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보증기금에서 일하다가 재계약을 거부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22개월 근무자였다. 정규직 전환 대상자의 자격이 주어지는 24개월을 두 달 앞두고 '해고' 통보를 받은 것. 주택금융공사는 2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도 해고했다. 이 기관은 지난 3일 2년 6개월을 근무한 비정규직 16명에게 "오는 6월 30일부로 계약을 만료한다"고 통보했다.
지난해 6월 터져 나와 여름 내내 뜨거운 이슈가 됐던 '이랜드의 악몽'이 꼭 1년 만에 금융 공기업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셈이다.
24개월 두 달 앞두고 잘리고, 2년 넘게 일하고도 잘리고…
비정규직법이 100인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 적용되는 오는 7월을 앞두고 두 금융 공기업에서 계약이 해지됐거나 해지될 예정인 사람은 30명 가까이 된다. 모두 채권추심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두 공기업이 사용하는 채권추심 관련 비정규직은 모두 170여 명. 이 가운데 30% 가량이 6월 30일 전후로 잘려 나가는 것.
게다가 신용보증기금은 앞으로도 22개월의 계약이 종료되면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11개월씩 1회 연장해 계약을 해 온 이들은 모두 50여 명에 달한다.
주택금융공사의 채권추심 담당 비정규직 가운데 이미 계약해지 통보가 날아 온 16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는 12월이면 계약 기간이 종료된다. 이들 30여 명도 계약해지 선고를 이미 받아둔 셈이다.
공기업인데도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무시
정규직 전환 의무가 발생하는 2년 고용 직전에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것은 이랜드그룹이 지난해 썼던 방식이었다. 비록 이랜드그룹에서 있었던 0개월 계약, 백지 계약서 작성 등은 없었지만 계약 기간 만료를 이유로 정규직 전환 직전에 해고하는 것은 동일하다.
더욱이 이번 사태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자 먼저 모범을 보이겠다"던 공기업에서 벌어진 일이다. 특히 두 공기업은 지난해 6월 정부가 내놓은 '공공 부문 비정규직 대책'도 무시했다.
정부는 지난해 6월, 2년 이상 상시·지속적 업무를 맡아 온 9266개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7만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두 기업에서는 단 한 명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정부 지침에 전혀 호응하지 않은 것이다.
주택금융공사 소속 오세길 씨는 "올해 초만 하더라도 관리자들이 '2년 이상인 사람들은 조만간 무기 계약직으로 될 테니 기다려라'고 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6월 말이면 꼭 26개월을 일한 오 씨는 오는 30일자로 계약 해지될 예정이다.
신용보증기금의 경우 지난 2000년 이후 계속 채권추심 일을 해 온 '장기 계약자'도 70여 명에 달한다. 정부 방침에 따르면 이미 지난해 정규직으로 전환됐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6개월, 8개월, 10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맺으며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대기업 출신' 40대 가장의 하소연 "갑작스런 해고, 막막하고 억울해…"
지난 2002년부터 신용보증기금에서 채권추심 일을 한 손병일 씨도 마찬가지였다. 정부 대책에 따르면 지난해 6월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됐어야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계약 만료 시기가 다가오면 진행되는 지점장의 평가에 심리적 고통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장기 계약자라 하더라도 지점장에 따라 몇 개월씩 끊어서 계약을 갱신합니다. 계약이 갱신되려면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는데 그 압박이 상당하죠. 우선 월평균 2500만 원 이상 채권을 회수하거나 최소한 자기가 받는 월급의 8배 이상을 회수해야 합니다. 또 지점장 평가가 100점 만점에 70점 이상 나와야 되요."
실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각한 것은 이들의 월급 봉투 두께가 성과급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두 공기업 모두 채권추심 비정규직의 기본급은 85만 원 수준. 여기에 실적에 따라 지급되는 성과급이 붙어 월급이 나온다.
손 씨는 "4대 보험은 보장받고 있지만 나머지 복지는 제로(0)에 가깝다"고 말했다. 두 공기업의 채권추심 일을 하는 비정규직의 평균 연령은 40대다. 외환위기 이후 명예퇴직된 사람들이 대거 들어간 것이다. 손 씨도 대우중공업에서 15년을 일하며 대리까지 '달았던' 대기업 출신이다.
그들이 수시로 돌아오는 계약 기간 만료일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신용보증기금 비정규직 김진수(가명) 씨는 이렇게 말했다.
"입사경로나 학력 등의 차이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은 보장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미래에도 이렇게 계속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한다면, 2년이 될 때마다 또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해야 한다면, 정말 삶에 회의가 듭니다."
김 씨는 "2년 가까이 신용보증기금에서 일하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한 번도 내 입으로 회사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며 "언제 잘릴지 몰라서 말할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고용 안정 시켜달라" 노조 만들어 교섭 요구
동료들의 계약해지가 잇따르자 두 공기업의 비정규직들은 최근 각각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정규직은 한국노총 금융노조 소속이지만, 이들은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에 비정규직지부를 설립하고 해당 기업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간단하다. 고용 안정이다. 이랜드그룹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갈등과 또 하나의 닮은 점이다. 오세길 씨는 이렇게 절규했다.
"정부 정책으로 인해 비정규직을 아예 줄인다는 것도 아니고 새로 뽑아서 쓰면서 일하던 사람을 갑자기 나가라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아이들이 있는 한 가정의 가장들인데 갑자기 새로 직장을 구할 수도 없고요. 비정규직법의 취지 그대로 공기업에서 고용안정을 시켜달라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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