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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과학', 기독교는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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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과학', 기독교는 거부합니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 <11> '진화 vs 창조' 논쟁을 보는 다른 시각

독자의 관심 속에 진행 중인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세 번째 서신 교환을 시작한다.

신재식 교수가 "종교인은 과학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던 장대익 교수의 질문에 답했다. 신 교수는 '진화 vs 창조 논쟁'에 접근하는 기독교의 입장을 일별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창조 과학'과는 다른 현대 과학을 수용하는 입장을 소개한다. 신 교수는 "이런 접근이 바로 주류 현대 신학자의 입장"이라고 밝힌다.

신재식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 드루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존 템플턴 재단 '과학과 종교 교육 프로그램' 연구자, 풀브라이트 초빙 교수를 지냈다. <생태학과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쓰고, <근대 신학의 이해>,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을 옮겼다.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오래 전부터 깊은 고민을 해온 목사이다.

이 글의 초고는 2007년 3월 작성되었다. <편집자>

김윤성, 장대익 선생님께

봄날 햇살이 점점 더 따갑게 느껴집니다. 학기 시작과 더불어 몸과 마음이 다소 바빠졌습니다. 강의와 글쓰기, 설교와 예배, 온통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일상입니다. 종교에 푹 담긴 느낌을 가지고, 지난 편지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그리스도교의 과학 보기'를 이어 가지요.

이번 편지에서는 논의를 한 단계 진전시켜 무신론에 오염된 현대 과학에 맞서 '유신론적 과학'을 주장하는 입장과, 현대 과학을 수용하면서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재규정하려는 현대 신학의 시도를 살펴볼까 합니다. 지난 편지가 '그리스도교의 과학 보기'를 멀리서 조망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과학의 정의와 방법론, 과학적 환원주의, 과학 법칙의 본질 등의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교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가까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종종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고는 하는 '창조 과학'이나 '진화 vs 창조 논쟁'에서 창조론 진영을 새롭게 대변하는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가 전자에 해당됩니다. 후자는 주류 현대 신학자들의 입장입니다.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인 존 호트(John Haught)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를 통해서 이 문제를 보려고 합니다. 둘은 각기 다른 국적에 다른 그리스도교 배경을 지녔는데, 이 분야의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들이지요.

'무신론적 과학'은 '참' 과학이 아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과학 보기
▲진화 논쟁을 다룬 <타임>의 표지. ⓒ프레시안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하나로 묶어서 말한다면, 각 이론의 지지자들은 불편해 할지도 모릅니다. 이 둘은 '창조가 언제 이루어졌느냐?', '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주류 과학을 '무신론적 유물론'의 포로라고 비판하고, 초월적 존재의 '설계'를 용인하는 '열린 과학 철학'을 주장하며, 현대 과학의 대안으로서 '유신론적 과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창조 과학은 진화론 전체를 부정하고, 지적 설계는 부분적으로 수용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진화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이들은 고전 다윈 이론에 유전학이 결합된 '신다윈주의(neo-Darwinism)'와 이후 계통학, 고생물학, 집단 유전학 등이 결합한 '근대 종합설(modern synthesis)'이나, 최초의 생명 형태가 순수하게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작용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화학 진화'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지요.

이들이 진화론에 문제 제기를 할 때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을 부분적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더 중요한 논의의 전거는 명시적으로나(창조 과학) 때로는 묵시적으로(지적 설계) 성서입니다. 중세의 신학자들처럼 성서가 지식의 주된 원천인 거지요. 어쩌면 성서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식의 원천이고 지식 판별의 기준일 겁니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성서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과학 지식이 성서의 주장과 모순되는 경우 과학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리스도교와 과학 사이에 진화-창조 논쟁이 발생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무신론적 자연주의의 포로가 된 진화론에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설계된 창조,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지적 설계는 현대 과학의 여러 성과들을 수용하지만 다윈주의 진화론만은 거부합니다. 이들은 기존의 다윈주의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며, 과학적으로도 이미 파산한 이론이라고 단언합니다. 지능을 가진 설계자, 초월적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생명의 기원, 더 나아가서는 우주와 시간과 공간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윌리엄 덴스키. ⓒ프레시안

지적 설계는 자신들의 논증을 위해, 현대 우주론과 물리학, 수학과 정보 이론 등에서 나온 과학적 자료를 사용합니다. 지난 편지에서 언급한 '인류 원리'도 많이 애용되는 사례지요. 윌리엄 뎀스키(William Dembski)라는 이의 주장을 예로 들어 보지요.

