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의 관심 속에 진행 중인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세 번째 서신 교환을 시작한다. 신재식 교수가 "종교인은 과학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던 장대익 교수의 질문에 답했다. 신 교수는 "한때 과학을 '시녀'로 보았던 종교는 '지동설', '진화론', '정신분석학'의 도전에 이어 최근에는 '인지 과학'과 '뇌과학'의 성과에 답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네 번째 도전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 개념인 '신'과 '영혼' 등을 건드리기 때문에 가장 큰 충격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재식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 드루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존 템플턴 재단 '과학과 종교 교육 프로그램' 연구자, 풀브라이트 초빙 교수를 지냈다. <생태학과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쓰고, <근대 신학의 이해>,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을 옮겼다.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오래 전부터 깊은 고민을 해온 목사이다. 이 글의 초고는 2007년 3월 작성되었다. <편집자> |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기
김윤성 선생님과 장대익 선생님께
두 분 선생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두어 달의 짧은 기간 동안 북미의 겨울과 남미의 여름을 겪고, 이제는 한반도에서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귀국 후에도 제 주변에는 남미의 여운이 잔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빙하와 사막이 눈앞에 어리고, 탱고와 스페인어가 귓가에 맴돕니다.
지금은 <오트로스 아이레스(Otros Aires)>라는 음반을 듣고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 때, 숙소에서 일하던 성악 전공 학생이 추천한 음반이지요. '또 다른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의미인데, 저는 '오늘의 탱고'로 받아들입니다. 고전 탱고에 현대 멜로디와 가사를 입혀 전자 악기로 연주한 음반입니다. 전통과 현대가 묘하게 어울리면서 독특한 맛을 냅니다. 지금 우리 땅에서 그곳 음악을 듣다 보니, 남미에 머물던 그때 미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다시 보이네요. 남미를 벗어나니, 그곳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안에서 머물러 있을 때보다는 다소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전체를 볼 수 있어서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광주에는 무등산이 있습니다. 전라남도의 평지에 우뚝 솟아 광주를 품고 있는 커다란 산입니다. 우리 학교(호남신학대학교)에서 무등산을 바라보면 능선과 구릉이 전부 보입니다. 도서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자태는 탄성을 자아냅니다! 천왕봉과 서석대를 비롯해서 중봉과 토끼등까지 무등산이 전부 다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무등산에 올라 그 품에 안기면, 전체 모습을 눈에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산과 함께 호흡하고, 그 절경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면서 산세의 세세한 부분을 즐길 수 있지만, 산을 전부 보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종교와 과학도 그렇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종교에서 벗어나서 종교를 바라보고, 과학에서 멀어져서 과학을 보는 것이, 평소 그 안에 머물렀을 때보다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학자의 종교 보기'나 '종교인의 과학 보기'는 이런 점에서 무척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니얼 데닛,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도킨스의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인들이 놓치거나 미처 보지 못하는 종교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종교 담론에 대해서는 제 나름대로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적어도 이들의 작업이 좁게는 종교에, 넓게는 문화 전반에 상당히 중요하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삽니다.
이런 점에서 장대익 선생님의 편지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세 분이 나누는 대화를 객석에서 앉아서 편히 보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윌슨이 <생명의 편지>를 쓴 맥락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종교나 과학의 문제에 대해 저와는 다소 다른 입장이지만, 이런 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한 분 두 분 은퇴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깝기도 하고요.
장 선생님께서는 윌슨이나 데닛이 종교에 대해 상당히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해 다소 의아해했지요. 그들의 평소 지론을 볼 때, 당연히 종교를 반박하거나 비판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으니. 논리적 일관성이나 사고의 정합성뿐만 아니라 사유와 실천의 통일성을 중시하는 장 선생님의 입장에서 이런 태도가 좀 마땅찮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의 태도가 다소 이해가 됩니다.
