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이병렬 씨(42)에 대해 그를 2005년부터 알고 지냈다는 이삼용 씨는 27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난 것도 농민 홍덕표 씨가 경찰의 방패에 맞아 숨진 뒤 열린 민중대회에서였다. 그 뒤 평택 미군기지 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 소위 '싸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면 두 사람은 늘 함께 있었다.
그렇게 큰 이슈들에만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있던 전주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에도 이병렬 씨는 언제나 모습을 드러냈다. 전주방송(JTV) 해고자의 복직 투쟁 천막에도, 전주교대 학생들의 등록금 인하 투쟁에도, 전주시 상하수도 민간위탁 반대 집회에도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를 안다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이병렬 씨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얼굴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점점 뚜렷하게 겹쳐졌다. 한미 FTA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해 4월 협정 폐기를 부르짖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던 또 다른 그도 그랬었다. 평택 대추리에서, 한미 FTA 반대 범국민대회에서 사람들은 늘 그를 보았다고 했다. 고(故) 허세욱 씨가 바로 그다.
허세욱 씨가 그랬듯이 이병렬 씨도 "지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한 사람은 택시 노동자로 민주노총 조합원이었고, 또 한 사람은 지난 2월 공공노조 전북평등지부 조합원이 됐다. 두 사람은 모두 민주노동당 당원이었고 "어렵게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던 서민"이었다.
허세욱 씨는 생전에 한미 FTA와 관련된 모든 신문 자료를 모두 스크랩 해뒀었고, 이병렬 씨의 형 이용기 씨는 "동생은 사춘기 이후부터 유난히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한 번쯤은 그 수많았던 싸움의 현장 어디에선가 스쳐지나가듯 만났을, 너무나 닮아 있는 두 사람. 무엇이 그들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하는 '모진' 선택으로 내몰았을까? 허세욱 씨가 목숨을 잃은지 불과 1년만에 누가 또 한 사람을 죽음을 결심하게 만들었을까?
"'학생들이 싸우는데 우리는 뭘 하냐'고 여러 차례 문자 보냈다"
이병렬 씨가 분신한 현장에는 그가 손수 자필로 쓴 유서의 복사본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에게 그 복사물을 나눠주다, 남은 뭉치를 공중에 뿌리고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 종이에는 그의 최근 고민의 흔적이 녹아 있다.
"광주항쟁 28년, 미친소 MB타도 투쟁 1년, 이름 없는 전사가 투쟁으로 이제 망월묘역에 갔다. 오늘 난 다시 간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아니 타도하고 끌어내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는 단호히 맞서야 한다. 지금 어영부영하는 단체들, 관계자들, 혁명의 정신으로 죽음도 함께 할 수 있는, 구속도 싸움도 정당한 폭력 (투쟁도) 해야 한다. 꽃병·쇠파이프. 그래야 진정 열사 혼이다."
이삼용 씨도 "최근에 주변의 지인들에게 '학생들마저 저렇게 싸우는데 대체 단체들은 뭘 하고 있는 거냐'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여러 차례 보냈었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분신 당일에도 몇몇 사람들에게 비슷한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날의 문자 메시지에는 분신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지만 "일요일은 아무 일정도 없는 날이어서 정말 그럴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 문자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의 얘기다.
거세지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과 5공 시절로 돌아간 듯한 이명박 정부 아래의 3개월, 그는 "지금은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할 때"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혹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단호히 맞서야 할 때"라는 생각이, 그에게 모진 결심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을까.
"촛불 집회 함께 하자"며 직접 유인물 복사해 나눠주던 사람
공영옥 민주노총 전북본부 조직국장을 통해 분신을 결심하기 전후, 최근 이 씨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주에서는 수요일과 토요일에 집중해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촛불집회를 열었는데 아무래도 서울보다는 열기가 덜하다. 지역은 지역이니까…. 그게 답답했던지 손수 유인물을 만들어 '몇 날 몇 시에 어디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꼭 참석하라'며 주변 사람들이나 시민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그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하며 몸에 불을 붙였을 때도, 그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홀로 있었다. 촛불시위도 없었던 일요일 오후, 전주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라는 코아백화점 앞. 그 중에서도 사람이 몰리는 시간이라는 6시 경. 그는 홀로 그 곳에서 소리쳤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뜻을 거슬러 가고 있다고, 함께 촛불을 들고 그 질주를 막아 보자고.