그는 우주의 역사는 120억 년(1025초) 정도 되고, 이 우주 안에 들어 있는 소립자의 수가 1080개이고, 어떤 한 가지 물리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는 초당 1045회를 넘어설 수 없다고 할 때, 어떤 사건이 우주에서 일어날 확률은 1080 X 1045 X 1025 = 10150분의 1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보다 적은 확률로 일어날 사건은, 예를 들어 10200분의 1, 101000분의 1의 확률을 가지는 사건들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10150분의 1이라는 확률은 '우연'과 '설계'를 판정하는 기준(확률 경계)이 되지요. 이 확률보다 작은 경우 정보 이론으로 환산하면 정보량이 495비트 정도가 됩니다. 이 정도 복잡한 정보는 절대로 그 정보의 의도적 설계자 없이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500비트 이상의 정보를 담고 있는 DNA 같은 복잡한 분자는 절대로 어떤 설계자의 도움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지요. 뎀스키는 이것을 "복잡하고 특정화된 정보(CSI)"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복잡하고 특정화된 정보'의 생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현대 진화론은 틀린 것이다." 현대 과학의 모순과 난점을 간단하게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해 버립니다. 이것이 뎀스키의 지적 설계가 확률과 정보 이론을 통해 설계의 과학성을 증명하려는 일반적인 논증 방식입니다. (물론 뎀스키의 논증에 대한 수학적, 과학적 비판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지요.)

지적 설계자를 용인하는 '유신론적 과학'

그런데 지적 설계가 당혹해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진화론의 오류를 '과학적으로' 증명했고, 생명체가 설계된 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했어도, 주류 과학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지적 설계는 그 이유를 주류 과학자들이 은밀하게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찾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주류 과학이 무신론적 자연주의에 형이상학적으로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진화론의 오류나 설계의 과학성에 무관하게 설계나 설계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초월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주류 과학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따라서 주류 과학을 떠나 지적 설계자를 용인하는 새로운 과학을 시도하며, 그것이 바로 '지적 설계'라고 주장합니다. 지적 설계는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으로, 현재 다윈주의 과학과 서로 경쟁하는 강력한 과학 이론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설계자를 허용되는 과학을 '유신론적 과학'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보면, (창조 과학을 포함해서) 지적 설계가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의 핵심에는 종교적 신념이 놓여 있습니다. 과학 작업 안에 초월적 존재자를 도입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신론적 과학'을 구축하려는 사람들은 '과학 철학'을 논쟁의 마당으로 삼습니다. 지적 설계론이 문제 삼는 것은 '현대 과학의 정의' 자체입니다. '과학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는 핵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지적 설계가 제기하는 논쟁의 핵심 문제는 '과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이며, '비(非)과학이나 사이비 과학으로부터 과학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입니다.

지적 설계는 유신론적 과학을 확립하기 위해, 주류 과학이 확신하는 과학 지식의 보편성, 객관성, 가치중립성은 실증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의 과학관일 뿐이며 잘못된 신화라고 주장합니다. 대신 이들은 토머스 쿤, 칼 포퍼, 폴 파이어벤트 등의 과학 철학에 관련된 논의를 차용하면서, 설계를 허용하는 '열린 과학 철학'을 주장합니다. 물론 말씀드린 과학 철학자들이 유신론적 과학을 구축하기 위해 과학의 보편성, 객관성, 가치중립성을 공격한 것은 아니지요.

이런 논의에서 지적 설계는 현대 과학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공격합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과학에서 과학적 기술과 설명이나 이론에서 초자연적인 요인에 의존하거나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 입장이지요. 이들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전제로 채용하는 현대 과학은 유물론적 자연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신(神) 또는 초월적 존재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애초부터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이러한 과학 철학에서 빌려온 개념들과,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유신론적 과학'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이 유신론적 과학을 가지고 지적 설계는 지적 설계자의 존재와 그가 남긴 흔적을 논리적으로 실증적으로 검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지요. 신, 창조주, 조물주, 지적 설계자 같은 초자연적, 초월적 존재가 과학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과학 철학 쪽으로 나 있는 뒷문을 슬쩍 여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유신론적 과학'은 주류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해당하는 두 가지 대응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엄청난 능력과 지성을 가진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존재인 신(神)이 1차적인 직접 원인과 2차적인 간접 원인을 통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설계하고 창조했으며, 인간 등장 이전에도 이 세계의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의 설계와 창조의 개념을 과학 작업의 수행과 과학 방법론에서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신론적 과학의 이런 전제는 다음과 같은 신앙 태도와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설을 세우고 시험하고,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다양한 가설들의 개연성을 평가할 때,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야 하고 또한 자신의 판단에 대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이 동원해야 할 모든 지식에는 신학적 진술도 포함된다는 것이지요.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성서는 과학 텍스트이며, 성서의 진술이 '참 과학(true science)'이지요.