장 선생님은 종교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애증(愛憎)"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윌슨이 도킨스와 데닛, 자신을 역할에 따라 각각 전사와 전략가, 실용주의자로 구별했는데, 참 절묘한 표현입니다. 제가 보기에 종교 문제에 대해 도킨스가 강성(hard) 무신론자라면, 윌슨이나 데닛은 회의주의에 가까운 연성(soft) 무신론자로 보입니다. 도킨스는 종교에 대한 애증(愛憎)에서 비판적 '증(憎)'이 더 강할지 모르겠지만, 데닛이나 윌슨은 종교의 현재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애(愛)'가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자식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서구 문화의 일부이며, 심하게 말하면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교를 싫어하거나 부인하거나 관계없이, 그리스도교는 데닛과 윌슨을 포함해 서구인의 자아를 구성하는 에토스(ethos)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성장 후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이들을 양육한 선천적 환경이기도 합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이들에게 그리스도교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생태적 지위, 니치(niche)라고 할 수 있죠.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선천적 환경인 상황에서 데닛이나 윌슨 같은 미국 지성인들이 종교를 쉽게 부정하기는 상당히 어려울 겁니다. 설사 그들이 대놓고 '무신론자'라고 선언할지라도. 저는 무신론자도 '종교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적'이라는 말과 '종교적'이라는 말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제가 보기에 이들은 상당히 '영성적' 또는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 혹시 발끈할 그리스도교인들이나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과학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무신론이 이념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유신론 종교지요. 무신론과 유신론은 일란성 쌍생아입니다. 게다가 '영성'이나 '종교' 개념이 포함하는 외연은 유신론 종교보다 훨씬 더 넓고요. '자연주의적 영성'이나 '종교적 자연주의자'라는 말이나 입장이 분명히 가능하고요. '더 좋은 종교를 만들자.'는 데닛이나, '종교와 실용주의적으로 협력하자.'는 윌슨은 무신론자로 자처하되, 이런 부류에 포함될 수 있을 겁니다.
서구인들은 설사 그리스도교의 신념 체계를 동의하지 않거나 부정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교에 담겨져 있는 종교성이나 영성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유교인이 아니고, 때로는 유교나 유교적인 것을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유교가 우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1998년에 실시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 의식 조사>에서 91%의 한국인들이 유교적 신념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유교 의례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지요. 비록 스스로를 유교인으로 규정한 사람은 0.5%에 불과했지만. 세계 종교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을 유교인으로 분류해도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지요.(저나 다른 목사님들도 여기서는 그리 자유롭지 못할 것 같습니다.)
건강을 위해 더 이상 육식을 하지 않게 된 사람도 종종 고기의 질감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한국인이 세계 어디에 있거나 김치나 된장국에 찾는 것처럼, 데닛과 윌슨, 심지어는 도킨스 같은 서구인마저도 그리스도교는 그들 자신의 삶에 '각인'되어 있는 유산입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애증'의 대상이고요.
그리스도교의 과학관을 살피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장 선생님께서 종교인들은 과학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인이 과학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과학 보기에 앞서,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인이 과학을 보는 입장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종교를 보는 관점이 제 각각이듯이, 그리스도교인들이 과학을 보는 시각도 아주 다양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인으로 규정되는 외연이 아주 넓다는 것도 한 몫 하지요.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할 때, 목사나 신부 같은 사제일 수도 있고, 일반 신도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과학자나 특정 분야 전문가일 수도 있습니다. 즉 과학을 대하는 단일 집단의 그리스도교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리스도교의 과학관, 이것이다!' 할 수 있는 통일된 입장을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염두에 두어야 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이 과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 가운데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할 만큼 특정 '과학' 분야나 '과학 철학'에 정통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의 과학관은 과학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적' 또는 '신학적 경향'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심지어는 같은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도 과학에 대한 입장이 상당히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관계를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과학과 현재의 과학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현대화'된 과학 개념이나 이미지를 가지고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규정하려는 것입니다. '과거의' 과학을 현대 과학에 동일시하는 거지요. 이것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오늘의 관점과 관심에서 과거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일입니다. (전형적인 '휘그적 역사학'(Whiggish history)의 관점이죠.) 특별히 그리스도교의 과학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살필 때에는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접근 방식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들을 염두에 두어야만 그리스도교가 과학을 어떻게 봐 왔고, 지금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학, 신의 영광을 위한 동반자-과학 혁명 이전 그리스도교의 과학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교인의 과학관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말씀드리고, 그 후에 그리스도교인이 현대 과학에 보이는 다양한 태도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제가 역사적 측면을 먼저 고려하는 것은, 과학 혁명이라는 사건이 그리스도교와 과학 둘 사이의 관계를 질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과학 혁명과 이어진 계몽주의는 그리스도교가 과학을 보는 눈을 '고대나 중세의 시선'에서 '근대나 현대의 시선'으로 바꾸었습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제 첫 편지에서 언급했던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역사적 관련성을 좀 더 확장하는 내용이 될 듯합니다.
