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5시부터 서울 덕수궁 앞에서 열린 '5·17 청소년 행동의 날' 행사는 참가자의 자유 발언이 잇따르면서 흥겨운 분위기가 내내 계속됐다. 학교 자율화 조치 등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동시에 외치는 자리였다. 청소년 집회였지만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세대 300여 명이 참여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장학사 구분하는 방법 익혀두세요"
"장학사 구분하는 방법이 뭔줄 알아요? 일단 가서 물어보면 돼요, 어디서 오셨냐고. 그리고 양복을 입고, 유인물은 꼬박꼬박 챙기는 사람들!"
애초 서울시교육청은 수백 명의 장학사와 교감, 교사를 동원해 이날 집회에서 '안전 지도에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교육청은 이날 '등교 거부'를 제안하는 일명 '괴담' 문자 메시지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돌았다는 것을 지도의 이유로 들었다. 지난 6일 열린 촛불 집회 당시 긴급 회의가 소집됐던 창덕여자중학교에서는 이날도 교육청에서 중·고교 생활부장 교사를 모아 담당 구역을 분배했다.
행사 내내 쫓고 쫓기는 신경전이 계속됐다.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학생을 '지도'하러 나온 장학사를 행사 내내 '감시'했다. 인권활동가들은 '감시하러 온 장학사, 교사들은 돌아가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장학사들을 찾아다니며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집회를 지켜보던 중년의 한 무리는 '어떻게 참석하게 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냥 지나가는 시민이었다"고 급히 자리를 떴다.
"경제 살린다는데…우리 죽으면 무슨 소용?"
그러나 교육청의 '우려'와는 달리 이날 집회에 참석한 청소년 중 문자 메시지를 보고 등교를 거부하거나, 집회에 왔다는 이는 드물었다. 오히려 인터넷을 통해 집회 소식을 듣거나, 문자 메시지를 본 뒤 스스로 정보를 확인하고 참석했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부 학생들은 각자의 메시지를 적은 흰 마스크를 얼굴에 쓰고 집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미국산 쇠고기 불안이나 입시 경쟁 비판보다 '의견 개진을 가로막는 것'에 더 큰 분노를 나타냈다.
중학교 3학년 한종희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걸 보고 참석했다. 혼자 왔다. 엄마, 아빠가 하지 말라는 건 중요치 않다. 학교에서 가정통신문 나왔다. 나가면 징계받는다고 했다. 내가 참여했으니까, 내가 책임을 질 것이다. 학교에서 애들한테 말을 해주면, '나가봤자 안 된다. 한국은 이미 개념을 상실했다'고 한다".
4명의 다른 친구와 함께 남양주에서 찾아왔다는 중학교 2학년 강 모 학생은 "처음에 문자 받아서, 학교를 빠지라고 해서 계속 인터넷에서 찾아봤다"며 "나중에 공식 발표를 확인하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선생님들이 오지 말라는 얘기를 했다"며 "또 선생님이 여기 온다고도 했는데 그냥 신경 안 쓰고 왔다"고 덧붙였다.
"선생님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경제가 살아야 이런 일이 안 생긴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봐야 광우병 걸리면 다 죽고 없는데, 경제 살아봤자 소용이 없지 않나. 언론에서는 광우병 발병하면 수입 안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걸려도 5~10년 뒤에 증상이 나타나는데, 그때 되면 대통령도 이미 바뀌었고, 누가 책임을 지나?"
"저 징계할 수 있으면 해보세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레닌(별명)' 씨는 "우리가 하는 짓이 불법인가"라며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가면을 쓰고 피해자 청문 하듯이 주장해야 하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정부에 우리가 가만 있을 수 있겠나. 우리는 좌파에 의해 선동된 무지몽매한 군중이 아닌, 주권을 가진 이 나라의 국민이다. 그럼에도 정당한 권리, 생존권을 주장하는데도 가면을 쓰고 말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교육 철학이 민주주의인 나라에서 집회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장학사, 교사분들, 저를 잘 보고 어디 한번 징계할 수 있으면 해봐라. 자랑스럽게 학교에 나가 반정권 투쟁을 하겠다."
마스크를 쓰고 신분을 감춘 채 발언에 나선 또 다른 학생도 또박또박 힘주어 운을 뗐다.
"과거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도입된 지 얼마 안 됐을때, 나라가 부패한 정치와 독재로 큰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 누가 일어나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바로 잡았는지 생각해보면, 지식인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바로 학생들이 피를 흘려가면서 나라를 바꿨다.
그런데 지금 민주주의가 정착된지 꽤 됐는데, 닥친 위기를 생각해보면 그 당시 위기보다 더 크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아버지, 어머니, 삼촌, 이모가 그때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우리 청소년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 되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제도다. 그런데 지금 현재 대통령 아저씨가 펼치고 있는 정치는 국민이 아니고, 나라 전체 경제만을 위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건 히틀러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독재정치라고 생각한다."
"청와대에서 떠들지 말고, 여기 와서 당당히 말하라"
이날 행사에 참석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 강경표 사립위원장은 "학생들의 불만이 상당히 많이 얘기될 정도인데도 사실 분출할 통로가 이 사회에 없었다"며 "비록 오늘 온 학생이 소수이지만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니는 것 같아서 다행이고, 이런 판이 많이 벌어져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 청소년 집회에 비해 지금은 청소년들 스스로 나오는 게 특징"이라며 "선생님들도 기본적으로 다들 불안해한다"고 전했다.
집회 장소 가에 앉아 있던 김모(40) 씨는 "인터넷에서 보고 왔는데, 애들한테 미안하다"며 "지금 저 아이들이 저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어른들이 잘못해서 그러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는 "순진한 아이들이 정치 성향 가지고 저렇게 움직이는 건 아니지 않나"라며 "초등학교 3~4학년인 제 아이들도 대통령 아저씨 나쁘다고, 햄버거도 안 먹겠다고 먼저 얘기한다"고 전했다.
김 씨의 발언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듯, 이날 집회에는 자신을 '초딩'이라고 밝힌 자유 발언자가 무대에 올라 가장 많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저는 초딩이다. 곧 중학교에 간다. 그런데 명박이가 10년 후 제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저는 만화가가 되어서 사람들의 꿈을 그려주고 싶다. 그런데 지금 여기 와서 이러고 있다.
청와대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웃겨서 말이 안 나온다. 대통령님, 청와대에서 떠들지 말고, 여기 내려와서 저희에게 당당히 말하세요. 이 모든 사람한테 무릎 꿇고 사죄하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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