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나 각종 국제 행사가 있을 때면 영문 표기가 Japan인 일본이 먼저 입장하고 Korea인 대한민국은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을 보며, 괜히 억울해하곤 했다. 그게 다 일본 때문이라고 여겼으니까.
일본은 식민지인 조선이 C로 시작하는 나라인 게 못마땅했단다. 그래서 자신들보다 뒤에 오는 알파벳 K로 바꾸었다나.
가뜩이나 나라를 잃었던 역사도 억울한데, 일본이 그런 장난까지 쳐놓았으니, 민족 정서 제대로 훼손됐다. 이 이야기에서 괜한 억울함을 느꼈던 게 기자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은 Korea가 아닌 Corea라고 적힌 응원 띠를 들고, '오 필승 꼬레아'를 그렇게 열심히 불렀나 보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을 때 로마식 국호는 Republic of Korea였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인데 왜 'Dae-Han'으로 시작하는 로마자 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또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데, 로마자 국호는 Democratic People's of Korea다. 왜 우리는 Korea를 국호로 사용하는 것일까? 대체 Corea는 뭐고, Korea는 무엇일까?
Cauly, Carli, Coray, Corey, Cory, Corai, Coria, Coree, Core…Corea!
흔히 의문을 품어봤음직한 차이다. 대개는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의문을 품은 저자가 천 년의 시간을 살피며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 나왔다.
<꼬레아, 코리아-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 이 책의 지은이 오인동은 우리나라 국호를 둘러싼 의문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고문헌과 고지도 속에서 'Korea'라는 표현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그가 서양의 고문헌과 고지도 속에서 찾아낸 우리나라 로마자 국호의 흔적은 다양했다. Coree, Core, Coray, Corea, Chausien, Cauly, Carli, Corey, Cory, Corai, Coria….
이 책에 따르면 13세기 몽골 제국을 방문하고 쓴 동방견문록에 마르코 폴로는 고려(高麗)의 존재를 막연히 알고 Cauli라고 적었다.
그 뒤 나온 번역본 등에서는 Cauly, Carli, Kauli, Kaoli 등 각국의 언어적 특성에 따라 제각기 번역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표기가 존재했던 것은 아직 고려의 존재가 서양 사람들의 인식 속에 각인되지 못했다는 증거다. 실제로 이때 고지도에는 한반도는 섬으로 그려져 있는 게 태반이었다.
하지만, 15,6세기 유럽은 신항로를 개척했고, 아시아에 진출해 점점 고려의 존재에 대해 알아간다. 점점 서양의 언어에서 '고려'의 음가는 정착돼 간 것이다. 다양하게 불리던 고려를 Core라고 적은 지도가 등장하고, 점점 Corea로 정착해 간다.
Core(고려)+a (land)=Corea
이 책에 따르면 Corea라는 국호는 Core에 a가 붙어 생긴 말이다.
라틴어에서는 고유 명사에 접미사 a 또는 ia가 붙으면 그 땅(land), 나라(nation) 또는 지역(region)을 의미한다. 그래서 Corea(고려의 땅, 고려 지역 또는 고려국)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중국 로마자 국호가 China가 된 것도 이와 같다. 서양은 중국의 존재를 진나라로 처음 알게 됐고, 그래서 Chin 뒤에 a를 붙인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15,6세기는 한반도엔 분명히 조선이란 이름을 가진 나라가 있었다. 왜 서양은 여전히 이곳을 '조선'이 아닌 '고려'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고려란 국호가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라는 국호를 고려로 바꾼 뒤부터 13세기까지 지속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아랍 상인들을 통해 고려의 존재는 서양에 전해졌고, 또 몽골 제국 때 서양인들은 고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미 서양인들에겐 '고려'로 인식이 굳어진 것.
시간은 흘러 19세기 제국주의 시대가 됐고, 서구 열강들은 한반도의 존재를 확실히 알아간다. 그러나, '대한제국'으로 조선의 국호가 바뀌었을 때도 미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Corea로 국호를 사용하겠다고 대한제국에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만큼 천년의 시간 동안 Corea는 우리를 대표하는 국호로 자리를 잡아간 것이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이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은 어떤 이유에선가 Corea 대신 Korea라고 더 많이 적었다. 그래서 천년 동안 자연스럽게 통용돼 왔던 Corea가 밀려나고, Korea로 정착됐다. 오늘날 남과 북이 채택한 Korea는 승전국이 주로 사용하던 언어 관습에 따라 표기된 것이다. 미국에 대해 적대적인 북한마저도 영어 표기는 미국 관습을 따라 Korea를 택했다는 게 흥미롭다.
"로마자 국호는 Corea로, 한국 국호는 꼬레아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려가 Corea가 되기까지, 그리고 Corea의 C가 K가 되기까지 충실하게 천 년 가까이 되는 고지도와 고문헌, 각 시대의 선교사들의 서한문과 저서, 19세기 조선과 서양 각국이 체결한 조약문, 윤치호의 일기까지 저자는 실로 방대한 자료를 다루었다. 지은이 오인동은 그 과정에서 옛 포르투갈어 문장을 번역하고, 지도 속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글자를 읽으려고 확대경과 씨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탄생했다.
지은이 오인동은 하버드 의대 조교수와 MIT 생체공학 강사 등을 거쳐 현재 L.A. 인공관절연구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한반도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에 살면서, 조국과 국외의 한인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과 시대정신을 갖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미국 의료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한편, 1990년대 중반부터는 L.A. 한인 사회에서 통일 연구 기구인 'Korea-2000'을 결성해 조국의 분단 극복과 통일을 위해 활동해왔다.
그는 통일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로마자 국호는 Corea로 한국 국호는 꼬레아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Corea 국호 되찾기 작업'에 매진했고, '조국 통일과 남북 간의 근본 문제들'이라는 논문집을 엮어 통일로 가는 단계에서 써야 할 국호, 국기, 국가에 대한 소견을 펼치기도 했다. 이 논문집은 1998년 남측의 김대중 정부와 북측의 김정일 정부에 전달됐다.
이런 이력을 가진 지은이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적었다.
"지난 100년 동안에 쓰였을 뿐이고, 해방 후에는 차분한 성찰 없이 미국과 소련을 따라 써온 Korea를, 몇백 년의 풍상을 우리 민족과 함께 겪어온 Corea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간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Corea를 되찾아 우리 뜻대로 쓴다는 것 자체가 민족사적 긍지를 느끼게 해줄 것이라 확신한다. 이 자그마한 역사적 고찰이 통일 국호가 Corea로 채택되는 데 필요한 자료가 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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