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 회장과 삼성에 대해 제기돼 온 주요 혐의 대부분에 대해 법원이 '무죄'로 판단하고, 주요 혐의자에 대해서도 집행유예 처분을 내린 셈이다. 특히, 에버랜드 CB 사건에 대해 '무죄'로 판단한 대목은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법학 교수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삼성 고위층이 에버랜드 CB를 편법 증여하는 과정에서 배임 등 다양한 불법 행위가 저질러 졌다고 판단했다.
선고가 이뤄진 16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에 모여 있던 삼성 임원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깃들었다. 하지만 삼성 문제를 오랫동안 파헤쳐 온 전문가와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재판 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판부 "에버랜드 측 손해 입증하는 것은 특검의 몫, 그런데 공소장에 관련 증거가 없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민병훈 부장판사)는 이날 피고인 이건희 전 회장 등에게 형을 선고하기에 앞서, 판결의 배경을 설명했다.
재판부는 에버랜드 CB 편법증여 의혹에 대해 "배임 죄가 성립하려면, CB 발행으로 인해 에버랜드에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 대한 입증 책임은 검사 측(조준웅 특별검사 팀)에 있다. 하지만 특검의 공소사실에는 관련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특검이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으로 인한 회사 측의 손해를 제대로 입증하지 않은 채 공소장을 작성했다는 뜻이다.
삼성SDS BW 저가발행 의혹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일단 "신주인수권 행사 가격을 저가로 설정해 임무를 위배(배임)했느냐를 판단했을 때 BW발행 직전 주식거래 가격이 (특검 기소대로) 5만 5000원이라는 점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판부는 "유통량과 가격 왜곡 가능성이 적다"라는 이유를 들어 "5만 5000원이 객관적 교환가치를 반영한다는 특검의 입증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도 일부만 인정
재판부가 일부 유죄을 인정한 조세포탈 혐의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에 대한 과세규정이 신설되기 이전인 1998년말 이전에 차명으로 주식을 취득하고 양도한 것은 부정한 조세포탈로 볼 수 없지만 1999년 이후의 경우에는 양도차익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더라도 입출금 거래 내역 등을 종합하면 부정한 행위로 봐야 한다"라는 것.
조세범처벌법의 공소시효가 5년인 까닭에, 법원은 지난 2003년 이후의 포탈세액 456억 원에 대해서만 유죄로 인정했다.
이어 재판부는 "삼성 측이 조세포탈 행위를 통해 국가 과세권을 침해하고 조세 정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했다. 또 유죄로 인정된 포탈 세액만도 456억 원에 달한다"면서 "다만 시세차익을 노린 매매이거나 내부정보를 이용한 부정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특검이 이 전 회장 등을 기소하면서 1128억 원의 양도소득세를 포탈한 혐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이 중 일부만 인정된 셈이다.
그리고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이 직접 재산관리를 하지 않고 간략한 개인재산 상황을 보고받았던 것이기는 하지만 양도소득의 귀속 주체로 조세포탈의 수익자일 뿐만 아니라 최상위 지휘감독자라는 점에서 다른 피고인들보다 책임이 무겁다"고 덧붙였다.
이학수·김인주도 집행유예
재판부는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에 대해서는 관련 확정 판결이 있었던 시점을 기준으로 2003년과 2004년도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2년 6월에 집유 5년 및 벌금 140억 원을, 2005~2007년도 조세포탈에 대해서는 징역 2년6월에 집유 5년 및 벌금 600억 원을 각각 선고했다.
김인주 전 사장은 징역 3년에 집유 4년 및 벌금 740억 원, 최광해 전 전략지원팀장은 징역 3년에 집유 4년 및 벌금 400억 원을 선고받았고 에버랜드 CB 사건으로 기소된 현명관 전 비서실장 등 2명은 무죄, 삼성SDS BW 사건으로 기소된 김홍기 전 삼성SDS 대표이사 등 2명은 면소 판결을 받았다.
사제단 "예상된 결과다. 이런 사회에서는 권위와 신뢰가 있을 수 없다"
한편 다양한 비리 혐의가 제기돼 온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해 법원이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에버랜드 CB·삼성SDS BW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 판결이 나오자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삼성 비리 의혹을 주도적으로 제기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김인국 신부는 이날 선고 내용을 접한 직후 "검찰과 특검이 수사 단계부터 제대로 된 수사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만큼 재판 결과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라며 "삼성의 절대권능의 실상을 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삼성 사건에 대한 선고가 이뤄진 7월 16일이) 국민이 승복할 도덕적 권위가 실종된 날이다. 이런 사회는 아무런 권위와 신뢰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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