신앙에 근거한 유신론적 과학을 무신론적 유물론에 근거한 다윈주의 과학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진정한 '참'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의 이런 주장은 미국 보수주의 교회에서(종종 한국 보수주의 교회에서도) 상당히 설득력 있게 먹혀 들어갑니다. 이들에게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지지자들은 무신론적 세계관과 싸우면서 '창조론'을 지키는 신앙의 투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유신론적 과학, 그들만의 리그

그러나 저는, 현대 과학을 '유물론적 자연주의'나 '무신론적 자연주의'의 '포로'라고 보는 이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과학 작업의 핵심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며, 이것과 '유물론적 자연주의'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또한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배제한 과학은 이미 과학이 아닌 다른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는 '유물론적 자연주의'를 배척하고 '유신론적 과학'을 구축하려는 과정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마저 내던져 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열린 과학 철학'을 통해 유신론적 과학을 확립하려는 시도는 과학적 동기에서 출발한 게 아닙니다. 종교적 동기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시도를 어떻게든지 과학이라고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념에 근거한 '신앙'의 발현이지 과학 작업은 아니라고 봅니다. 비종교인이나 무신론자, 또는 유신론 전통에 속하지 않는 불교와 같은 세계 종교 전통에 속한 사람이 유신론적 과학을 주장하는 것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일부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만이 뛰는 '유신론적 과학'은 그냥 '그들만'의 '참 과학'이지 '모두'의 '과학'은 아니죠!

야구 선수들이 축구 경기장에 와서 축구 선수들에게 축구공만으로 충분치 못하니 야구 배트를 도입하고 야구 규정대로 경쟁하자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유신론적 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야구 선수들입니다. 자신들의 규정을 관철시키고자 억지를 쓰는 사람들이죠. 아직까지도 현대 과학은 무신론자부터 불가지론자, 다양한 전통의 종교인들이 함께 같은 규정 아래서 함께 논의하는 마당이죠. 이와 달리 '유신론적 과학'은 '그들만의 리그'일 뿐입니다!

종교와 과학, 심층적 우주 읽기를 위한 독법들 : 존 호트의 과학 보기

한국 사회에서는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현대 그리스도교 과학관의 주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말이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는 주류가 아닙니다. 이제 진화론을 비롯해서 현대 자연 과학을 수용하는 주류 신학계가 현대 과학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좀 더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설명의 다윈주의'를 통해 과학적 환원주의를 넘어서서 생명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시도하는 존 호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존 호트. ⓒ프레시안

존 호트는 현대 과학 특히 진화론과 대화하면서 다윈 이후의 '진화론적 신학'을 적극 모색하는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과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30여년 가까이 신학과 과학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워싱턴 D. C.에 있는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 '생태 신학', '진화론적 신학'에 관련된 10여 권의 저서는 그가 진화론에 가장 정통한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라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윈 안의 신>,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같은 책들이 번역 출간되어 있지요.)

호트가 과학을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죠. 그는 종교와 과학의 두 담론을 일종의 '독법(text reading)'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합니다. 그는 종교와 과학을 우주를 읽는 중층적 독법(讀法)으로, 즉 서로 다른 수준의 책 읽기로 이해하면서 둘 관계를 해명하려고 하지요. 종교는 서사적인 양식을 통해 우주에서 질(質)적인 의미를 읽어 내고, 과학은 자연을 양(量)적으로 읽어 내는, 각각 독자적인 독법인 것이죠. 종교와 과학은 동일한 우주를 서로 다른 수준(level)에서 다른 방식으로 읽어 내는 독립된 담론인 겁니다.

그런데 호트는 하나의 독법만으로, 즉 오직 한 가지 차원에서 우주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주장을 '문자주의적 독법'으로 규정합니다. 문자주의적 독법의 특징은 다른 독법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무시합니다.

문자주의적 자연 읽기를 넘어서

호트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은 양쪽 모두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오직 한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문자주의적 독법'을 강요할 때 발생합니다. 그는 창조 vs 진화 논쟁도 바로 이 '독법의 문제'를 둘러싼 두 문자주의 대립 때문으로 봅니다. 이 논쟁 양극단에 있는 두 문자주의가 바로,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의 '성서적 문자주의'와, 진화 생물학의 '우주적 문자주의'이지요. 두 문자주의 모두 우주와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을 단순하게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1차원적 독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각기 '교리주의적 환원'과 '물리주의적 환원'을 그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리주의적 환원을 특징으로 하는 독법을 '종교적 문자주의'로, 물리주의적 환원을 속성으로 하는 독법을 '과학적 문자주의'라고 부릅니다.