주변 이들에게만 참여를 독려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를 거르지 않았다"는 그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온 몸으로 세상과 맞서 왔다. 수없는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12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에도 꼬박꼬박 회비를 내며 단체 활동에 늘 열성적이었던 허세욱 씨처럼, 이병렬 씨도 그랬다. 공영옥 국장은 "이병렬 조합원은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분이었다"고 설명했다.
2005년 8월 이병렬 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한겨레신문을 배달하다 택시와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그는 장애 판정까지 받았다. 이삼용 씨는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치기도 했지만 원체도 몸이 약해보이는 사람"이라며 "좀 쉬라고 주변에서 아무리 말을 해도 집회에는 꼭 참석하곤 했었다. 몸이 안 좋다고 빠지면 '내가 더 불편하다'고 말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광주 망월동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가 남긴 유서에는 5.18 광주항쟁의 얘기가 들어있다. 지난 5.18 광주항쟁 28주년에 공공서비스노조 사람들과 함께 찾았던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부터 그는 죽음을 결심한 것이었을까?
그와 함께 광주를 찾았던 공 국장은 "워낙 말씀이 없으신 분"이라고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우리는 공공운수연맹이니까 이용석 열사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데 그 시간이 이병렬 조합원은 다른 묘를 돌아보고 오더라. 전북지역 출신의 열사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묘가 저 쪽에 있다'고…."
그날, 광주에서 이병렬 씨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서에서 "오늘 난 다시 (망월동에) 간다"고 쓴 것을 보면, 그는 죽음을 결심한 그 순간에는 다시 광주를 떠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찰은 이 씨의 분신 직후 그의 '정신병원 치료경력'을 운운했다. 경찰이 언급한 정신병력도 "교통사고 후 머리가 계속 아파 정신과 검사를 받아본 것일 뿐"이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지만, 어쩌면 이 나라 정부는 그를 다 알면서도 '멀쩡한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고 덮고 넘어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허세욱 씨의 분신 직후 "중학교를 중퇴한 허 씨가 한미FTA에 대해 무엇을 알고 극단적인 행동을 했겠느냐"며 그의 결심을 깎아내렸던 일부 사람처럼.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작은 일이어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뭐든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틈만 나면 신문과 책을 읽었다는 허세욱 씨처럼 그도 주변 사람들과 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김제에서 열린 전국 민중대회에서 이 씨를 우연히 알게 됐다는 이삼용 씨도 "그저 집회에서 만나 홍덕표 씨의 사인과 정부의 대응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처음 가깝게 대화를 나눴었다"고 설명했다.
이 씨가 분신 직후 실려갔던 전주 예수병원에서 아직 의식이 있는 그를 만났던 한상렬 진보연대 상임대표의 말도 그가 얼마나 깊은 고민 끝에 내린 행동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병원에서 만난 이병렬 씨는 말은 못했지만 의식은 있었다. '살아야 한다'고, '꼭 사셔야만 한다'고 했더니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었다."
허세욱과 이병렬, 노무현과 이명박, 그리고 대한민국
택시노동자 허세욱 씨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저버리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막고 싶어했던 한미 FTA 협상은 타결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대한민국은 한 늙은 노동자의 절규를 외면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년'을 말하며 청와대로 들어간 이명박 대통령도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은 노무현 정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외려 미국산 쇠고기 협상이 타결돼 한미 FTA 비준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박수까지 쳤단다.
이 씨가 가장 답답했을 것도 바로 그 똑같이 닮은 두 전현직 대통령의 태도였는지 모른다.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라며 국민들의 가슴을 싸하게 만들더니, 어린 중학생들이 자신이 만든 청계천 광장에서 "2MB, 너나 쳐드삼"을 외치기 시작하자 "소통이 부족했다"고 했지만,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정권 출범 3개월만에 '이명박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이병렬 씨는 비록 '살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지만, 이 씨는 28일 오전 '살기 위해' 피부이식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온 몸의 88%가 화상을 입어 수술도 쉽지 않다는 것이 담당의사의 설명이었다.
그가 쉽지 않은 수술과 지독한 치료를 버티고 살아 이명박 대통령의 진심어린 사과를 들을 수 있을까. 청계천 광장에서 시작해 이제는 서울 도심의 거리 곳곳에서 일렁이고 있는 촛불이 이 씨의 병상을 외롭지 않게 해줄 수 있을까.
* 이병렬 씨의 치료비 등을 위한 후원 계좌 : 국민은행 406202-01-339459 안지중(광우병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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