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평안해야 할 일요일 오후에…
6월 29일 일요일 오후 4시께 나는 길음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촛불 집회가 벌어질 광화문 도심으로부터는 거리가 먼 부도심이었던 그 곳에서 도심 쪽으로 경찰 버스가 열을 맞추어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교통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된 경찰 버스 안에는 경찰들이 피곤한 기색으로 의자에 기대 잠을 청하고 있었다. 피곤에 지친 경찰도 곧 세종로에서 만나게 될 터. 꿀맛 같은 휴일에 숙소에서 개인정비를 하면서 휴식을 누려야할 20대 초반의 경찰들이나,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고 있어야 할 필자나 둘 다 이러한 원치 않는 상황에 욕 밖에 나오지 않는다.
"군홧발에 짓밟힌 20대 여성" "살기 위해 굴렀다"
"강경진압 對 극렬저항…80년대 시위현장 방불"
"전경 112명 부상"
"민변 변호사 '경찰 살인미수 혐의로 고소하겠다'"
포털사이트에 뜬 기사 제목이다. 촛불 집회의 향방이 어디로 치닫는지는 이 기사 제목으로 충분히 설명되겠다. 이명박 정부는 과연 어디까지 파국으로 몰고 갈까?
최장집 교수가 얼마 전 거리의 정치는 이제 충분하다며 정당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 글에서는 직접 민주주의와 정당 민주주의의 경중을 따지는 논쟁을 되풀이할 필요 없이 이 둘 사이에 상호 되먹임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독자들은 대체로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정부의 쇠고기 협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뿐만 아니라 이번 사태를 자초한 한나라당도 정당 정치의 영역에 포함될 것이다.
좌파, 우파보다 국익이 중요하다던 홍준표 의원
쇠고기 정국에서 국민들이 단단히 뿔이 나게 되자 한나라당 내에서도 쇄신의 일환으로 홍준표 의원이 원내대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제는 여당에서도 '소통다운 소통'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다. 과연 나는 뭘 믿고서 그렇게 홍준표에 주목했는가.
그간 홍준표 의원을 김대중, 노무현 저격수로만 인식했던 필자는 홍 의원이 지난 2005년 참여연대로부터 정책 추진과 의정 활동이 우수한 국회의원으로 뽑히고, 이후 1인 1주택 법안과 반값 아파트, 헌법에 대한 사회적 시장주의적 해석 발언, 불법 대선 자금 등에 대한 뚜렷한 소신과 정책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그가 어쩌면 말이 통할 수 있는 보수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대운하에 대한 생각은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었지만 한 잡지의 인터뷰에서 그가 "중요한 것은 좌파적 정책이나 우파적 정책이 아닙니다. 국가에 이익이 되고, 국민들에게 유익하다는 판단이 서면 좌우 정책을 가릴 필요가 없죠."(<인물과사상> 2005년 9월호)라고 당차게 발언했을 때는 다른 한나라당 의원이었다면 이런 발언이 물렁물렁한 회색 발언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겠지만 앞서 그의 소신 있는 정책 발언들을 상기할 때 그가 강조한 '국익'이란 게 정치학 개론에나 나오는 사실상 국내에는 없는 보수 정치인 모델로서 가져야할 진정성으로 보았다.
지난 6월 10일 촛불 집회를 본 홍 의원이 원내대표로서 "어제 촛불 집회로 국민의 뜻이 확인되었다"며 "이제 우리가 화답할 차례", "국민이 안심하는 정부를 다시 만들어야 된다", "원점에서 새 출발한다는 각오로 청와대와 내각이 쇄신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 또한 원내대표로서 여당과 국민 간에 막혀있는 의사소통을 뚫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진정성에 변함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처럼 반전되었다! 홍 의원은 27일에 광우병 대책위원회를 "골수 반미단체"라면서 "광우병 대책회의의 실체와 그들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국민 건강을 빙자한 반미에 있다"고 비난을 시작했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나. 홍 의원에게서 상식적인 보수 정치인을 기대했던 것은 필자의 망상인가.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홍 의원이 매카시로 돌변한 건 조·중·동의 학습 효과 때문일까.
대화 없는 통합의 정치는 배제의 정치일 뿐
앞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맥락은 다르지만 홍 의원은 기존의 정치가 배제의 정치였다면서 앞으로는 대화를 통한 통합의 정치를 강변했다.
홍준표 의원이 제안한 1인 1주택 법안이 당시 조·중·동과 한나라당에서조차 위헌의 소지가 있다며 포퓰리즘으로 매도한 된 것에 대해서 그는 변협(대한변호사협회)의 후배 변호사로부터 자문을 받았다면서 위헌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이번 촛불집회 관련 홍 의원이 갑작스레 시민단체를 "골수 반미단체"로 낙인찍은 것이 조·중·동 학습 효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처럼 1인 1주택 법안에서 조중동의 포퓰리즘 딱지에도 굴하지 않고, 변협의 자문을 구한 사례 때문이다.
"민변 변호사 '경찰 살인미수 혐의로 고소하겠다'"
서두에서 인용한 기사 제목 중에 하나다. 홍 의원의 후배 변호사들이 보기에는 이번 촛불 집회에서 국민을 지켜야할 경찰들이 국민을 상대로 '살인미수자'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좌파와 우파를 떠나서 국익이 중요하다는 홍준표 의원, '그나마' 한나라당에서 의사소통이 될 것이라는 필자의 믿음이 헛믿음이 되지 않으려면 당신의 후배들이 활동하는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말도 새겨들어야 하지 않을까.
"국민들에게는 (한나라당이) 수구적 보수, 퇴행적 보수라고 계속 몰리고 있었지요.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대북정책에서 너무 경직된 대결주의적 사고 (…)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인터뷰)
홍 의원은 한나라당이 수구로 낙인찍힌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냉전사고가 문제임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국민들을 "반미", "수구"라며 퇴행적 냉전주의 사고로 역행하는 이유를 순진하게도 나는 모르겠다.
쇠고기 협상을 시작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일련의 과잉 시장 개방은 사회 양극화를 강화시키고, '88만 원 세대' 양산, 승자독식,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성장방식의 청신호다. 홍 의원의 아래의 발언은 잊었는가.
"성장제일주의를 추구하면서 소외 계층을 너무 돌아보지 않았던 것을 반성하고 소외 계층을 배려해야 합니다." (같은 인터뷰)
정당민주주의 기능 복원해야
독자들로부터 하필 문제의 근원인 한나라당 정치인에게 읍소하는 거냐며 욕먹을 것을 각오하면서도 이런 글을 쓴 이유는 앞서 소개한 기사 제목과 같은 더 이상의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정당정치가 제 기능을 하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에서다.
정녕 한국정치에서 통합의 정치, 국민의 삶이 국익임을 인지하고, 국민에게 귀를 여는 정치인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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