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대통령은 어떨까? 아니, 어때야 할까? 대통령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아주 특별한 소수이자 수평적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투표로 뽑힌 대통령은 모든 사조직이 그러하듯 마음대로 낙하산을 뿌려도 되는 것일까?
철옹의 '용역산성' 뒤에서 40여 초 만에 통과된 YTN 구본홍 사장 선임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조직의 구성 원리가 실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중추인 언론에도 작동하며, 오늘의 한국 사회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임을 보여줬다.
이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을 "우리가 해먹지 못했던 10년"으로 사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대통령의 첫 번째 낙하산은 떨어졌고, 낌새로 볼 때 5년 내내 이 같은 투여식은 반복될 듯. 어찌할꼬? 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이 둘이나 더 '귀환'했다는 점이다.
경제 대통령의 복권…성공한 증여는 처벌할 수 없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 할 수 없듯, 성공한 증여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났다. 법에 관한 문외한으로서 이해하자면, 삼성 이건희 전 회장이 이재용에게 부를 세습한 과정은 "고도의 경제 행위로서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쯤 될 것이다. (1994년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 등 35명이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됐다. 사건의 주임검사였던 서울지검 공안1부장 장윤석 검사는 '공소권 없음'이란 결론을 내렸는데, 그 사유가 "피의자들이 정권 창출 과정에서 취한 '5·18' 진압 등 일련의 행위는 헌법 질서를 바꾸는 고도의 정치 행위로서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검사는 현재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다.)
옳거니, 이로써 경제대통령은 완전히 '복권'됐다. 비로소 이건희는 치외 법권임이, 사법적으로는 대통령급 임이 증명됐다. 기존 판례와 민주주의 법리를 뒤엎은 사법부의 이번 판결은 1%에도 한참 못 미치는 유사 이건희,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천상의 소리'가 될 것이다. 사법부 가라사대, 어떻게 해서든 증여에 성공하기만 하면 처벌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판결문의 잉크가 척척할 이번 주에 때맞춘 증여 붐이 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문화 대통령의 귀환…성공한 마케팅은 따라할 수 있다
서태지가 온다. 오는 29일 화요일(날짜가 중요한 마케팅의 포인트란다) 서태지의 8집이 발매된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 대중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서태지이지만 그는 여전히 '문화 대통령'의 예우를 받고 있다.
성공한 마케팅은 따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활동 중단과 잠복 그리고 화려한 컴백이라는 대중문화의 드라마틱한 내러티브를 창조한 그의 원천기술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당연히 이 뿐만이 아니다. 처음으로 '코디'를 대동한 패셔니스트, 크로스오버 장르를 대중화한 크리에이터, 저작권 협회를 탈퇴한 개혁가까지 흔히 서태지의 행보는 자유, 창조, 도전 그리고 성공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서태지는 단순히 스타나 대중문화의 분기점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변환적 분기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서태지 이전과 이후로 이념적으로, 사회적으로, 개념적으로 완전히 변모했다. 서태지 이후 이념에 있어 한국은 '자유 배격주의 사회'에서 자유 지상주의(libertarianism·개인을 통제하는 권위를 부정하고 최소 정부를 목표로 자유 경쟁을 전면화하는 이념) 사회로 넘어왔다. 가부장적 마초주의, 획일적 군사주의 문화 유산이 서태지에 이르러 비로소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분명 그가 남긴 미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훌륭한 소수의 엘리트가 나머지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특별한 경제적 자유의 시작이기도 했다.
또 서태지의 창조적 이미지는 그가 창출해낸 부의 수치로 증명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90년대 중반 서태지를 경유하며 우리 사회는 돈이 되는 창조와 그렇지 않은 창조로 나뉘는 사회가 됐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서태지의 도전 역시 철저히 제도 안에만 머무는 도전이다. 그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그는 제도 밖으로 행군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서태지는 특별한 경제적 자유가 창출해낸 부유함을 갖고 제도 안에서 행복한 '문화' 대통령이다. 그가 계속 문화 대통령의 예우를 받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념과 사회의 근본에는 도전하지 않음을 전제되어야 한다.
많이 갔으나 끝내 가지 못했던 바로 그 문화 대통령 서태지가 세월이 하수상한 시점에 귀환한다. 서태지는 컴백 열흘일을 앞두고 자신의 귀환을 'Do you see the lie?'(거짓이 보이는가?), 'Do you see the truth?'(진실이 보이는가?)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What is your choice?'(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소비사회의 문법을 즐기라는 강요다.
각하의 부활…수상한 대통령은 국민을 웃긴다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각하'란 단어는 개그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어떤 단어가 웃음의 소재로 활용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언어적 생명력이 막장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정치 개그는 5공화국 시절에 특히 많았다. 독재 철권 정치의 막장이었다. '각하'와 관련된 개그는 마지막으로 '각하'라는 호칭을 썼던 못 말리던 YS 시절에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각료들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외쳤고, 박정희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김종필이 "각하, 국가보안상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고 보고했고, 전두환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장세동이 "각하, 제가 뀐 것으로 하겠습니다"했다는 썰렁한(!) 얘기다.
언어적 생명력이 다한 줄 알았던 '각하'가 부활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수상하게도 10년 전 유행인 '각하' 개그를 리바이벌하게 만들며 정치를 우습게 만들고 있다.
"각하, 촛불이 심상치 않습니다. / 그 많은 초를 누구 돈으로 샀고, 배후는 누구인지 보고해",
"각하, PD들이 수상합니다. / 떨어진 지지율 PD들한테 손해배상 청구하고 사과하라고 해",
"각하, 경제가 수상합니다. / 허리띠 졸라매고 안 되면 횃불 들라고 해",
"각하, 아고라가 수상합니다. / 세무 조사하고 삼진 아웃 시켜",
"각하, 앰네스티가 수상합니다. / 경찰한테 폭언하면 평화적으로 물대포 쏠 수 있는 거라고 해"
역설적이지만 모든 권력이 가장 끔찍해 하는 것이 바로 웃음이다. 공포는 강력한 지배수단이지만 웃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대통령 둘과 '각하'가 돌아오고 있다. 애초에 기소가 잘못됐다는 판사에 헛웃음이 나고, 소비문화의 권력 집중 현상을 보여주는 서태지에 쓴웃음이 나고, 시대를 역행하는 이명박에 비웃음이 난다. 그렇게 웃어야 한다. 섣부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할 뿐이다.
장마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기분까지 눅눅해지지 않으려면 역시 웃어야 한다. 이번 주엔 웃자. 세상이 함께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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