서구 문화에서 근대 이전까지 과학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녔지만, 종속되어 있었지요. 당시에는 오늘처럼 '과학(science)'이란 이름에 대응하는 지적 분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학문적 방법도 오늘날의 '과학적 방법'과도 달랐습니다. 또한 비록 의학이나 수학과 같은 근대 과학의 하위 분야에 해당하는 분야가 몇 개 있었지만, 물리학, 화학, 지질학, 생물학에 해당하는 분야로 분화되지도 않았지요. 이런 세세한 분야는 모두 '자연 철학(philosophy of nature)' 분야에, 더 넓게는 철학에 속해 있었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위대한 과학자라고 칭하는 아이작 뉴턴 역시 자신을 '자연 철학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의 대표작인 <프린키피아>의 원제 역시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였죠.
그리스도교가 지배 종교였던 서구에서 자연 철학은 오랫동안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 사제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교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탐구는, 즉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하고 있는 작업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탐구가 신이 만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 전에, 초기 그리스도교인 가운데 그리스도교와 다른 영역을 함께 섞으려는 시도를 반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테르툴리아누스라는 신학자는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교회 사이에 어떤 일치가 있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과 문화를 뚜렷이 구별하면서, 둘의 무분별한 통합을 강하게 경계했지요.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그리스도교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때 그리스 철학이 아주 적절한 도구라고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가지고 서방 신학의 토대를 세웠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해서 스콜라 신학 체계를 완성했습니다.
또한 당시 지식 계급이었던 교회의 교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 지식이 성서 주석과 신앙 변증에 유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제들과 신학자들은 언어 분야 3학(문법, 수사학, 변증학(논리학))에 수리 과학 4학(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반드시 배워야 했지요. 이 수리 과학 4학이 발전한 것이 근대 이전의 자연 철학입니다. 13세기 이래 자연 철학은 고등 학부인 신학부로 올라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과정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당시대의 과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중세적 상황에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불렸지요.
사족 같지만, 이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요. 페트루스 다미아누스(Petrus Damianus, 1007~1072년, 가톨릭 추기경)가 쓴 <가톨릭 신앙론>의 한 대목에 "이성은 신학의 시녀"라는 비슷한 구절이 나오며, 토마스 아퀴나스도 철학적인 여러 학문(disciplinae philosophicae)을 "거룩한 교리의 시녀"라고 표현한 적은 있습니다. 마치 중추적인 학문이 다른 학문들을 조수처럼 부리듯이, 신학은 하위 학문, 즉 철학과 기타 학문들을 활용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미아누스나 아퀴나스 두 사람 모두 이성을 사용해서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내용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긍정하지요. 그렇지만 한계를 분명히 하죠. 철학이 신학의 상위 학문이 되고 신학이 철학으로부터 어떤 원리를 받는 일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속 학문이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과학의 역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아퀴나스의 동시대 신학자인 상투스 보나벤투라(Sanctus Bonaventura, 1218?∼1274년)는 신학에 대한 교양 과목들의 보조적 역할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모든 학문의 목적이나 열매는 결국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것, 그래서 신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다." 즉 당시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거지요.
