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년보다 3~4도가 낮았다는 새벽 6시 서울의 공기는 온 몸을 떨게 했다. 18m 철탑 꼭대기까지 미처 오르기도 전에 발을 잘못 디디는 것은 아닐까, 오르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터져 나온 목소리.
"쫓겨난 지 1000일,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누군가는 여행지의 다른 공기에 취해 있고, 누군가는 연휴 늦잠을 즐기고 있고, 또 누군가는 나들이에 들떠 새벽잠을 설치고 있을 시간, 파업 1000일을 앞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울의 아침을 깨웠다. '하이 서울 페스티벌' 마지막 날인 1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기륭전자 여성노동자 4명, 임시 철탑 올라 '고공시위'
이날 서울시청 앞에 설치된 임시 철탑에 오른 여성 노동자 4명은 기륭전자 조합원들이었다. 2명씩 나뉘어 올라간 두 개의 철탑에는 "문자 해고 잡담 해고 서러워서 못살겠다. 오세훈 시장은 기륭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라", "우리 가족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비정규직 철폐합시다", "미친 소도 막아내고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자" 등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오는 19일은 이들의 파업이 1000일을 맞는 날이다. 불법파견 시정과 정규직화를 촉구하며 시작된 파업이 어느덧 햇수로 4년째다. 그 사이 대표이사만 4번이 바뀌었다. 노동부도 검찰도 불법파견임을 인정했지만 사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나마 드문 드문 이뤄지던 교섭은 지난해 11월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열리지 못했다. 공장을 중국으로 이전하려 하는 회사는 지난 4월 19일자로 그나마 있던 생산직 노동자 70여 명 마저 모두 해고했다.
정부도 무기력하기만 했다. 사 측이 파견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해놓고도 정작 이들이 일터로 돌아가는 데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회사가 위치해 있는 구로구청장도, 서울시민의 보호자인 서울 시장도 이들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50명으로 시작한 조합원은 35명으로 줄었다. 어떤 이는 먹고 살수가 없어서, 또 어떤 이는 수없는 점거와 천막 농성에도 끄떡없는 회사에 기가 질려, 또 어떤 이는 구속과 벌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업 현장을 떠났다.
그렇게 "참혹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여성 노동자로 18m 철탑에까지 오른 것은 무심히 흘러가는 파업의 시계를 이제는 멈추고 싶어서였다.
"오세훈 시장은 서울 시민부터 보듬어라"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오세훈 서울 시장의 면담을 촉구했다.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분회장은 "서울시가 나서서 사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의 경우 시장이 나서 노사문제를 해결하는 사례가 많다고 덧붙였다.
김소연 분회장은 "서울시의 한쪽 편에 있는 구로공단에는 기륭전자와 같이 불법파견 등으로 여성 비정규직이 대거 사용되고 있다"며 "단순히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오세훈 시장에게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오 시장은 이날 밤에야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 행사에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기륭전자분회는 고공시위에 맞춰 낸 성명에서 "기륭 비정규직 뿐 아니라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등, 3등 국민의 차별을 넘어 함께 축제를 벌이고 싶어서 축제를 밝히고 지키는 이 높고 좁은 곳에 올라 서울 시장님과 축제로 즐거운 분들의 마음 한 켠을 점거 농성 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고 연민과 연대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광우병으로 뇌가 숭숭 뚫린 것만큼, 사랑이 사라진 사이코 패스의 사회만큼 무서운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임시 철탑 주변에는 현재 안전매트가 깔리고 경찰 1개 중대 70여 명과 소방대원들이 출동해 있다.
조합원의 남편들도 현장을 지키고 있다. 고공 시위에 들어간 4명의 조합원 가운데 2명의 조합원이 파업 중인 지난해 3월와 올해 3월, 결혼식을 올렸다. 그 중 조합원 오석순 씨의 남펴은 "벌써 1000일이 다 돼가는데 고공시위 한 번으로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기륭전자노조는 파업 1000일을 맞아 오는 14일 '1000인 선언'을 시작으로 21일까지 각종 집회 및 행사를 갖는다. 오는 16일에는 비정규 여성 노동자 인권보고대회 및 지식인 행동의 날이, 파업 1000일째인 19일에는 4개 종단과 함께 '비정규직 철폐 기원 기도회'가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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