먼저 호트가 '성서적 문자주의'로 부르는 '종교적 문자주의'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만 하지요. '종교적 문자주의'는 자연을 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에 근거한 특정한 신학적 이해로 환원시킵니다. 이들은 자연의 겉모습에서 나타나는 '설계'에만 관심을 갖고, 그 이면을 뚫고 들어가 생명의 기나긴 투쟁이라는 복잡다단한 진화 이야기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그런 종교적 사고일 뿐입니다. 이런 신학적 독법은 다윈이 그린 생명에 대한 그림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수많은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취하는 반(反)다윈주의적 행보는 자연의 깊이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한마디로 다윈주의적 자연 읽기를 배제한 종교적 자연 읽기는 자연을 결코 제대로 '깊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한편 '성서적 문자주의'의 반대편에는 '우주적 문자주의'가 있습니다. 호트는 우주적 문자주의 역시 성서적 문자주의처럼 자연이 가지고 있는 깊이를 부정하면서, 단지 그 표면만을 살짝 건드리는 데 그친다고 주장합니다. 지적으로는 흥미로울지 모르지만 영성이나 윤리적 열망이 설 자리를 거의 남겨 두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우주적 문자주의 역시 우주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유물론적 관점에서 읽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주적 문자주의로 비판하는 대상은 '진화론적 환원주의'를 주장하는 무신론적 진화론입니다.

호트에 따르면, 진화론적 환원주의의 형태로 드러나는 우주적 문자주의는 심지어는 영성이나 윤리적 열망의 보루인 종교조차 자연화시켜 버리고 맙니다. 초월자에 대한 신앙, 이타성 같은 정신적 요소들이 진화 과정의 부산물이라든지, 종족 번식과 생존 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한 진화적 수단이라든지 하는 것으로 환원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결국 '윤리', '영성', '종교', 그리고 '신'은 유전자의 산물일 뿐입니다. 아니 부산물이라고 해야 할까요?

산물이 되었든, 부산물이 되었든 이것은 형이상학적 유물론입니다. 철저하게 유물론적 측면에서 생명과 종교마저도 동일하게 읽어 내는 것이지요. 결국 모든 현상을 동일한 특정 요인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하는 환원주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것은 '우주적 문자주의'라는 독법에서 생기는 문제이고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생명 현상이 한 가지 수준에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는, 그것도 화학적 또는 물리적 수준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과학적 문자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문자주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호트는 이 환원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다른 어떤 과학자의 주장이나 증명보다, 한 사람의 신학자로서 호트의 이 주장에 동의합니다.

저는 사물이나 생명에 관한 설명에는 다양한 수준의 설명이 있으며, 이것들은 상보적이며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확고히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제 입장은 '설명의 다원주의(explanatory pluralism)'에 토대를 두고 있지요. 저는 이 개념과 우주에 대한 비환원론적 인식이 바로 종교와 과학이 공통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는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설명의 다원주의와 설명의 계층 구조

'설명의 다원주의'의 핵심 개념은 '설명의 계층 구조(the hierarchy of explanations)'입니다. 이것은 사물에는 다양한 수준의 설명이 가능하며 각 설명은 다룬 수준에서 적절한 설명의 위상을 갖는다는 개념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서 설명의 계층 구조를 말씀드리죠.

두 분 선생님들께서 승용차가 길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지요. "왜 저 차가 움직이고 있지?" 하고 물어본다고 하지요. "자동차 바퀴가 구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은 하나의 수준(a level)에서 좋은 대답입니다. "엔진에서 연료가 연소해서 피스톤과 구동축을 움직이기 때문이다."라는 대답 역시 다른 수준에서 동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좋은 설명입니다. "철호가 운전하고 있기 때문이다."도 여전히 다른 수준에서 있을 수 있는 대답입니다. 또 다른 수준에서는 "철호가 학교에 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언급한 모든 설명은 그 각각의 수준에서 뜻이 잘 통하며, 어떤 설명 하나로 다른 설명을 대치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설명 하나하나는 서로 모순되거나 경쟁하지 않으면서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이중에 어떤 것이 더 나은 설명인지는 맥락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질 뿐, 미리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설명들을 함께 고려할 때, 각각 대답이 제공하는 것보다도 더 풍부한 설명을 구성합니다.

설명의 다원주의는 유물론적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환원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유기적 세계상을 통전적(統傳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와 일관성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과학'만'으로는 충분치 않는가를 보기 위해 다시 호트의 '독법'으로 돌아가지요. 조정래 선생님의 소설 <태백산맥>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지요.