'성서라는 책'을 탐구하는 신학에게 '자연이라는 책'을 탐구하는 과학은 신뢰할 만한 동지이고 우군이었죠. 신학이 학문의 여왕으로 간주되던 이 시기에 과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시선은, 과학 혁명 이후에 비해, 상당히 따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모든 것을 지닌 지배자의 여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과학, 동지인가, 적인가? - 과학 혁명 이후 그리스도교의 과학관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과학을 보는 그리스도교의 태도에 변화가 옵니다. 이 과정에서 과학은 그리스도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비록 뉴턴이나 보일과 같은 과학 혁명의 선구자들이, 앞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주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었지만, 과학 자체가 독자적인 학문 담론으로 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 등장한 '전문 과학자'들과 기존의 지식 담론의 지배자였던 '아마추어 과학자'인 사제들 사이에 지적 권위의 최종 담지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주도권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이렇게 과학 혁명 이래 점증하는 '새로운' 과학 지식과 이와 갈등을 일으키는 '기존의' 신학 지식 사이에 긴장이 증가하게 됩니다. 자연 과학이 보여 주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들은 점진적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고, 신학은 오랫동안 군림해 왔던 '학문의 여왕'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자연 과학과의 관계를 다시 규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과학 지식과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을 어떻게 관계 규정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게 됩니다.
이때 그리스도교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새로운 과학 지식에 맞추어 전통적인 가르침 가운데 과학과 모순되거나 비합리적으로 보이면 모두 폐기하는 겁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같은 신학적 교의를 문제시했던 19세기 말의 '가톨릭 근대주의'가 이 흐름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근대주의는 계몽주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성서 비평학을 수용합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교리 특히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에 관련된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이런 교리들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둘째, 새로운 과학 지식에 맞추어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새롭게 갱신하려는 시도입니다. 기존의 가르침이 과학적 사실과 뚜렷하게 모순되는 경우, 새로 구성하는 태도입니다. 이 입장은 교리를 당시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다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 지식 사이에 교량을 놓으려고 시도합니다. 주로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 전통이 이런 입장을 취하지요.
셋째, 전통적인 종교 지식을 그대로 고수, 강화하고 새로운 과학 지식을 전적으로 배척하려는 흐름입니다. 이들은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이에 근거한 신앙 지식을 가지고 과학을 대합니다. 기존의 교리와 다른 지식을 제공하는 과학은 배척의 대상이 되지요. 20세기 초 미국에서 발생한 근본주의와, 그 영향 아래에 있는 현대 개신교 보수주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넷째, 과학과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면서 자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입장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와 달리, 현대 과학의 성취를 인정하고 성서 해석에서 좀 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과학은 종교와 분리된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종교의 대상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에 묶어 둡니다. 신학은 인간의 영혼과 윤리, 도덕, 역사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는 이런 시도는 20세기 중후반 세계 신학계의 주류였던 개신교 정통주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과학 혁명 이후 그리스도교의 과학관은 이렇게 다양하게 분화되기 시작합니다. 비록 그리스도교가 과학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과학에 선명한 견해를 밝히거나 전투적인 적대감을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드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찰스 다윈의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그리스도교에 엄청난 충격을 가하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의 과학관을 고착화시킵니다. 다윈 이후 그리스도교는 진화론을 포함한 자연 과학에 대해 여전히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입장과,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입장으로 크게 구별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첫째와 둘째, 넷째 흐름이 자연 과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세 번째 입장이 부정적인 입장으로 기울어집니다. 이제 오늘날로 이야기를 넘기지요.
다윈의 충격, 그리스도교의 과학관과 세계관을 뒤흔들다
다윈 이후, 그리스도교의 현대 과학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한편으로는, 현대 과학 지식의 사실성과 정당성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입장들 사이에서도 과학을 신학 작업에서 고려하는가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면서 과학을 고려하지 않는 신학적 입장과, 종교와 과학의 상호 작용에 주목하면서 과학을 신학 작업에 반영하는 입장이 그것입니다. 사실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입장을 제외한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은 오늘날 진화를 포함한 자연 과학 지식들이 사실이며 진실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물론 가톨릭교도들도 마찬가지고요.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주류 교파는 현대 과학에 대해 긍정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입장은 다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뉩니다. 지구의 나이가 1만 년 내외라고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은 진화 생물학을 비롯한 모든 현대 과학을 부정합니다. 반대로 우주의 나이가 현대 천체 물리학과 우주론이 말하듯 137억 년 정도 되었다고 여기는 '오랜 지구 창조론(Old Earth Creationism)'이나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 입장은 지질학과 천문학, 물리학 등 현대 과학 분야를 전부 수용하지만 오직 진화론만을 부정합니다. 이들은 종 안에서 변이가 발생하는 것을 '소진화(小進化)'로,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것을 '대진화(大進化)'로 규정하면서, 진화를 둘로 세분합니다. 이들은 '소진화'를 받아들이더라도, '대진화'는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이렇게 현대 과학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범위나 방식은 다르지만, 보수주의 그리스도교의 과학관은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과학적 사실로서 진화론에 대한 비판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의 정의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예를 들어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의 지지자들은 모두 진화 생물학은 '가설'이며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체는 우연한 진화를 통해 형성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창조자나 설계자를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그 정의상,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계의 우연성을 해명해 줄 창조자나 설계자를 기술(記述)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고 비판합니다.
