에선 담배도 피지 못한다. 그는 미안하다. "젊은 사람들과 무언가를 한다는 게 정말 즐거워요. 예전엔 나한테 주어진 연출의 기회가 소중한 줄 몰랐어요. 지금은 나한테 이 기회가 두 번 주어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아요. 그래서 모두와 함께 매일 매일 더 즐겁게 하려고 해요." 드라마를 만드는 건 음식을 만드는 것과 같다. 손 맛을 익히려면 하루 이틀 가지곤 안 되듯이 드라마를 맛있게 익히는 데도 세월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좋은 요리사는 사람들이 자기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행복하다. 드라마 연출자도 마찬가지다. <반포치킨>의 주인 아주머니가 최종수 감독을 알아보고 <식객> 감독님이 오셨다고 반색이다. 어느새 500CC 생맥주가 다 비워졌고 그의 손은 마늘치킨 기름으로 범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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