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와 수잔 스왑 USTR 대표가 "재협상은 없다"고 불쾌(?)해하자 하룻밤 사이에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쇠고기 재협상 논란이 미국 민간 기업의 자율에 맡기는 방식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정부의 시위 진압 방식만 독재 정권 시절의 과거로 돌아간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다.
쇠고기 재협상의 해결 방식으로 '민간 자율'을 내놓다니 역시 '2MB스러운' 사고방식에서 나올 수 있은 코미디 같다. 이것은 마치 '조폭'과 경찰이 피켓을 들고 학교 운동장에 모여 사회 정화나 폭력 추방을 결의(!)하던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의 관제 데모 수준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민간 자율' 방식은 '고양이에 생선 맡기기'
1980년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쇠고기 안전 시스템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우선 레이건 정부는 농무부에서 안전 검사를 담당하는 수의사 출신 검사관의 수를 줄였다. 미국 정부는 검사관의 수를 줄였을 뿐만 아니라 축소된 정원마저도 제대로 충원하지 않고 있다.
최근 미국 농무부 관계자조차도 검사 인력의 수가 전국적으로 평균 11%가 부족하다는 점을 시인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검사 인력이 정원에서 20%나 부족한 상황이다.
다음으로 규제완화라는 명목으로 타이슨푸드, 카길, 스위프트, 내셔널비프 등 거대 축산기업이 운영하는 도축장의 안전 기준을 대폭 완화했다. 말하자면 '민간 자율'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국 농무부는 유해요소중점관리제도(HACCP)라는 그럴듯한 제도를 도입했다. 예전에는 미국 농무부 소속 검사관들이 직접 도축장의 안전 실태를 점검했으나, 이 제도가 실시되면서 민간 기업이 알아서 자율적으로 안전 실태를 점검할 수 있게 바뀌었다.
민간 자율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것'과 똑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앉은뱅이 소 불법 도축으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리콜 사태를 유발한 캘리포니아 소재 홀마크/웨스트랜드사는 '민간 자율' 방식의 대표적인 우수 사례로 꼽힌다. 미국 농무부는 지난 2004~2005년 이 엉터리 회사에 '올해의 급식 공급자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민간 자율에 맡긴 '이력 추적제' 아직도 시행되지 못해
현재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이력 추적제가 의무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광우병, 리스테리아, 살모넬라, 다이옥신, 구제역, 유전자조작식품(GMO) 등으로 '사전 예방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이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또 소비자는 생산자와 정부 당국에 식품 안전을 위반한 업체나 생산자를 강력히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생산자와 정부 당국은 식품 안전 문제에 대한 소비자의 예민한 여론을 반영하여 이력 추적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개체 식별 시스템(National Animal Identification System)'이 의무사항이 아니다. 미국의 개체 식별 시스템은 건물 등록, 동물 개체 식별, 동물 추적의 3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다.
미국정부는 생산자가 이 제도의 이점을 깨닫게 되면 자율적인 참여가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현실은 어떨까? 2004년부터 시행된 사육소의 개체 식별 시스템은 고작 25%의 농장에서 건물 등록을 했을 뿐이다. 동물 개체 식별과 동물 추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미국 도축장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시스템으로 나이 확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비과학적인 치아 판정법을 사용하고 있다.
미국 축산업계는 안전성 문제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비용, 인력, 시간이 드는 개체 식별 시스템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가 기대하는 '민간 자율'은 기업 이윤 앞에서는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민간 자율에 맡겨놓았더니…'광우병 의심 소는 총을 쏴서 죽여라'
현재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광우병 의심 소 신고는 의무사항이며, 이들 소는 반드시 100% 광우병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광우병 의심 소 신고는 민간 자율에 맡겨 놓고 있다. 명목상으로는 정해진 규정에 따라서 수의사가 연방 정부에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농가가 광우병 의심 소를 신고해 광우병 확정 진단이 나오면, 같이 키운 소의 수매, 농장 소독, 폐사축 매몰 등의 비용을 정부가 부담해준다는 것.
그렇다면 실제 현실 속에서 농가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2005년 7월 3일자 <휴스턴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에 그 해답이 있다.
<휴스톤 크로니클>은 "운송 비용을 목장주가 부담해야 하고, 광우병 소가 한 마리라도 발견되면 목장 전체가 방역 대상으로 지정되어 소를 팔 수 없기 때문에 목장 주인들이 광우병 의심 소를 발견하고도 정부에 보고하는 대신 그냥 도살 후 묻어버린다"고 비판했다.
이 신문이 전해준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하여 미국의 민간 자율 방식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목장 주인들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격언을 통해 정부의 규제를 어떻게 피하는지 잘 알고 있다 : '총을 쏴서 죽여라.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라'"
'민간 자율'은 국민을 광우병 위험에 빠뜨리는 지름길
이렇듯 미국의 민간 자율 정책은 규제를 완화하고, 검사 담당 공무원 수를 감축하여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거대 축산기업이 최대한 많은 이윤을 남기도록 길을 닦아 준 것에 불과했다.
공공부문이 축소되면서 정부가 직접 지출하는 비용은 줄어든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착시현상에 불과했다. 민간 자율 정책을 시행한 이후 미국에서는 병원성 대장균 O157:H7, 리스테리아균, 살모넬라균 등 세균 오염으로 인한 식중독 사고가 급증해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사회적 비용의 외부화'라고 부르고 있다.
민간 자율 정책이야말로 미국의 쇠고기 안전 시스템을 붕괴시킨 배후이자 주범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한미 쇠고기 재협상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민간 자율을 들고 나왔다.
그러므로 이명박 정부가 진정으로 기업의 탐욕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공공성이라는 브레이크를 망가뜨리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민간 자율'이라는 말로 국민들을 우롱해선 안 된다.
'민간 자율' 방식은 법적 의무도 없기 때문에 검역 과정에서 위반을 적발하더라도 마땅한 제재 수단도 없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을 광우병 위험에 빠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에 발을 들여놓고 싶다면 미국 축산업계의 이익을 위해 '민간 자율'이라는 '안 되고 송'을 계속해서 불러보길 바란다.
우리 국민들은 거리에서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미국 쇠고기 수입 중단되고' '2MB 리콜되고' '버시바우 반송되고' '검역주권 찾게 되고' '안전한 쇠고기 먹게 되고'와 같은 '되고 송'으로 확실히 화답해 줄 것이니…. 기대하라!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