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여섯 차례 진행된 공판에서 삼성 측 변호인단은 특검의 주장을 날카롭게 반박했다. 반면, 특검은 재판 내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게다가 비리 의혹의 핵심에 있는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최학래 전 <한겨레> 사장까지 나서서 그를 거들었다. 지난 1일 공판에서 이 전 회장은 "세계 1위 제품을 11개나 생산하는 삼성전자를 다시 만들려면 10년, 20년 가지고는 안 된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물론, 아무도 "삼성전자를 다시 만들라"고 주문한 적 없다. 따라서 이 전 회장의 당시 발언은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전형적인 논점 회피 수법이다. 하지만 주요 언론은 '이 전 회장의 눈물'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삼성 비리 혐의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비리 의혹 역시 유야무야되리라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선언 이후 전개된 사태를 유심히 지켜봤던 이들이라면,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애당초 특검의 기소 방향 자체가 잘못됐다는 의견이 나왔다. 사태의 핵심인 '비자금 의혹' 대신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이 전 회장 측에게 죄를 물을 근거가 흐려진다는 설명이다. 재판 과정에서 삼성 측 변호인단이 기세등등하게 굴 수 있었던 계기를 특검이 만들어 줬다는 뜻이다.
오순정 회계사가 이런 의견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오 회계사는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사기나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포탈한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 전 회장 측이 '논점 회피'로 법원을 우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 측의 '논점 회피' 수법은 이 전 회장의 눈물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삼성 측의 이런 시도에 대해 법원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 회계사는 여전히 법원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법원이) 삼성특검 결과가 대국민사기극임을 밝혀내고, 상처받은 4천만 납세자의 아픔을 보듬어 주기를 감히 기대한다"라는 문장으로 글을 맺었다. <편집자>
1128억에 가려진 또 다른 진실
"삼성특검은 임원들 명의의 주식을 팔아 남긴 양도차익 5643억원에 대한 양도소득세(1128억 원)포탈을 확인하고, 이건희 회장 등을 조세포탈죄로 기소하였다.
이것은 특검의 성과라 할 수도 있으나, 차명계좌들이 이건희 회장의 재산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이를 인정하고 조세포탈로 기소하였다는 점은 또 다른 진실의 왜곡이 아닌가 생각된다." (4월 24일자 '삼성특검 수사결과에 대한 법학교수들의 성명서' 중에서)
"차명계좌가 아니라 익명계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익명계좌(차명계좌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차명계좌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들이 이건희 회장의 '상속'재산이라는 증거가 없는 이상 양도소득세(1128억 원) 포탈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면 특검은 왜 무고한(?) 이건희 회장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을까?
익명계좌들이 드러났다는 것은 이건희 회장에게는 그 자체가 치명적인 위기였다. 만일 이 익명재산들이 회사경영에서 조성된 비자금이라면 전액 환수될 뿐 아니라, 이 회장의 파멸을 의미한다. 다행히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익명재산은 반 토막이 되고 말 것이었다.
'수조 원대 증여세' 덮어두고, '천억 원대 양도세' 문제 삼은 이유는?
1998년 이건희 회장과 에버랜드의 명의로 전환된 4조5천억 원의 삼성생명 주식과 현재 임원들 명의로 남아있는 4조5천억 원 등 총 9조 원의 익명재산에 대하여 수조원의 증여세가 부과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특검은 "차명계좌들은 상속재산"이라는 황당한 결론으로 비자금 의혹에 대하여 면죄부를 부여한 동시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세금을 시효소멸의 무덤에 묻어버렸다.
익명 계좌 속 자산이 이건희의 상속 재산이라는 증거가 없다
문제의 재산들이 이 회장의 재산이라는―그것도 '상속'재산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검은 문제의 재산들을 "차명인 상태로 상속받은 재산"이라 단정하였다. '상속'받은 재산이라면 이건희 회장의 취득시기는 1987년이며, 최근 2000년 전후하여 차명계좌들을 다른 사람에 양도하거나 명의변경 하는 경우 그 보유기간에 대한 이 회장의 양도소득세가 성립한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삼성특검은 "상속세는 소멸되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대신 양도소득세 포탈혐의로 기소하여 생색을 낸 것이다.
증거와 결과가 뒤바뀐 재판
과연 그럴까? 굳이 법학교수들의 비판이 아니더라도 특검보고서를 보면, 상속재산이라는 증거라고는 재산 명의자들의 진술―그것도 일관성이 없는 번복된 진술―과 그 진술내용을 이건희 회장이 '인정'하였다는 점뿐이다.
상속재산 여부의 판단은 피의자인 이건희 회장이 증거를 대어 '입증'하고 특검이 '인정'할 일인데, 주객이 전도되어 특검이 '입증'하고 피의자인 이 회장이 '인정'하고 있다. 이것으로 삼성특검은, 비자금의혹을 은폐하는 동시에 채증법칙을 위배하여 증거와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호도함으로써 국민들을 기망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상속세를 내지 않은 재산이 상속재산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100% 명백한 증거가 요구될 수밖에 없으며, 유효한 증거가 없는 이상 무려 4~5조 원에 달하는 증여세를 피할 수는 없다.
조작된 양도소득세, 기만적인 탈세혐의
차명계좌의 원천이 밝혀지지 아니한 이상 차명재산의 매각이나 명의변경은 명백한 증여세 부과 대상이다. 그 밝혀지지 않은 재산의 실체가 회사의 자금인지 이병철 회장의 유산인지 아니면 다른 돈인지는 모르되 그것이 이 회장의 손에 들어온 이상 이 회장이 누군가로부터 증여세 과세 대상이라는 점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명의변경에 대한) 증여세는 시효로 소멸되지도 아니하였다. 사망시점에 성립하는 상속세와는 달리 증여세는 명의를 변경하는 때에 성립되기 때문이다.
증여세 은폐 위한 '상속 프레임', 상속 뒷받침 위한 양도세 포탈
그러므로 특검 결과는 '결과'가 아니라 증거를 만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증여세를 은폐하기 위하여 '상속 프레임'을 고안하고, '상속'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양도소득세 포탈'을 기획한 것이다.
행여나 지금 벌어지는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된다면 가짜 양도세는 진짜가 되고, 조작된 양도세는 상속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줄 것이다.
양도소득세를 취소하고 증여세를 부과하라
과연 삼성공화국다운 발상이다. 이 회장은 지난 5월말 가산세 701억 원을 포함하여 1829억 원의 양도소득세를 이미 납부하였으며, 익명계좌들의 운용에서 발생한 증여세는 확정되는 대로 납부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시나리오'를 모를 리 없는 과세당국이 여전히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작된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에 대한 법원의 '유죄'판결만을 기다리는가. 그러면 그 판결에 터 잡아 상속받은 재산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특검결과대로 양도소득세만을 부과하려는가.
이것이 국세청의 입장이라면 파렴치한 특검에 공조하여 탈세를 비호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달리 이해할 수 없다.
국세청은 법률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뿐, 엉터리 특검 결과에 구속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땅에 떨어진 위상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국세청은 과세권을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
"논점을 회피한 이건희, 국민을 기망하고 법원을 우롱했다"
이 전 회장은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사기나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포탈한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포탈한 세금이 없는데 '사기나 부정한 방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상속 프레임'으로 국민을 기망하더니, 이번에는 논점 회피로 법원을 우롱하려는 터무니없는 수작이다.
법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본다. 삼성특검 결과가 대국민사기극임을 밝혀내고, 상처받은 4천만 납세자의 아픔을 보듬어 주기를 감히 기대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