'설명의 계층 구조'를 이 소설책에 적용한다면, 적어도 세 가지 수준의 설명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수준은 화학 법칙으로 그 법칙은 잉크가 종이에 붙어 있게 합니다. 두 번째 중간 수준의 설명은 한글 철자와 단어, 문법 등으로 구성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수준은, 소설에서 구체적인 정보나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서, 단어와 철자, 문법과 선호를 배열함으로써 소설을 통해 전달하려는 의미의 내용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을 때, 흰 종이 위에 붙어 있는 검정 잉크의 반점들을 보고 있겠지요. 만약 한글을 읽지 못하다면, 제가 보는 것은 단지 이해할 수 없는 검정색 흔적뿐입니다. 이 때 저는 이 소설에 담긴 정보의 내용을 놓치게 됩니다. 화학은 어떻게 잉크가 종이 위에 붙어 있는가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화학 수준의 설명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보다 깊은 수준의' 의미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를 깊은 수준의 이해를 위한 설명으로 이끌어 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글을 알기에 (또 전라도 사투리와 한국 근대사를 알기에) 이 소설이 주는 의미를 깊은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경우 소설에 담긴 정보, 즉 조 선생님이 전달하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소설의 내용은 잉크가 종이에 붙어있게 하는 화학 법칙을 방해하지도 왜곡하지 않으면서 말없이 그냥 나타납니다.

진화 과학을 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합니다. 진화 과학은, 종교가 생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생물학적 현상에 포함된 물리적이며 화학적 사건을 기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의식이 있는 살아있는 존재가 등장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가능성들은, 그 정보적 내용이 화학적 또는 물리적 분석의 수준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진화에서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진화 과학은 의미의 궁극적인 근원으로부터 우주를 존재하게 했을지도 모르는 더 깊은 '정보적' 차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이 현실화된다고 해서, 과학법칙을 위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책에 기록된 정보(소설 내용)가 잉크와 종이의 화학 법칙을 위반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므로 진화 과학이 생명을 물리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이게 유물론적 진화론을 바라보는 호트의 기본적인 시각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과학 역시 생명에 대한 설명의 계층 구조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신학적 설명과 과학적 설명은 이 계층 구조에서 각기 다른 수준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신학적 설명이 과학적 설명을 대신하거나 '더 나은' 설명이며, 다른 과학적 설명과 '경쟁하는' 설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생명에 대한 화학적, 생물학적, 유전학적, 진화적 설명은 신은 우주가 엄청나게 창조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기를 원한다는 신학적 설명을 폐기하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신학적 설명은 과학적 설명이 놓치는 정보를 더 높은 수준에서 더 깊은 의미의 차원까지 읽어낸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는 종교와 과학을 설명의 계층 구조를 통한 의미의 수준과 깊이라는 측면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영역과 범위라는 측면에서 신학과 과학에 접근하는 판넨베르크로 넘어가지요.

신학과 과학, 우발적인 세계를 보는 두 시각 : 불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과학 보기

앞서 저는 사물이나 생명 현상에 대한 유일한 정확한 설명이라는 도킨스와 같은 강성 과학주의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지요. 과학은 인간이 사물과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시도하는 여러 가지 설명 중에 강력하고 유효한 설명의 한 가지라는 데에는 공감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고 완전하다는 과학적 환원주의 설명에는 입장을 분명히 달리합니다.

이제 여기에서는 과학 법칙 역시 우발성에 기초해서 우발성에서 규칙성을 도출한 것이라는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생각을 독일의 대표적인 개신교 신학자인 판넨베르크의 이야기를 빌어 말씀드리죠. 1928년생인 그는 2차 대전 이후 과학자들이 제시한 과학의 지식사회학적 차원을 검토하고 비판하면서, 1960년대부터 신학과 자연 과학의 대화를 시도해 왔으며, 보다 본격적인 이 분야의 글들이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나왔습니다.

2001년에는 한국 학술 협의회가 주관하는 석학 연속 강좌 강연자로 내한해서 신학과 과학의 주제에 관해서 강연과 세미나를 했지요. 저도 공개 강연 하나에서 논찬과 통역을 맡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고집 세고 지기 싫어하는 시골 노인의 풍모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토론의 마무리는 늘 자신이 하려고 했던 것도 말이죠.

