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31일 서울시청 앞 광장. 촛불 집회에 참석한 약 7만 명의 시민에게 정부에 대한 신뢰도, 희망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자가 만난 시민들은 한결같이 "이제 재협상만으론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발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찬 거리에서 만난 면면은 다양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 친구와 손을 잡은 고등학생…. 이들은 촛불을 건네고, 길을 양보하며 서로를 향한 신뢰를 과시했다.
1시간 가량의 집회가 끝난 뒤, 어김없이 거리 행진이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소공로와 남대문로 두 갈래로 나뉘어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맞추며 외치는 구호는 한 가지로 통일됐다. "이명박은 물러나라!"
"대운하, 민영화…그때마다 올 순 없잖아"
"나는 이명박을 탄핵하러 나온 거예요. 대운하, 민영화 계속 있는데 그때마다 또 올 순 없잖아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차고 넘친 시민들은 차도와 덕수궁 앞 인도까지 가득 메웠다. 차도에서 촛불을 든 채 모여 앉아있던 10여 명의 20대 여대생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이라고 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는 이들은 "왜 나왔냐"라는 질문에 입을 모아 "이명박 때문"이라고 외쳤다.
제주도에서 온 이마리(20) 씨는 "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할 일이 국민의 소리를 듣는 건데, 미국의 소리만 듣는다"며 "일단 탄핵을 하고 정권을 바꿔야 한다. 솔직히 뽑을 사람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가족 모임을 촛불 집회에서 연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세 자매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는 김지현(44) 씨는 "쇠고기 문제만 가지고 이러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허상을 본 것 같다. 우리 사회에 영웅이 없으니, 영웅을 만들었다가 허상이 꺼지고 나니까 확 터져나온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그는 "당연히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국민들의 합의점은 하나다. '퇴진'!"이라고 강조했다.
수녀들도 함께 촛불을 들었다. 명동의 한 수녀원에서 왔다는 수녀는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걱정없이 수도에 전념해야 하는데, 나라가 잘못돼 가는 것 같아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진실하지 못한 것 같다"며 "우리가 정말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게, 여기까지 안 나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영업 방해? 상관없다. 부끄럽기만 할 뿐"
한편, 이날 촛불 집회에 앞서 대학로에서 을지로를 거쳐 시청까지 이어진 행진은 주말 오후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진행됐다. 평소 거리 행진에 비판적이었던 상인들도 이날은 함께 팔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며 행진을 응원했다.
을지로에서 자영업을 한다고 밝힌 박모 씨는 "영업 방해? 상관없다. 옛날에는 욕 했지만, 지금은 대신 해주니 속이 다 후련하다. 동참을 못 해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정말 잘 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역시 자영업을 하고 있는 김영주(54) 씨는 "그 CEO라는 분, 지지율이 50% 가까이 됐었는데 지금은 23%밖에 되지 않는다"며 "CEO는 자기가 하라는 대로 직원들이 따라 오는데, 그런 정신으로 대통령을 하니까 통제를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지지율이 20%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알아보면 10%도 안될 거다. 애들과 주부들이 나서고, 이런 경우는 없었다. 6·10항쟁 때도 어른들 외에는 안 나왔다. 이건 정말 온 국민이 다 나온 거나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친구와 함께 시내로 나왔다가 거리 행진에 참석했다는 김주봉(가명·64) 씨는 "이게 가라앉을 분위기인가. 숫자가 계속 늘어난다. 10만 명이 모이는데, 이걸 무슨 수로 막겠나. 빨리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고집부릴 일이 아니다. 이미 때가 늦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탄핵은 못 하겠지만 국민의 저항권이라는 게 있다. 국민이 모두 일어나면 탄핵보다 더 무서운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더러 계속 시위하라고?"
이날 경찰은 시청 앞 광장부터 청와대까지 1㎞ 남짓한 구간을 경찰버스와 병력을 동원해 차도와 인도, 대로와 골목을 막론하고 수십 겹의 방어벽을 쳐 가로막았다. 경찰은 "돌아가면 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지만 시청 앞에서 광화문까지 가는 주요 통로는 모두 막혀 있었다. 귀가하려던 시민들은 횡단보도 앞 인도까지 가로막은 경찰에 대고 "비켜라"를 외치며 곳곳에서 강하게 항의했다.
묵묵부답으로 그저 길을 막고만 있는 경찰을 향해 즉석에서 시민들의 다양한 항의가 쏟아져 나왔다. "이명박은 이제 대통령도 아니야. 그러니까 너네도 그만 좀 수고해", "우리더러 계속 시위하라고?", "이러다 정말 폭동 일어나요", "차 끊기면 택시비 줄거냐", "인도는 시민에게, 경찰은 경찰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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