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시민들은 달랐다. 경찰이 예전 상대하던 '좌익 세력'이나 노동운동 단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민들은 운동단체의 조직력도, 노동자의 비장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예전 세대와 다른 활기,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를 향한 분노를 열정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 비장함은 신세대 방식의 해학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온 도로를 봉쇄한 경찰 차량…"여기가 미로야!"
밤 10시가 넘은 시각 종로구청 뒤편 길. 대학생 세 명이 길을 헤매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대학 축제를 즐기고 집으로 돌아가던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미로와 같은 길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야! 도대체 어디로 가야 돼?"
"완전 전시 같아."
사방이 경찰 차량으로 막혀 있었다. 헬맷을 쓴 경찰이 골목 곳곳을 철통같이 지키고 섰다. 광화문에서 청와대로 이동하는 모든 길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그럴 만했다. 29일 경찰은 총 78개 중대 7000여 명을 광화문 일대에 배치했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이용하던 모든 길을 경찰이 점령했다.
서울 시민 1만여 명은 이날도 집회가 끝난 후 거리로 나왔다. 이미 익숙해진 풍경이다. 이들은 이날도 경찰 저지선을 뚫을 생각을 하지 않고, 발길이 닿는 대로 인근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동할 만한 길은 경찰이 모조리 막아놓았으니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다.
경찰 강경 진압+정부 장관고시=시민 참여 증가
한참을 방황하던 시민들이 목적지를 잡았다. 광화문우체국 앞이었다. 시민들은 동대문 인근을 거쳐 종로를 지나 다시 처음 촛불을 들었던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종로 2가를 지나면서 길게 늘어섰던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경찰의 강경한 진압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거리로 나온 시민은 예전보다 많았다. 그들은 "고시 철회, 협상 무효"를 외치며 도로로 쏟아져나왔다.
시민들은 30일 새벽 0시 10분경 광화문우체국 앞 도로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자유롭게 거리에 앉아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의료봉사대는 여전히 옆을 지켰다. 이들의 모습을 전해주는 온라인 방송인들이 6㎜ 캠코더를 들고 시민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장관고시 무효"를 외쳤다.
이날 집회에 처음 참석했다는 스물다섯 살 동갑내기 친구 김모 씨와 박모 씨는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장면을 보고 겁이 나긴 했지만 장관고시 발표를 보고 거리 행진에 참여했다"며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고 전했다.
장관고시 뿐만이 원인이 아니었다. 경찰의 진압이 강경해질수록 오히려 더 많은 시민이 용기를 내고 있었다.
김동진(28·대학 3학년) 씨는 "지난 월요일 집회에 나와 보니 경찰이 예전 학교에서 하던 집회보다 더 과격하게 진압해 깜짝 놀랐다"며 강경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의 과격함을 묘사하는 예로 "월요일에 보니 지름이 1~2m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에 10명 정도 되는 여자들이 쓰러져 있었다"며 "경찰이 강경하게 밀어붙여 힘없는 여자들이 밀린 바람에 맨 밑에 있던 한 명은 거의 실신상태였다"고 분개했다.
직장인 김모 씨(42·서울 송파구)는 다음날 출근이 걱정이라면서도 "경찰이 괘씸하지만 이렇게라도 국민의 목소리를 내야 정부가 정신을 차릴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해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여론 눈치 보기 시작한 경찰
시민들의 평화로운 '불법' 도로 점령 시간은 두 시간이 못돼 끝났다. 새벽 1시 30분을 넘어선 순간 시민들 앞을 가로막은 차량이 틈을 벌렸다. 곧이어 헬멧을 쓰고 방패를 든 경찰들이 대열을 맞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도로에서 친구와 맥주를 마시던 한 여성이 "미란다 고시 안했어!"라고 비명을 질렀다.
경찰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연신 알아듣기 힘든 구호를 외치며 순식간에 대오를 맞췄다. 뒤이어 "5보 앞으로!"라는 구령에 그들은 앞으로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이동을 마칠 때마다 "대오! 정렬!"하는 구호를 높였다.
당황한 시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폭력"을 외쳤다. 온라인의 화제로 떠오른 예비군들을 중심으로 남자들은 스크럼을 짜며 경찰의 진입을 몸으로 막았다. 경찰이 밀고 들어올 때마다 시민들의 목소리도 더 높아졌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던 시민들도 굳은 표정으로 옆 사람의 팔을 꼈다.
새벽 공기가 선선해지긴 했지만 몸과 몸이 맞부딪히는 순간의 열기는 뜨거웠다. 중무장한 경찰이나 이를 막는 시민이나 땀을 비오듯 흘렸다.
시민들의 대오가 흩어지고, 경찰이 점점 옥죄어 오면서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4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각 언론사 기자들은 소리가 커지는 곳으로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번쩍였다.