보편 학문으로서 신학: 신학과 과학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태곳적부터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 그림에서 창조주는 수리 과학의 상징인 컴퍼스를 들고 있다. ⓒwikipedia.org

판넨베르크는 종교와 과학을 '왜'와 '어떻게'를 다루는 다른 담론으로 분리시켜 보는 현대 신학적 입장에 아주 비판적입니다. 신학과 타학문의 분리 불가능을 주장하기 때문이죠. 그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관심을 인간의 경험과 역사에 한정함으로써 다른 학문이나 실제 세계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자연 과학으로부터 신학을 완전히 분리함으로써, 신학의 과학으로부터 소외를 초래하고 과학이 제기한 지적 문화적 도전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담론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반성 속에서 그는 신학이 자연 과학과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장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에게 신학은 하나의 '보편 과학'입니다. 신학이 개인의 신앙 고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한 일반 학문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이지요. 이런 신학은 객관적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역사의 지평에서 의미 있게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렇게 '역사'를 신학의 영역으로 가져오면서 '역사로서 나타난 계시'를 강조한 신학자입니다.

판넨베르크의 과학에 대한 견해는 그리스도교가 자연 과학을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신학이 과학 자체를 보는 관점과,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출발점은 역시 창조주로서 신입니다. 신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실재로서 장(場, field)을 구성하며,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 장에서 나오며, 자연과 역사의 모든 우발성 역시 그 장 안에서 나옵니다.

만일 성서의 신이 우주의 창조자라면, 그 신을 언급하지 않고 자연 과정들을 완벽하게, 혹은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치 않다. 역으로 만일 자연 과정들이 성서의 신을 언급하지 않고도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신은 우주의 창조주가 될 수 없을뿐더러, 결국 그 신은 진정한 신이 될 수도 또한 윤리적으로 가르침의 근원으로서 신뢰받을 수 없을 것이다.(<자연신학> 37쪽.)

이렇게 신을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실재"로 이해하면, 인간의 모든 경험 영역이나 탐구 분야에서 신을 배제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지요. 신학이 이런 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신학은 필연적으로 신을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이 대상으로 삼는 자연까지 결정하는 힘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가 보기에, 신학은 자연 과학뿐만 아니라 어떤 학문 분야와도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긴밀한 연관성을 갖게 됩니다.

그는 이런 신 개념을 토대로 신학의 세계관과 자연 과학의 세계관은 서로 배타적이거나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공명(consonance)'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공명'은 둘 사이의 관계가 모순되지 않으면서, 모순을 넘어서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긍정적 관계를 말합니다. 신학과 자연 과학은 실재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서로 필요한 것이며, 그 방법에 있어서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과 자연 과학의 관계를 공명으로 파악하는 판넨베르크는 이 두 분야가 동일한 실재를 다루고 있으며, 둘 모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에 대해 인식론적인 주장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즉 자연을 신의 창조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신학적 해석이, 물리학이나 다른 자연 과학과의 경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신학과 자연 과학을 '공명'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실재의 우발성과 규칙성에만 머무는 과학 vs 실재의 총체성과 통일성을 포괄하는 신학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은 모든 것의 실재이기 때문에, 이 신을 다루는 신학이나 자연을 다루는 과학이나 다루는 대상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과학이 객관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대상이 바로 이 실재의 '부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과학은 실재의 '부분들'을 오직 그것들 서로의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오직 일반적인 법칙으로 기술 가능한 것만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지식 체계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학은 실재의 부분들 가운데 구체적이고 우발적인 특징에 관심을 갖고 그 우발성과 법칙과 같은 특징들을 가장 포괄적인 맥락에서 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학적 관점은 세계의 실재성을 신적 행동의 결과이며 표현으로 보고, 그것을 유일하고 비가역적인 역사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이와 달리, 자연 과학은 세계의 실재를 자연 현상으로 이해하고 그것의 규칙성에 관심을 갖고 수학적 형태로 기술하는 것입니다. 자연 세계를 역사적 유일회성과 역사적 비가역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신학적 접근과, 시간과 공간을 일정하게 연속된 시공간으로 생각하고 기하학적으로 계산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접근하는 과학적 접근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러한 접근의 차이로 인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실재로서 신에 대해 진술하는 신학은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실재의 측면까지 다룬다고 주장합니다. 신학이 '실재의 전체성'에 관련된 반면, 과학은 실재가 지닌 일반적이며 법칙적 특징만을 기술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넨베르크는 신학과 자연 과학의 관계를 동일한 한 실재의 두 측면에 접근하는 서로 대등한 방법론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학이 실재의 전체성에 관심 갖고, 자연 과학은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실재의 부분들이 지닌 규칙성에 관심을 갖는다고 이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신학이 자연 과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신학은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실재의 영역을 더 포괄적으로 다루게 됨으로써, 실재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확장하고 심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재에 대한 신학적 설명과 과학적 설명은 그 범위(scope)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판넨베르크가 신학이 과학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범위를 다룬다고 하면, 어떤 방식으로 신학이 과학적으로 기술된 현상을 포함하고 있을까요? 그는 이것을 "우발성과 자연 법칙"으로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발성과 자연 법칙의 관계를 이해할 때, 자연 법칙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과는 반대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판넨베르크는 자연 법칙은 논리적으로 법칙을 적용하는 데 필요한 우발적인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가 자연 현상을 법칙으로 기술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이미 우발적인 조건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지적합니다. 이것은 사건의 결과가 유사성이나 구조적 규칙성을 보여 준다 할지라도, 모든 사건들이 일차적으로 우발적이라는 가정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판넨베르크는 자연 법칙을 우발성을 기초로 발생하는 자연 과정 속에서 특별히 통일성을 서술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연 법칙은 우발적인 사건들을 시간의 과정을 생략하고 그 사건들 사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규칙성과 통일성, 구조적 단일성을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의 공식들은 자연 현상이 지니는 우발성에도 불구하고, 그 현상들 속에서 발생하는 균일성을 공식화시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자연과정을 기술하는 작업의 독특한 특성이 이 법칙적인 측면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신학, 과학의 한계를 품다?

