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촛불 집회에 나선 현명한 시민들은 이미 이런 엉뚱한 얘기가 나올 줄 알고 미리 대책까지 마련해 두었다. 사려 깊은 시민들은 친절하게도 "쥐덫 줄까, 보청기 줄까?" 되물으며 선택의 기회(?)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제 '쥐잡기 놀이'는 촛불 집회를 통하여 최고의 전 국민 스포츠가 되고 말았다. 전염병을 옮기는 쥐를 잡기 위해 '누리꾼 수사대'는 쥐불을 놓는 것이 좋을지, 쥐약을 먹이는 것이 좋을지, 쥐덫을 놓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뭐, 보청기를 주려는 이유야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좀 들으라고 주는 것이라는 것쯤이야 모두 다 알고 있으리라.
웬 '낙장불입'? 쇠고기 협상은 고스톱이 아닌 걸
지난 10일(현지 시각), 칼로스 구티에레즈 미국 상무장관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촛불 집회는 미국 책임이 아니고, 재협상을 할 용의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쇠고기 협상이 한국에서 전국적인 시위를 촉발하고 이 대통령의 지지도를 추락하게 했지만 그것은 부시 행정부의 책임이 아니다"라며 "미국은 한국과 쇠고기 문제를 재협상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모든 협상은 재협상이 가능하고, 미국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세 차례나 재협상을 한 사실이 있다. 미국 의회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미·칠레 FTA, 미·콜롬비아 FTA 등에서 재협상을 관철시킨 바 있다. 그러면서 한미 쇠고기 재협상은 절대로 못한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 미국은 쇠고기 협상이 고스톱도 아닌데 왜 '낙장불입'을 적용하려는 것일까? 아마 쇠고기 협상을 한미 FTA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한미 FTA에서는 이른바 '낙장불입' 조항으로 불리는 래칫(ratchet) 조항이 있다. 래칫 조항은 한 번 개방된 수준을 되돌릴 수 없는 독소 조항이다. 그래서 미국 상무장관이 "한국 정부 관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산 쇠고기를 받아들였다"며 그 대가로 미국 의회가 한미FTA 비준을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역설하지 않았나 싶다. 미국 상무장관의 발언은 얼핏 봐서는 한국 정부를 위하는 척하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독소 조항의 대못질을 확실히 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쇠고기 식용 부위 결정권 틀어쥔 미국 정부
미국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낙장불입'을 외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은 1조 1항부터 우리의 헌법과 주권을 제한하고 있다. 1조 1항에는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은 미국 연방 육류검사법에 기술된 대로 도축 당시 30개월 미만 소의 모든 식용 부위와 도축 당시 30개월 미만 소의 모든 식용부위에서 생산된 제품을 포함한다."고 했다.
그리고 부칙 2항에는 "미국이 강화사료금지조치를 공포할 시 제1조 (1)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여 적용해야 한다. :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은 미국 연방 육류검사법에 기술된 대로 소의 모든 식용부위와 모든 식용부위에서 생산된 제품을 포함한다"며 연령제한까지 모두 철폐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조항이 왜 우리의 헌법을 제한하는지 살펴보자. 미국 연방 육류검사법에는 '미국 농무부장관'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쇠고기 제품인지 아닌지를 규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독소조항이 남아 있는 한 광우병 위험이 높은 선진회수육(AMR)이나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아 논란이 많은 복제동물로 만든 고기제품이 한국 식탁으로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부칙 5항에 "미국 규정에 정의된 특정위험물질(SRM)을 제거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 조항에 따라 특정위험물질(SRM)도 한국 정부나 국회가 아니라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장의 손에 결정권이 넘어갔다. 이에 따라 일본이나 유럽연합(EU)에서 광우병 특정 위험 물질(SRM)로 지정해 식용 및 사료용으로 금지한 부위들이 쏟아져 들어올 길까지 닦아 주었다.
국회 공청회 구실로 촛불에 찬물 끼얹고 '그들만의 리그' 벌이겠다고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재협상에 준하는 추가 협의'라는 말장난으로 또다시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재협상이 아니라면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 금지도 불가능하며 곱창을 비롯한 광우병 위험 부위 수입 금지도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검역주권이나 헌법 침해 독소 조항의 개정은 어림도 없다.
한편, 광우병 허브, 대운하 삽질, 영어 몰입교육, 건강보험 민영화, 수도·전기·가스·철도 민영화 등으로 민생이 파탄지경에 이 와중에 한나라당은 슬그머니 친박의원 15명의 복당을 허용하여 과반수를 훌쩍 뛰어넘는 164명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 한나라당은 18대 국회가 열리기만 하면 '민주적'이고 '합법적'이라는 말로 포장될 '다수결 원리'를 무기로 대운하 삽질을 비롯하여 건강보험 민영화, 수도·전기·가스·철도 민영화, 사교육 시장 강화 등을 밀어붙일 꿈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가축전염병예방법 공청회를 구실로 야3당을 국회로 유인하여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에 찬물을 끼얹고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려고 하고 있다. 만일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 야3당이 재협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국회등원 명분을 쌓기 위한 '그들만의 리그'에 동참한다면, 그동안 "숟가락!"을 외쳤던 시민들은 "밥상 엎지 마!"라고 소리칠 것이라 생각한다.
거리시위에 나선 시민들과 네티즌들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정도 얹는 것이야 우리네 인정상 그냥 봐줄 수 있다. 그러나 남이 차려놓은 밥상을 걷어차고 엎어뜨리는 행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거리의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런 상황을 예견한 듯싶다. 그는 "역사를 보라. 빨리 집에 가면 안 된다"며 "국회를 믿어? 차라리 천일기도를 하자"고 했다. 국회로부터 가축전염병예방법 공청회 참석 요청을 받았을 때, 한홍구 교수의 이 말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국회 가축전염병예방법 공청회 참석 요청을 거부한 이유는 바로 아직은 집으로 돌아갈 때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며, 거리의 촛불만이 건강권과 검역주권과 민주주의를 지켜줄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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