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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인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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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인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김민웅의 세상읽기 <141>

가을이 깊어가는 때에 예기치도 않게 문득 비가 오면 마음이 유난히 우울하고 쓸쓸해지는 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창밖을 스치듯 지나는 빗소리가 일상의 속도를 잠시 중단시키면서, 지금 한참 몰두하고 있던 바로 그 일상과는 구별되는 예외적인 시간을 마치 마저 읽지 못했던 책의 나머지 페이지처럼 제공해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살아가면서 한번은 꼭 읽고 싶었던 책을 기어이 손에 넣고도, 무엇에 그리 쫓기는지 여간해서는 쉽게 펼치지 못한 채 어느새 먼지가 쌓인 서가에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이 돌연 깨달아지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시작은 이미 오래 전에 했으나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의 인생을 닮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상처 입은 감상에 빠지는 적막감입니다.

하여 그런 이들의 영혼은 매우 민감합니다. 흘깃 부는 바람 속에서도 평상시에는 잊고 있던 과거의 파편을 아프게 목격하고, 바쁜 거리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총총걸음 속에서 유독 자신만이 직면한 것 같은 현실의 좌절감을 읽어내며 별빛이 어두운 하늘에서 두려운 미래의 징조를 파악하려 듭니다. 그래서 세상 그 어디에서도 그를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은 없는 듯 합니다.

더 이상 흥미가 없어진 낡은 습관처럼 무표정하게 반복하고 있던 일상을 멈추는 것이 성찰의 기쁨을 주기보다는, 막연해지는 자신의 운명을 줄곧 걱정하는 절차가 되어간다면 그런 처연함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외롭게 하는 결론에 이르는 길을 무작정 파고드는 작업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달리 있지 아니합니다. 아무런 잡념 없이 열심히 읽고 있던 책을 아쉽게 놓아둔 채로 마지못해 끌려갔던 현실의 수렁에서 홀연 벗어나 다급한 당장의 현실을 내세워 망각하고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하창고에 묵혀 버린 재고처럼 그동안 점검하기를 잊은 상실과 박탈, 또는 소멸의 목록을 되돌아보는 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시간의 빛에 바래 이 목록에 기록된, 형체가 희미해진 글자들을 응시하면서 그만 그새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구나, 어쩌다가 놓치고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는 서늘한 일깨움은 다만 자신만이 알고 있는 통증을 가져오는 질병이 아닐 것입니다. 그건 자신을 새삼 마주대하며 기력을 회복하는, 굳이 사제(司祭)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은 의식(儀式)일 수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오후, 우수(憂愁)에 젖는 날의 슬픔만이 아니라 기대치 않았던 아름다움 또한 있습니다. 그건 상실의 공간에 서서 어찌 하는 수 없이 허망해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한 복판에서 도로 찾아나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우치는 기쁨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완성은 실패가 아니라 아직 더 신비롭고 매력적인 여정이 남은 인생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손에 들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비로소 새롭게 쓰기 시작하는 그런 즐거움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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