신학자인 판넨베르크가 보기에, 자연 과학은 자연의 실제 과정을 완벽하고 철저하게 기술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연 과학은 우발적인 사건들을 공식화시킨 결과인 법칙성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연 과학의 법칙성들이 상당한 정확도로 현실을 기술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근삿값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 법칙의 이런 성격을 자연 과학이 지닌 한계라고 평가합니다.

그는 신학적 서술만이 과학의 자연 법칙이 추상화 과정에서 놓친, 사건의 우발적 연속성을 파악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신학적 관점은 모든 사건을 유일회적이며 비가역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고, 그 우발성과 독특성에 관심을 갖습니다. 물론 그가 자연 사건에 대해 규칙성의 관점과 우발성의 관점에서 각각 서술할 때, 두 가지 다른 과정의 사건을 서술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과정이 일반 법칙을 통해 기술될 수도 있고, 또한 역사적 연속체 속의 개별 사건으로서 기술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두 가지 기술 방식, 즉 신학적 기술과 과학적 기술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요. 역사적 기술방식을 취하는 신학적 접근은 개별 사건의 연속성과 그와 관련된 국면들에 대해 보다 많은 총체적 정보를 전제하는 반면, 법칙을 통해서 동일한 연속을 기술하는 과학적 접근은 개별 사건과 비교 가능한 다른 연속적인 개별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 과학과 신학의 차이를 규칙성과 우발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구별하는 판넨베르크의 논의는 좀 더 포괄적이고 자세히 전개됩니다. 이 편지에 주제인 그리스도인이 과학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련해서 이 정도만 말씀드리고, 핵심만 요약해 드립니다.

신학은 일차적으로 자연 현상이 우발적 국면을 지니고 있다는 데 관심을 갖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자연 현상들은 신의 자유 행위에 따르는 일회적이고 비가역적 사건으로, 그래서 우발적 사건입니다. 이와 달리, 자연 과학은 비록 우발적으로 주어진 사건들을 대상으로 그것들에 의존해서 법칙 개념 자체를 적용하는 것이지만, 그런 전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으로 자연 과정이 지닌 규칙성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둡니다.

이렇게 자연 과학과 신학은 모두 동일한 우발적인 사건을 다루지만, 규칙성과 우발성이라는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우발적인 사건을 규칙적으로 공식화한 자연 법칙을 다루는 자연 과학과, 신의 활동에 의한 우발적 결과라고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신학은 서로 모순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판넨베르크는 오히려 자연 현상을 결정하는 힘을 지닌 신을 대상으로 하고 그 실재의 총제성에 관심을 갖는 신학이, 총체성의 일부분인 법칙성을 다루는 자연 과학보다 더 넓은 외연을 지니고 있으며, 우발적인 사건이 지닌 의미에 대해 보다 완전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실재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필연적으로 완전하지 않으며, 실재의 어떤 부분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이해가 아무리 정확하거나 진실하거나 관계없이 신학적 관점이 항상 요구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신학과 과학의 관계 규정에 대해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자연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과 이성이라는 중세의 구성물을 현대적 방식으로 다시 구성하면서, 신학 안에 역사와 자연을 포괄하고자 합니다. 제가 보기에, 신학을 인식 가능한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토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학을 '학문의 여왕'으로 주장하던 과거 스콜라적 신학 작업의 현대판입니다.

물론 신학자로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만. 역시 판넨베르크는 서구 신학자로서 그 전통에 몸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판넨베르크가 신학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과거와 다릅니다. 이전에는 신학이 '구원'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자연 과학을 비롯한 타학문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지요. 즉 신학의 우월성의 근거가 '주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와 달리 판넨베르크는 신학의 우월성을 영역의 포괄성, 즉 '범위'와 관련시켜 주장합니다.

