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새벽 경찰의 첫 번째 폭력진압 이후 빠짐없이 광장에 나가 새벽을 지켰다. 얻어맞기도 했고 남이 맞는 걸 지켜보기도 했다. 그 2주일 동안 광장의 패러다임은 여러 차례 변모해왔다. 처음 출발은 문화제였다. 그 다음은 과잉 진압에 대한 분노였다. 세 번째는 실력행사였다. 세 가지 모두에 전제돼있는 건 현 정부의 저열한 지적 능력과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국민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였다. 이를테면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달라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알아달라는 것이었다.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적 상식을 상기하고 공포를 느끼라는 공분이었다.
우리는 광장을 가득 채운 수만 명 시민의 이미지가 정부에 공포를 줄 것이라 생각했다. 과연 공포가 작동하긴 했다. 그러나 미약한 두려움이었다. 정부는 1일 아침 손에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군중에 경찰 특공대를 투입했다. 그로인해 얻은 건 더 큰 분노와 증오였다. 이 와중에도 정부는 끊임없이 현 시위대의 배후를 묻고 좌익 빨갱이를 의심하며 실업자라 조소했다. 존재감을 희석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광장에는 좌익 빨갱이뿐만 아니라 우익 꼴통도 있고 목사도 있고 스님도 있고 패미니스트도 있고 마초도 있고 주부도 있고 노인도 있었다.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광장의 힘은 종잡을 수 없이 다양한 배후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주체를 콕 집어 진압하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불가하다. 누구를 때리고 잡아넣든 와해될래야 와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양성은 좋은 것이다. 우리의 무기는 우리의 다양함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공동의 목표가 없었다. 공동의 문제의식도 없었다. 광장은 줄곧 대단히 사적인 분노로 작동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분노로 모였기 때문에 오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분노로 모였기 때문에 적확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지휘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다. 지휘부가 아니라 광장에 모인 시민들 사이의 토론과 공동의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광장은 온통 우리 스스로에 대한 찬사와 기쁨으로 가득하다. 자유발언대를 주목해보라.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정당한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이 광장의 풍경이 얼마나 흐뭇한지에 대한 자화자찬만 존재한다. 물음표가 없다. 느낌표만 있다. 사라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없었다. 이를테면 청와대로 가야한다. 청와대로 가지 말아야 한다. 현상을 유지해야 한다. 전진해야 한다. 비폭력이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무조건 어떤 무력도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혹은 저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진정한 비폭력인가. 이런 식의 의문부호가 없다. 성찰이 없다. 오히려 의문을 표시하는 자들을 프락치로 매도하는 경우가 발견됐다. 다양성이 다양성을 저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데 대한 자기비판이 없다. 이명박 정부의 실책이 밉고 짜증나서 모였다. 그러나 이 빤한 결과에 한 표를 행사했던 우리 실수에 대해선 변명이 없다.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던 우리의 저열함을 환기하려는 시도는 부재하는 것이다. 자기비판이 없으면 학습이 되지 않는다. 학습이 없으면 우리는 똑같은 행동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또다시 유사 이명박을 뽑을 수밖에 없다. 그 유사 이명박이 예정된 부조리를 되풀이하면 우리는 또 모여 남 탓을 하고 스스로를 찬양할 것인가.
자기비판이 없다보니 공유되는 의식도 목표도 없다. 그로인해 지금 이 시간 광장에는 참을 수 없는 무력감이 팽창하는 중이다. 현충일 새벽의 광장은 흥겹고 기쁘되 우려스러웠다.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놀이의 중요성을 무시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놀이는 좋은 것이다. 다만 놀이는 쉽게 질린다. 특히 목적이 없는 놀이는 더욱 그렇다. 놀이터는 금방 비어질 것이다.
과연 7일 새벽의 풍경이 그랬다. 지리멸렬했다. 모두가 대치를 위해 대치하고 있는 듯 보였다. 소요를 위해 소요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무정부주의 상태의 광장을 그저 즐기려는 듯 보였다. 아니 이것은 흡사 체험 시위의 현장이 아닌가, 싶었다. 심지어 장사꾼마저 등장했다. 세종로 한가운데에 이동 오뎅바가 나타났다. 한 쪽에선 촛불을 나눠주고 있었다. 하나에 천원 이었다. 절박함도 결기도 사라졌다. 모두들 그냥 거기 서 있을 뿐이었다. 대책위 단상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여러분, 지금 안국역 방향에서 시위대가 청와대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들 힘찬 박수로 힘을 실어 줍시다. 짝짝짝. 그리고 다음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합류하려는 움직임 따윈 없었다. 의지가 없다. 이건 낭비다. 열정의 낭비고 분노의 낭비고 체력의 낭비다.
우리는 과연 이길 준비가 되어 있나. 이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얼마 전까지 나는 우리가 절박한 혁명과 유약한 개선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개선조차 쉽게 바랄 수 없는 처지다. 더 이상 TV 속의 소모적인 토론은 필요 없다. 토론은 광장 위에서 필요한 것이다. 자기비판 없이, 반성 없이, 공유되는 문제의식과 목표 없이 지금의 에너지는 존속될 수 없다. 결국 와해되고 말 것이다. 2002년 광장 축제의 기억을 소환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이 끔찍할 처연함은 시민 개개인의 기억 속에 결국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금 상태로 가능한 학습이란 고작 그 정도다. 지체할 수 없다. 이 상태로 6월 10일을 맞이할 수 없다. 서둘러 광장 위에서 이 같은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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