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 레저, 그러니까 조커는 간호사 복장을 한 채 병원을 걸어 나온다. 경기를 일으키듯 캘캘댄다. 병원에선 폭탄이 터진다. 문득 고개를 갸우뚱한다. 손에 든 리모콘을 툭툭 친다. 병원이 와르르 무너진다. 조커, 그러니까 히스 레저는 무너지는 병원 따윈 안중에도 없다. 뒤돌아 선 그는 광기서린 무심함으로 나른한 표정을 짓는다. 찢어진 입가를 붉은 루즈와 허연 분가루로 칠해버린 히스 레저는 즐거운 악마다. 악마의 박력이 화면을 압도한다. <다크 나이트>는 배우 히스 레저와 연출자 크리스토퍼 놀란과 배트맨의 영화다. 우선 시선을 사로잡는 건 히스 레저다. 히스 레저는 6주 동안 런던의 호텔방에서 갇혀 지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프리미어 USA>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와 록그룹 <섹스 피스톨즈>의 리더 시드 비셔스한테서 조커의 이미지를 찾기 시작했다. 호텔방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배트맨>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나는 전혀 다른 세계로 빠져 들었다. 나 자신을 광기와 히스테릭으로 몰아갔다." 그는 또 말했다. "연기를 할 때마다 피곤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나중엔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고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완전히 맛이 간 거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의 집사 알프레드를 연기한 대배우 마이클 케인은 말했다. "내가 여태껏 본 중에서 가장 섬뜩한 연기다." 히스 레저는 되받았다. "그렇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어쩌면 마이클이 놀란 게 두어 가지가 더 있었을 텐데?"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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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
섬뜩하다는 말만으론 히스 레저의 연기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자기 삶을 파멸로 몰고 간다. 자기 안에서 절망과 우울과 광기와 굶주림과 파괴를 끄집어낸다. 스스로 조커가 된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삶의 아름다움과 선의 가치를 부정한다. 조커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차라리 자신이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이 맞다는 걸 증명하려는 미치광이 철학자다. 그의 폭력은 발광이 되고 예술이 된다. 조커는 두 척의 배에 폭탄을 장치하고 각자에게 상대 배의 기폭 장치를 준다. 먼저 스위치를 누르는 쪽만 산다. 상대를 죽여야 사는 현실에서 인간성과 선함은 말라 죽기 마련이다. 조커는 그걸 통해 세상이 지옥이라고 외치고 싶어한다. 히스 레저도 어쩌면 조커를 너무 간절하게 이해했다. <다크 나이트>를 찍을 무렵 그의 삶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찍을 때 만난 아내 미셀 윌리암스와는 이혼을 했다. 그녀가 그를 떠났고 그에게 남은 건 딸 마틸다 뿐이었다. 그는 현재를 부여잡고 스스로 행복하고자 애썼다. "내 세상의 중심은 딸이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오늘 아침이다. 난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 난 철저하게 현재를 살고 싶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히스 레저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들었고 삶의 어두운 곳으로 제발로 걸어 들어갔다고 증언했다. 2008년 1월 22일 히스 레저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었다. "죽을 때 돈은 가져갈 수 없지만 내 영화들은 남을 거다. 세상은 내 영화를 통해 히스 레저라는 인간을 평가할 거다." <다크 나이트>를 본 평론가들은 열광했고 절망했다. 히스 레저의 생기에 열광했고 히스 레저의 죽음에 절망했다. 그의 영화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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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과 조엘 슈마허가 이끌었던 <배트맨> 시리즈는 만화나 다름 없었다. 악당들은 뮤지컬 배우들 같았고 배트맨은 초능력자였다. <007> 시리즈처럼 배트맨의 첨단 장비를 자랑하느라 바빴다. 만화 원작에 얽매인 결과였다. 인물을 설명하고 볼거리를 제공하고 갈등을 담다보면 두 시간이 짧았다. 연출자 크리스토퍼 놀란은 <배트맨>을 재창조했다. 원작에서 추출한 건 오직 캐릭터와 염세적인 세계관 뿐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창조한 배트맨의 세계에선 선과 악과 진실과 거짓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은 그걸 구분할 수 없다. 그만큼 지혜롭지도 않고 그만큼 강인하지도 못하다. 경찰은 부패했고 시민들은 조커에게 배트맨을 재물로 바치라고 외친다. 조커가 그런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 앞에서 배트맨은 거짓 희망을 말하는 위선자다. 배트맨은 갱단들로부터 고담시를 지키고자 하지만 그가 애쓸수록 고담시는 지옥으로 변해간다. 그의 선행은 악행보다 못하다. 배트맨은 초법적인 존재다. 그는 그가 믿는 정의를 위해 힘을 쓰지만 결국 그도 조커처럼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능력을 사용하는 무리일 뿐이다. 조커는 배트맨을 조롱하며 말한다. 너와 나는 다를 바가 없다고. 배트맨도 그걸 부인하지 못한다. 배트맨은 선한 검사 하비 덴트한테서 희망을 본다. 그러나 조커는 하비 덴트마저도 타락시킨다. 조커의 승리다. 그러나 배트맨은 그것마저 감추려고 한다. 그는 하비 덴트를 위악적인 희망으로 포장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선과 악의 이분법 안에서 실사 만화 영화로 전락하곤 했던 슈퍼 영웅 시리즈들에 침을 뱉는다. 염세적인 세계에 희망은 없다. 있다면 그건 위악적으로 조작된 희망 뿐이다. 배트맨은 그 희망을 부여잡은 불쌍한 나르시시스트다. <슈퍼맨>은 구원을 말한다. 슈퍼맨은 완전하다. 그의 영혼은 그의 육체만큼이나 천하무적이다. 내파되는 절망을 모르는 영웅을 보며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들은 하나의 신앙 공동체다. <슈퍼맨>은 구원자와 구원을 기다리는 복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세상을 <슈퍼맨>의 세상으로 바라보고 믿고 싶어하는 우리들이 있다. 그런 우리들은 배트맨조차 슈퍼맨으로 만들었다. 앞선 <배트맨> 시리즈들은 배트맨을 또 다른 구원자로 승격시켰다.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숱한 지상의 종교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배트맨>은 원래 그 대척점에 있었다. 배트맨은 연약한 심성과 강인한 의지와 유약한 육체를 지닌 인간이다. 배트맨의 세상에선 어느 누구도 구원자를 믿지 않는다. <다크 나이트>는 비로소 배트맨을 그가 있을 자리로 돌려보낸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날지 못한다. 앞선 <배트맨> 시리즈의 날개 달린 배트윙 따윈 나오지 않는다. 배트맨은 높은 빌딩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그러나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은 거듭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추락한다. 조작된 희망과 불가해한 선악과 불가피한 위선 속에서 우린 살고 있다. 미디어와 권력은 그걸 지우고 희망을 나열하지만 참된 영웅은 없다. 숱한 슈퍼 영웅들이 영웅을 참칭하며 우리를 속이고 위로하고 이용할 뿐이다. 결국 우리한테 남은 건 단 하나다. 상대 배가 기폭 장치를 누르기 전에 내가 지닌 스위치를 누를 건인가. 히스 레저는 죽었고,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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