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타향살이하면서 가장 서러울 때는 언제일까? 몸은 아프고, 돈은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을 때일 것이다. 그러니 말 안 통하는 타국에서 고달프게 사는 이주노동자들 역시 가장 서러울 때가 몸이 아플 때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 아픈 몸이 중병이나 불치병에 걸렸다면 오죽하랴.
가끔 암에 걸렸다, 아이가 심장이 안 좋아 수술을 해야 한다, 사고를 당했다 하면서 고액의 치료비를 지원해 줄 수 있느냐는 SOS를 받을 때가 있다. 이럴 때 '가능하다'라는 대답을 선뜻 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가난한 인권단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다른 단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모금을 위한 행사를 벌이곤 하는데 한두 번을 제외하면 충분한 모금이 되기 어렵다. 자국민 공동체가 있다거나 자국민에게 모금을 할 수 있으면 그나마 사정이 좀 낫긴 하지만 이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니다.
이런 요청은 불법체류자들에게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강보험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치료비도 엄청나게 나온다. 정말 돈이 없으면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하고 법적으로 허용된 체류기간을 넘겨서 체류한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불이익이 주어지지만 몸이 아프면 최소한 치료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이 1999년에 만든 것이 민간건강보험제도이다.
민간건강보험제도에서 건강보험공단의 역할을 하는 중앙센터는 '이주노동자 의료공제회' 라는 비영리단체이다. 전국 각 지역에 있는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이 건강보험공단 지사의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이 주거지에서 가장 가까운 지원단체를 찾아가 회원으로 가입하고 건강보험료 내듯이 월 일정액을 직접 또는 계좌를 통해 납부한다.
그리고 각 지원센터는 회원으로 가입한 이주노동자들에게 건강보험증의 역할을 하는 보험증을 만들어준다. 보험증에는 가입자의 인적 사항과 사진이 있고 월 회비를 냈다는 도장을 매달 찍는다. 가입대상자는 불법체류자, 즉, 한국의 공적 건강보험제도에서 배제되는 이주노동자들이며, 그 운영시스템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식코'에서 나오는 민간건강보험제도와 똑같다. 다만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유관기관들이 모두 비영리기관이라는 점이 다르다.
구체적으로 보면, 회원으로 가입한 이주노동자가 몸이 아프면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 연락하여 자신이 어느 병원에 가면 되는지 확인해서 안내해주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 만약 이 민간 보험제도를 수용하지 않는 병원에 가게 되면 일반 환자가 되어 고액의 의료비를 내야 한다.
의료공제회에서 안내해주는 병원들은 중앙센터 역할을 하는 의료공제회와 약정을 맺어서 의료공제회에서 발급한 건강보험증을 제시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공적 건강보험에 준하는 저렴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공적 건강보험처럼 의료비의 차액을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손실을 감수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전국 각 지역 수백 개의 병원이 이 제도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공제회에서 안내해주는 병원에 갔다고 해서 모든 치료에서 혜택을 보는 것은 아니다. 공적 건강보험에 준하는 혜택을 받는 것이니, 공적 건강보험에서도 보험에 해당하지 않는 검사나 치료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제외된다.
우리 단체는 의료공제회의 지부단체로서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데, 가입대상자들이 불법체류자들이다 보니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에 따라 이주노동자들의 가입률이나 회원들의 월회비 납부율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또 가입한 회원 중에도 추방당하거나 소식이 끊어지는 회원들이 늘어 실제 회원의 수는 대폭 줄고 있다.
그럴 때면 언제까지 이 민간보험제도를 운용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관련 중앙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인도적 차원에서 최소한의 의료서비스를 다양한 경로로 제공하는 있는데, 차라리 불법체류자들을 공적 건강보험에 가입시켜 제도 내로 편입시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언젠가 토론회에 나온 보건복지부 공무원에게 '불법체류자에게도 건강보험료를 징수하는 것이 어떠냐, 아예 제도내로 흡수하면 건강보험료도 늘어나고 서로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라고 질문해보았더니,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점들이 있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래도 '한번 검토해보겠'노라는 대답을 들었었는데 그 이후에도 아무런 정책의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그냥 현재처럼 인도적 차원의 지원과 몇몇 병원이나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같은 선의의 기관들에 맡겨둘 것 같다.
현 정권 들어 복지관련 예산, 이주노동자 관련 예산들이 대폭 삭감되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냥 현재처럼 놔둬 주는 것만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