이들은 이러한 비판은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과학, 즉 '유신론적 과학'을 주장합니다. 과학에 대한 부정에서 더 나아가 대안적 과학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들을 다루기 전에 그리스도교의 주류 교파들이 과학의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다루도록 하지요.
과학, 갱신을 위한 동반자 - 그리스도교 주류의 과학관
사실 자연 과학이 새로 보여 주는 지식은 전통적 그리스도교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충격과 도전이었습니다. 이런 도전은 과학 혁명 이래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상당수의 그리스도교 가르침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 천국이나 기적에 대한 담론, 부활이나 동정녀 탄생의 가르침들 역시 도전을 받았지요. 이런 과정에서도 그리스도교는 끊임없이 자기 주장을 갱신하거나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앞서의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교는 다른 어떤 세계 종교보다도 자연계, 즉 신이 만든 세계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신학이 그 일을 담당한 것이고요. 신학이 '로고스'의 학문으로 남고자 하는 한, 신학은 기존의 상식적 지식과 모순되지 않고 논리적 합리성을 유지하려는 욕구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리스도교 신학은 당대의 세계관이나 당대의 지식과 부합하면서 전개되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신학이 오늘의 관점에서 비과학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가장 첨단 과학 이론을 받아들여 형성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천동설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과거의 신학적 주장을 생각해 보시지요. 사실은 이 신학적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의도 아니고, 천동설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주장은 단지 고대와 중세에 가장 합리적이었던 천체 이론인 천동설에 보조를 맞추어 형성된 것이죠. 즉 당시 세계관에 비추어 신학적 주장들이 전개된 것입니다.
당대의 지식이나 상식을 거슬렀던 신학은 결국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거나 반발에 부딪혀서 결국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지동설의 시대에는 지동설을 포함한 신학이 표준이지 더 이상 천동설의 신학이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이 보면, 이 과정을 특정 지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학적 주장이 '도태'된 것이라고 보겠지요. 표준 신학으로 자리매김한 신학은 당대의 환경에 잘 '적응'한 결과일 테고요.
신학이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당대의 지식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사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존의 주류 과학을 부정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더 많은 사람들은 현대 과학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새롭게 재구성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당대의 지식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 체계를 갱신하고 재해석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교는 본래부터 이렇게 자신의 신앙에다 그 시대의 지식을 결합해 왔습니다.
앞서 장 선생님이 템플턴 재단을 언급하셨지요. 템플턴이 종교와 과학의 상호 존중과 동행을 추구하는 데 많은 재원을 투자하는 시도들은 이런 흐름의 연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과학과 종교 각자가 가진 한계를 존중하면서 종교와 과학의 상보적 협력 관계를 지향하자는 서구 전통이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신학적인 색채로 말하자면, 과학 지식을 소화해 그리스도교 교의를 갱신하고자 하는 신앙 의지의 표현이지요.
이들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종교와 과학' 분야는 그동안의 미약했던 흐름을 반전시켜 하나의 학문 분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템플턴의 지원 덕분에 종교와 과학 관련 연구소가 설립되고, 대학에는 종교와 과학 전공 분야와 관련된 교수 자리가 만들어지고, 종교와 과학의 관련 학회와 학술 대회가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저명 학자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저술 지원금도 주어지고요.
이런 템플턴의 지원에 대해 종교계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과학자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지요.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반면, 장 선생님의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도킨스나 윌슨, 데닛 등은 그 엄청난 상금 뒤에 숨어 있는 의도를 살짝 불순하게 보지요.
