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무효, 고시 철회!"
똑같은 구호가 지겨울 법도 하건만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달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촛불 집회에도 꼼짝하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만 더 커질 뿐이었다. 주최 측 추산 약 10만 명(경찰 추산 약 2만 명)의 시민들은 7일 저녁 서울시청 앞 광장과 덕수궁 앞 차로를 가득 메우고 72시간 릴레이 촛불 집회의 마지막 밤을 열었다.
"답은 오직 전면 재협상"
시민의 요구는 지난 5월 초부터 지금까지 간단했다. 몇 번을 외치고 또 외쳤던 말.
"고시 유보? 그런 것 필요 없고, 답은 오직 전면 재협상이다."
성남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시민은 무대 위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전날 국민의 이런 요구에 "재협상은 더 큰 문제를 유발한다"고 얘기했다. 시민은 "국민 건강보다 '더 큰 문제'가 대체 무엇이냐. '막가파'도 이런 '막가파'가 없다"고 반박해 참석한 시민의 환호를 받았다.
"이명박이야말로 진정한 '외유내강'의 고수"
이 간단한 요구를 듣지 못하는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이명박은 물러나라", "독재 타도"와 같은 구호가 등장한 지 오래지만 이 대통령은 여전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다.
"소나기가 올 때는 피하면 된다"며 거세지는 촛불 집회에 '시간 끌기' 작전만을 고수하고 있는 이 대통령을 향해 무대 위에 오른 한 10대는 "일본에 가서는 '천왕' 운운하며 왕을 떠받들고 미국에 가서는 부시 대통령의 대리 운전을 하고 돌아온 이 대통령이 정작 20만 명의 국민이 반대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그대로 하겠다고 한다"며 "그는 진정한 외유내강의 고수"라고 조롱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부드럽고 스스로에게는 엄격해야 한다'는 옛 사람의 지혜를 이명박 대통령은 '외국에 한 없이 몸을 낮추고 국민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대통령이다"
국민은 바로 그런 이 대통령의 태도 때문에 더욱 거리로,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올해로 21주기를 맞는 이한열 열사 추모제 기획단이라고 소개한 연세대학교의 한 여학생은 "정치 권력이 교체되고 법제도만 갖춰지면 민주주의인 줄 아느냐"고 대통령에게 한 수 가르쳤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우리가 촛불을 들고 이렇게 모이면 그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는 것이 바로 대통령이다."
이 여학생은 "1987년에 나는 고작 1살이었지만 책을 통해 본 1987년에나 지금 2008년에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짓밟히고 있다"며 "오는 9일 이한열 열사의 기일에 그의 영정을 들고 이곳 시청 앞 광장에 나오겠다"고 다짐했다.
연인원 40만 명이 든 촛불이 과연 '한 순간의 소나기'일 뿐일까?
광우병 국민대책위는 '72시간 릴레이 촛불 집회'를 진행 중이었지만 이날 시청 앞 광장에서는 "오늘 처음 릴레이 집회에 참가한다"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시민들은 말 그대로 서로 바통 터치를 하며 '릴레이 집회'를 지켜가고 있었다.
경기도 덕소에서 왔다는 고등학교 2학년 박희연 학생은 "5월 초에 한 번 촛불 집회에 나와 보고 오늘 다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인터넷으로만 지켜보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아 시간을 내 나왔다"며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외치는데 듣지 못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 참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아들과 딸과 함께 다섯 식구가 참가한 공모(39) 씨도 "황금연휴 중이지만 그동안 못 와본 것이 미안해 처음으로 나오게 됐다"며 "아이 엄마로써 걱정이 많이 된다"고 토로했다. 가족과 함께 나온 윤희종(33) 씨도 "쉬고 싶은 주말이지만 다들 열심히 하는데 안 나오기가 부끄러워 딸을 데리고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72시간 릴레이 촛불시위가 시작되면서 모인 사람의 숫자는 첫날인 5일 밤 10만 명, 6일에는 20만 명이었다. 여기에 이날 모인 10만 명까지 더하면 48시간째 연인원 40만 명의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를 향해 촛불을 든 것이다.
과연 이명박 정부는 겹겹이 청와대를 에워싼 경찰들로 이들을 막을 수 있을까? "다시, 6월 10일에 보자"고 다짐하는 이들이 과연 이 대통령이 얘기하듯 '한 순간의 소나기'일 뿐일까? 72시간 릴레이 촛불시위의 마지막 밤은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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