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대통령실장을 비롯한 모든 수석이 짐을 쌌지만 딱 한 사람, 이동관 대변인만 자리를 지켰다.
공교롭다. 이 한 사람이 문제다. 이번에 물러난 수석 그 누구보다 문제가 많은 인물로 지목됐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춘천 인근의 절대농지를 사들인 그다. 절대농지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허위로 작성한 위임장을 첨부한 영농계획서를 제출한 그다. 이 사실을 보도하려던 <국민일보>의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야, 좀 봐줘"했던 그다. 그런 그가 살아남았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 동의 여부를 떠나 말 그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추구하는 바는 뚜렷하다. 청와대 비서진을 전면 개편하면서 '새로 시작하겠다'는 대국민 메시지를 던지려 한다. '그러니까 한 번 믿어달라'고 호소하려 한다.
이런 이명박 대통령이 빌미를 남겼다. 흠결이 많은 인물을 유임시킴으로써 '쇄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반감시키는 우를 범했다.
왜 그랬을까? 2%인지 20%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명박 대통령은 '부족한' 선택을 했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 경로로 추적해 볼 수 있다.
첫째 경로는 취향. 대변인은 다른 수석과는 다르다. 수석이 머리를 빌려준다면 대변인은 입을 빌려준다. 그래서 더 까다롭다. 머리는 서가에 꽂힌 책처럼 언제라도 뽑아 쓸 수 있지만 입은 그렇지가 않다. 눈빛이 맞아야 하고 코드가 맞아야 하고 정서가 맞아야 한다. 쉬 뽑아 쓸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새로 뽑아서 눈빛과 정서를 맞추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녹록치 않고 숨 돌릴 시간이 넉넉지 않다.
둘째 경로는 효과. 이 점 역시 대변인과 수석이 다르다. 수석은 정책을 주무른다. 만나는 사람도 대개가 관료다. 대변인은 다르다. 기자를 상대하고 언론을 관장한다. 기자와 언론을 매개로 국민과 직접 접촉한다. 이게 문제다. 수석의 실수는 즉각 드러나지 않는다. 만회할 시간도 있다. 대변인은 다르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국민이 울고 웃는다. 지금처럼 국민이 노기를 보이는 판에 어설프게 대변인을 교체했다가, 그래서 기자와 언론을 잘못 상대했다가는 무슨 낭패를 볼지 모른다. 지금은 그 어느 곳보다 언론의 협조가 절실한 때다.
두 경로로 살피니 얼추 이해가 간다. 마우스피스를 잘못 끼면 잇몸이 상하고 두통이 발생한다. 낡은 옷이 몸에 잘 맞고 몸에 잘 맞는 옷이 활동하기에 편한 법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니까 더 갑갑해진다. 이명박 대통령은 눈빛을 잘못 맞췄다. 자기 눈높이에 맞는 대변인에 흡족해 한 나머지 국민 눈높이를 맞추는 걸 소홀히 했다. 국민이 고소영·강부자 비서진을 비판한 데에는 정책방향 못잖게 도덕성에 대한 엄중한 요구가 깔려있었다는 사실을 방기했다.
이 탓에 빛이 바라게 됐다. '새로 시작하겠다'는 대국민 메시지는 새로운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변질되게 됐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