이렇게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철저하게 신학을 중심으로 전개한다는 점에서 그는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범위의 관점에서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종교와 과학을 '의미의 영역'과 '사실의 영역'으로 구별하던 기존의 관점을 넘어선 그의 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에 대해 처음 언급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을 유형론적 범주에 적용시킨다면, 갈등, 분리, 접촉, 통합이라는 바버의 분류에 따르면 아마 '통합'에 해당할 겁니다. 자연 과학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한 그리스도교 중심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교의 과학 다시보기: 일치주의, 적응주의, 포괄주의 사이에서

외부자의 시선으로 과학을 바라보고 말한다는 것은 딜레마입니다. 과학을 모르면서 과학을 말한다는 것이 적절치 않지만, 안에서는 보지 못한 것을 밖에서는 볼 수도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자연 과학자들이 자신의 시선에서 종교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듯이, 다른 이들이 과학을 어떻게 보는가가 과학자들 자신의 작업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과학을 어떻게 보는가를 말씀드리다 보니 너무 많은 길을 돌아온 것 같습니다. 앞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과학을 보는 그리스도교의 시각은 과학자가 종교를 보는 관점만큼이나 아주 다양합니다. 역사에 따라, 장소에 따라, 그 그리스도인이 어떤 신앙 전통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다 다릅니다.

앞에서 과학 혁명과 진화론의 등장 이후 과학을 비판적으로 보며, 심지어는 유신론적 과학을 재구축하려고 하거나, 신학의 관점에서 과학을 새로 정의하는 입장들을 살펴봤습니다. 이와 달리 주류 그리스도교 일부는 과학 자체를 종교와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한 것으로 규정하고 과학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기도 합니다. 개신교의 신정통주의가 대표적인데, 이들을 과학은 자연의 영역을,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감정, 역사, 도덕과 윤리를 담당하는 별개의 분야로 생각했습니다. 현대 과학 자체를 문제시 삼지 않았고, 과학에 수동적 태도를 취하면서 신학적 논의에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 심문을 받는 갈릴레오. 크리스티아노 반티(Cristiano Banti) 1857년 그림. ⓒ프레시안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과학의 지식들을 수용하면서, 신학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 첫 편지에서 언급한 과학자-신학자(scientist-theologian)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현대 과학의 성취를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들을 다시 해석하고 구성한다는 측면에서 과학에 대해 두 가지 다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고 더 깊은 의미의 영역까지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면에서 보면 과학에 대해 적극적입니다. 이와 동시에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현대 과학 지식 자체에는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한다는 측면에서는 수동적 또는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을 중심으로 과학과 관계 규정하는 판넨베르크는 과학에 대해 가장 적극적이지만 비판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신학자나 과학자-신학자들이 자연 과학적 견해를 중시하는 하는 것과 달리, 그는 과학 작업 자체가 신학의 범주 안에 있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의 고유한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보고 규정하려고 그의 시도는 그리스도교와 자연 과학의 대화를 신학지식과 과학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교의 과학에 대한 태도들을 몇 가지 범주로 이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치주의, 적응주의 또는 구성주의, 포괄주의가 그것입니다. 지나친 일반화나 범주화가 가져올 위험을 알지만, 과학을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구분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일치주의는 신앙에 과학 지식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로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가 과학을 보는 태도에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적응주의 또는 구성주의는 현대 과학의 지식을 수용하면서 과학 지식에 맞추어 신앙의 내용을 새롭게 다시 구성하려는 흐름에 해당합니다. 과학자-신학자를 포함한 주류 그리스도교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물론 현대 과학을 받아들이지만, 종교와 과학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랭던 길키와 같은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이나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진화 생물학자들에게 이런 명칭은 해당되지 않겠지요.

마지막으로 포괄주의는 판넨베르크와 같은 시각에서 과학을 바라보는 입장입니다. 현대 과학을 수용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과학 자체를 포괄 또는 포용하려는 시도들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본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까,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조 vs 진화 논쟁이 그것입니다. 이 주제는 신학자인 저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과정, 한국 그리스도교가 초기에 진화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도 다음에 다루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의 '유신론적 과학'에 대한 주류 과학계의 반응이나 '열린 과학 철학' 논쟁(?)에 관련해서는 과학 철학을 전공하신 장 선생님의 자세한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마침 창조 과학 전시관이 서울 어디에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장 선생님께서 귀국하시면 함께 들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봄볕 가득한 날입니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에도 오늘처럼 햇살이 가득 비추었으면 좋겠습니다.

2007년 3월 20일

빛고을(光州)에서
신재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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