개인적으로는 템플턴 재단의 시도가 근대 이후 돈의 힘으로 학문 분야를 새롭게 확립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원이 종교를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데 집중하는 것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접어 두더라도, 자본이 지식 시장을 의도적으로 새로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라는 점에서는 우려를 표합니다. 자본에 의한 지식의 생산은 참여자의 의지와 별개로 늘 자본 공급자의 의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결국 지식 담론의 왜곡 가능성이나, 지성의 자율성과 비판성이 침해받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요. 아무튼 이야기가 살짝 곁길로 간 것 같습니다. 중심 주제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지요.
천체 물리학에서 인지 과학까지 현대 그리스도교의 과학 마주보기
그렇다면 이제, 주류 그리스도교에서 현대 과학을 어떻게 보는지를 살펴보죠. 과학 혁명 이래 자연 과학 분야는 지속적으로 자기 분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자연 과학의 다양한 지식들과 마주하고, 그 만남에 대해 신학적으로 응답해 왔습니다. 물론 이러한 만남과 응답이 다양한 자연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동일한 강도나 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지동설 이후의 천체 물리학이 주장한 대폭발과 우주의 오랜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와, 인지 과학이나 뇌과학 분야에 대한 이해에는 그 정도나 강도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인지 과학이나 뇌과학은 최근에 가장 활발하게 분출하는 지식의 영역인 까닭에, 그리스도교가 소화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이와 달리, 대폭발과 대충돌(Big Crunch, 우주 전체가 수축하여 한 점으로 모이는 우주론적 현상)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의 창조나 종말을 견주는 논의가 상당수 있었지요. 또한 진화 생물학의 진화 개념과 그리스도교의 창조 개념이나, 신이 최초의 창조 이후에도 종말까지 지속적으로 자연 세계에 개입하면서 창조 행위를 하고 있다는 '계속 창조' 사이의 관련성은 지금도 서구, 특히 미국에서는 뜨거운 논쟁 이슈이지요.
먼저, 현대 과학 분야에서 천체 물리학 분야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상대적으로 덜 긴장하는 분야입니다. 토마스 토랜스(Tomas Torrance), 이언 바버(Ian Barbour),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d Pannenberg), 로버트 러셀(Robert Russell), 어낸 맥멀린(Ernan McMullin) 같은 신학자들은 천체 물리학 혹은 우주론을 아주 적극적으로 다룹니다. 천체 물리학적 개념인 대폭발이나 대충돌, 인류 원리 등이 그리스도교 교의와 공유할 수 있는 논의의 접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대폭발 우주론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과학적으로 뒷받침 하는 사례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니면 좀 더 완곡하게는 현대의 대폭발 우주론이 그리스도교의 주장과 적어도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부 신학자들이나 그리스도교인 과학자들은 대폭발과 대충돌이 그리스도교 교의에 있는 창조와 종말에 공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공명'은 동일한 사건이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각각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탄생을 똑같은 사건을 과학자들은 '대폭발'과 '우주 팽창'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창조'라고 부른다는 거지요. 대충돌과 종말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사건을 과학과 그리스도교가 부르는 다른 이름이라는 거지요.
현대 과학 지식을 그리스도교 신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 좀 더 분명한 사례가 인류 원리일 겁니다. 원래 인류 원리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이자 이론 물리학자인 존 배로(John D. Barrow)와 미국의 수리 물리학자 프랭크 티플러(Frank J. Tipler)가 처음 사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과학적 개념이죠.
