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시간, 비옷을 입고 한 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가슴에 붙은 스티커를 통해 그들이 모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정규직 철폐"
"기륭전자 노동자들에게 미안합니다."
"꼭 현장으로 돌아가길 빌겠습니다."
"이명박은 미친소 수입 대신 기륭전자 문제 해결하라."
이날은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1040일을 맞던 날이었고, 지난 11일 시작된 집단 단식이 18일째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풀리지 않는 기륭전자 문제에 힘을 보태기 위해 '하루 동조 단식'을 벌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니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단식 참가 의사를 밝힌 수는 무려 1066명이었다. 당초 1040명을 목표로 했었는데 이를 훌쩍 넘긴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홍세화 씨, 홍희덕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허영구 민주노총 부위원장 등 다양한 사회 각계 인사들이 하루 단식에 참가했다.
같은 비정규직으로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파업을 벌이고 있는 이랜드, 코스콤 노동자들도 생수 한 병 씩을 들고 단식에 참석했다.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주말을 맞아 촛불 시위에 참석하고자 시청 앞 광장을 찾았다가 즉석에서 단식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기륭전자 조합원 이미영 씨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해 주시니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문제에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힘을 보태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파업 1050일이 다 돼 가도록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서글퍼 나온 말이었다.
이 씨는 "1, 2차 고공농성을 통해 해결이 되는 줄 알고 내심 기대를 걸었었다"며 "현장 복귀의 날이 멀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기륭전자 노사는 최근 5차에 걸친 교섭을 통해 합의안을 거의 만들었었다. 별도의 협력회사나 자회사로 고용한 후 1년 뒤 정규직화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기륭전자 측은 막판에 이 합의를 원점으로 돌렸다. 직원들이 반대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합의가 최종 결렬된 다음날부터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집단 단식을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작할 때 10명이었던 단식 농성자가 6명으로 줄었다. 회사도 더 이상 반응이 없다. 이들이 물거품이 된 노사 합의를 다시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대통령뿐이라고 보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또 다시 삼청동 앞에서 가로 막힌 1066명의 목소리
이들은 이날 이명박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무엇보다 내수 침체의 진정한 원인, 빈부격차의 진정한 원인, 빈곤과 차별의 진정한 뿌리,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이들은 "쇠고기 재협상이 국민의 마음을 섬기는 첫 걸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륭전자 문제의 해결은 회사의 불법과 비인도적인 처사에 정당성을 준 정부의 오류를 시정하는 첫 걸음이고 전체 노동자의 마음을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청 앞에 모여 집단 동조 단식의 시작을 알린 뒤 이들은 단체로 청와대까지 8보1배 행진을 시도했다. 하지만 경찰은 맨 몸뚱이로 땅을 향해 허리를 숙여 절을 하는 이들의 걸음까지 막아 나섰다.
경찰의 저지와 차벽을 만날 때마다 이들은 가던 길을 바꿔 청와대로 향했지만 결국 삼청동 길목에서 더 이상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동십자각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가운데 5명의 연행자까지 발생했다.
"3끼를 굶는다고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단식을 하고 있다"던 이미영 씨의 목소리, "소통을 통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 주는 대통령이 되어 달라"던 1066명의 목소리는 끝내 청와대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노동을 천시해 잘 되는 나라 없다" 하루 동조 단식에 참가한 주요 사람들의 말이다.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 : 7월 1일이면 비정규직법 시행 1년이다. 정부는 법을 만들면서 "차별시정을 통해 비정규직 줄이고 정규직을 늘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됐나? 처음으로 차별시정을 신청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해고됐다. 그런데도 법은 그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법의 처음 입법취지 그대로 전면 재개정돼야 한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효진 스님 : 아직도 이 사회가 우리 피땀을 요구하는 듯하다. 조금 더 성숙되고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다. 정진우 목사 : 노동을 천시해서 잘 되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라도 이 싸움은 승리해야 한다. 함께 싸워야 할 투쟁인데 기륭 노동자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다. 박정대 신부 :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개인의 이익만 위해 살게 하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다. 그 속에서 1000일도 넘게 방치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수치다. 정진화 전교조 위원장 : 기륭, 코스콤, 이랜드 등 우리가 기억하는 비정규직 사업장만 여러 곳이다. 이런 사업장의 문제를 앞서서 해결해야 한다. 홍희덕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 기륭전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 미진한 것이 있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 비정규직 출신 국회의원으로 국회 안에서도 열심히 노력하겠다. 박창완 진보신당 서울시당위원장 :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35m 철탑에서 직접 대화를 호소했는데도 이명박은 최동열 기륭전자 회장을 데리고 중국 방문길에 올랐다. 이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그래, 너희 한 번 죽어봐라'는 태도와 다름없다. 우리는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 번 해보자'로 맞서야 한다. 조영선 변호사 : 법은 상식에 가까워야 하고 상식을 지켜야 한다. 비정규직의 사유 제한을 하지 않고 기간 제한만 한 비정규직법은 이로 인해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다. 비정규직은 우리 후손의 문제이고 내 조카의 문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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