시민들 틈을 외국인도 비집고 다녔다. 노년의 백인 남성은 시민과 함께 경찰의 진입을 앞장서 막았다. 그는 연신 경찰에게 "노 폭력"을 요구했고 "두 유 라이크 이명박?"이라고 물었다. 캠코더를 든 흑인과 백인 남성이 예비군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진보신당의 노회찬 상임대표와 조승수 대외협력위원장, 영화배우 김부선 씨 등도 시민들과 합세했다. 굳은 표정으로 경찰 앞에서 자리에 앉은 노 대표는 "우리 국민이 자랑스럽다"며 "경찰은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요구했다.
상황은 오전 2시 42분경 경찰이 시민들을 완전히 인도로 밀어내면서 끝났다. 시민의 분노를 의식한 듯 이날 경찰은 이전만큼 강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 경찰이 폭력을 휘두르려 할 때마다 경찰 내부에서 당황하며 제지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우문수 경찰서장은 "오늘 연행자 3명중 2명은 석방했고 더 이상의 연행은 없다"고 밝혔다. 대부분 시위대도 경찰이 포위를 풀자 평화롭게 해산했다.
광화문에 꽃핀 새로운 거리 문화
촛불 집회는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모습을 띄고 있다. 처음 국민을 거리로 끌어낸 것은 십대 청소년이었다. 뒤이어 주부와 직장인이 시위를 주도했다.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새벽 거리 행진 주도세력으로 20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굼떴지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장관고시가 강행됐다는 소식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주변 사람과는 자유롭게 토론을 나눴다. 경찰의 전진이 이어지자 "폭력경찰 시끄럽다 물러가라"며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경찰이 포위를 풀자 애국가를 같이 부르기도 했다.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장난기도 가득했다. 비분강개한 모습만을 접하던 경찰은 이들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새벽 3시가 넘어서며 경찰이 철수를 시작하자 한 연합동아리 대표라는 '주디' 씨는 "낮에 잘 쉬고 내일 또 봐요"라며 경찰을 환송했다.
이날 행진에 참여한 조승수 대외협력국장은 "운동권이 주도하지 않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보았다"며 "지난 80, 90년대 민주화 운동 시대를 잇는 새로운 전환기적 에너지가 넘쳐난다"고 평가했다. 그는 "기성 정치권과 제도권 언론은 도저히 이들의 에너지를 수용하지 못할 것"이라며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조 국장은 "20대들의 표정과 시위 방식, 토론 방식 모든 부분이 충격적"이라며 "제가 그들에게 많이 배우고 가는 날"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기성세대가 된 우리는 이들이 쇠고기 문제를 통해 표출하는 자기문제의식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예비군의 힘! 이날 거리 시위에서는 새로운 스타가 등장했다. 젊은 예비군이 주인공이다. 대학 학생회도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약 40여 명의 예비군이 거리로 나왔다. 경찰의 폭력 진압을 보고 분개한 한 누리꾼이 지난 월요일 인터넷포털에 "예비군이 평화 시위대를 지킵시다"고 주장한 것이 발판이 됐다. 그들은 이날 즉석에서 3개조를 짰다. 앞으로 이들은 매일 저녁 7시 이순신 동상 앞에서 모여 시위대를 지킨다는 방침이다. 이들은 "절대 경찰에게 폭력을 쓰지 않는다. 경찰이 공격하면 맞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전했다. 올해 예비군 1년차인 임태훈(23·대학 휴학 중) 씨는 "인터넷 방송을 보니 여고생과 노약자에게까지 경찰이 과잉 진압을 했다"며 "신체가 건강한 남성이 맞아도 아픈데 약한 사람이 대한민국 경찰에 폭행당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나왔다"고 말했다. 임 씨는 "생각해보면 경찰이 동생뻘이라 안타깝다"며 "시민 여러분은 경찰을 동생이나 형, 오빠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는 "경찰에게 말을 걸면 다 웃으면서 얘기를 받아주더라"며 "간부가 지키고 있어 반응을 잘 못하지만 '시민을 때리지 말라'고 하면 동요하는 것이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학생회가 움직인다 그 동안 개별적으로 참여했던 대학생들도 오랜만에 깃발을 들었다. 학생회 차원의 움직임도 점차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 서울 소재 학교 대학생 1000여 명이 행진에 참여했다. 이들 대학 학생회는 앞으로 학교 간 공동참여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대 총학생회장인 정수환 씨(23)는 "이런 집회를 총학생회가 주도해 거리로 나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며 "다음 달 초순에는 더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들어 대학가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며 "경찰의 강경 진압과 정부의 고시 강행은 대학생의 저항을 더욱 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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