인류 원리는, 오늘날과 같은 탄소를 기반으로 한 생명체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대폭발 직후의 초기 우주 상태가 지극히 예외적이며 도저히 일반적인 확률로서는 나올 수 없는 그런 상태로 정밀하게 미세하게 조율된 상태처럼 보인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입니다. 즉 인류 원리를 처음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 개념을 의도나 목적 또는 신적 존재라는 것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시도하는 일부 그리스도교 신학자나 과학자는 이 개념을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전용합니다. 이론 물리학 안에서 인류 원리는 '약한 인류 원리', '강한 인류 원리' 등 몇 가지 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인류 원리 전용 방법은 적극적 또는 소극적 이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 우주 상태가 현생 인류를 탄생시키게끔 고도로 정교하게 조율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주를 탄생시키고 그 과정에 개입한 초월적 존재를 개연적으로 암시한다고 말할 때, 다소 소극적으로 인류 원리로 사용한 겁니다. 이와 달리 초기 우주의 상태가 바로 그리스도교적 창조주 신이 활동한 결과이고, 이것은 곧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할 때, 적극적으로 인류 원리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현대 우주론의 대폭발 이론과 인류 원리가 그리스도교 신학에 상당히 친화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는 반면, 다윈주의 진화론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은 극단적인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해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은 다윈의 논증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다윈 논증을 거의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수용했으며, 또한 다른 일부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진화론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반응은 '무신론 괴수'로부터 '진화는 신이 창조할 때 사용한 방식'까지 극단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진화론을 거부하는 창조 과학부터, 진화론을 적극 수용하는 진화론적 유신론까지 그리스도교 안에서 진화 생물학에 대한 반응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창조-진화의 문제가 그리스도교에서 아주 논쟁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진화 생물학과 관련해서는 다음 편지에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해야 할 것 같네요.
진화 생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하는 이들로는 아서 피콕(Arthur Peacocke), 유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존 호트(John Haught),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 필립 헤프너(Philip Hefner), 테드 피터스(Ted Peters) 등 대부분 현대 신학자와, 홈즈 롤스톤(Holmes Rolston III), 하워드 반 틸(Howard Van Till), 케네스 밀러(Kenneth Miller), 프란시스코 아얄라(Francisco Ayala),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 마르티네즈 휴렛(Martinez Hewlett) 등의 과학자를 우선 언급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분야가 바로 인지 과학과 뇌과학입니다. 인지 과학이나 뇌 과학에 대해 그리스도교는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두 분야가 자연 과학 분야에서도 최근에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분야여서, 아직까지 그리스도교의 본격적인 대응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분야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구는 인간의 종교 경험, 영혼의 존재, 마음의 작동 등과 관련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전의 어떤 과학 지식보다도 더 큰, 더 많은 충격을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지 과학과 관련해서, 이 분야에 관심 갖는 기존의 학자들로는 낸시 머피(Nancey Murphy), 조지 엘리스(George Ellis), 와렌 브라운(Warren Brown) 등을 언급할 수 있네요. 비록 최근에 '신경 신학(Neurotheology)'이라는 이름으로 책도 나오지만, 아직은 한참 더 가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동설이 그리스도교가 마주친 제1의 파도였다면, 진화론은 제2의 파도이며, 정신 분석학이 제3의 파도라면, 인지 과학과 뇌과학은 이제 그리스도교가 마주치는 제4의 파도가 될 것입니다. 지동설이 인간이 사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고, 진화론이 생명 세계의 정점으로서 인간의 위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신 분석학이 무의식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다소 위축시켰지요.
아마도 이 네 번째 파도가 가장 큰 파장을 가져올 겁니다. 제4의 파도는 인간의 신 존재나 종교 경험과 구조를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신'과 '영혼' 등을 건드리기 때문이지요. 상당수의 신학자가 이 분야의 작업을 주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과학에 대한 그리스도교 관련 논의에서 중심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이제 막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숨차게 달려왔네요. 원래 말씀드리려던 이야기가 아직도 한참 남아 있는데…. 잠시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봄날 햇살이 어서 나오라고 아우성입니다. 종교와 과학은 잠시 뒤로 미뤄야 할까 봅니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가 주장하는 '유신론적 과학' 이야기나, 우발성을 무시하는 법칙 중심적 과학관에 도전하는 신학적 논의나, 과학적 환원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이야기는 조만간에 다시 드릴 편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봄 햇살에 목욕하는 무등산의 능선이 그만입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무등산, 눈코입이 다 즐겁습니다. 산과 커피가 함께 어우러져 더 행복한 것처럼, 어깨동무하는 과학과 종교로 인해 더 그렇습니다.
2007년 3월 15일
한반도 남녘 땅 광주에서
신재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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