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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가 국민 건강을 증진시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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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가 국민 건강을 증진시킬까?"

[인권오름]혈액관리법 개정으로 확인하게 되는 한국의 인권감수성

주변 사람들이 의료기관의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해 성토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얘기인즉슨 환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데 앞장서야 할 의료인들이 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전제가 잘못 되었다. 역사 속에서 의료인들이 환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데 앞장선 것은 극히 예외적인 사실에 속하기 때문이다.

의료인들의 역사를 비난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의료' 혹은 '공중보건사업'이라는 역사가 사실은 '건강'이라는 가치를 위해 '인권'을 희생시켜 온 역사를 함께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함일 뿐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서양의학에서 병원의 역사는 수용과 격리의 역사였다. 전염병(요즘은 말의 어감 때문에 이를 감염성질환으로 부른다)과 정신질환을 퇴치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종종 그것을 가진 환자들을 '죄인'처럼 취급했다. 요즘은 '건강'과 '인권'은 함께 추구하여야 할 가치이고, 함께 추구될 때만이 둘 다 충분히 보장될 수 있는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확산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이는 인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료 기술 발전 덕도 있다. 환자의 인권을 제한하지 않고도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끔 맞닥뜨리는 현실은 이러한 일반론과 거리가 멀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건강'을 위해서 '인권'은 양보해도 될 가치인 양 취급받는 때가 많아 안타깝다.

지난 3월 28일 혈액관리법 개정안이 공포되었다. 주요 내용은 채혈금지 대상자의 범위를 감염성질환자, 약물복용환자 등으로 법정화하고 그 명부를 작성하도록 한 것, 혈액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보건복지부장관은 질병관리본부장 또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으로 하여금 감염성질환자 또는 약물복용환자 등의 관련 정보를 혈액원에 제공하게 할 수 있도록 한 것, 혈액원은 채혈하기 전에 채혈금지대상여부 등을 조회하도록 의무를 부여한 것 등이다. 이는 지난 2월 국회에서 논의될 때 이른 바 '블랙리스트법'이라고 하여, 개인 정보 인권 침해의 가능성이 제기된 법이다. 하지만 몇몇 언론과 인권활동가들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이 법은 국회에서 일사천리로 의결되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 2005년에도 혈액관리를 내세운 인권침해에 항의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이 법과 관련된 논란은 언뜻 보면 '혈액 안전'이라는 가치와 '개인의 프라이버시'라는 가치가 충돌하는 것과 관련되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이 법은 '혈액 안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른 방법도 많고 그 효과도 의심스러운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정책이 '혈액 안전'이라는 미명 아래 추진되었을 뿐이다.

보건 정책이나 프로그램 때문에 개인의 인권을 제한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강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도 '시라쿠사 원칙(유엔의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조항의 제한 및 침해에 대한 시라쿠사 원칙)' 이라고 불리는 조건을 모두 충족할 때만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원칙에 의하면 '그러한 권리 제한으로 인한 효과가 입증되었는가?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가?' 등이 주요한 고려 대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입증해야 할 책임은 권리 제한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있다. 그들이 그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정책은 채택될 수 없다.

그런데 개정·공포된 혈액관리법은 이러한 조건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 리스트를 활용해 헌혈자를 선별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작성하는 감염성질환자 명부는 완전성에 문제가 있고, 심평원에서 작성하는 명부는 정확성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감염성질환자 명부만 놓고 보았을 때, 질병관리본부의 명부는 전체 환자 중 극히 소수만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많고, 심평원의 명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 환자까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다. 그리고 질병 발생과 명부 작성까지의 시차 문제도 있다. 일반적으로 질병관리본부에 보고되거나 심평원에서 정리되는 기록은 질병 진단 후 적어도 5-6개월이 지난 후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명부가 얼마나 '혈액 안전'에 기여할지 의문이다. 혈액 안전을 위해 쓸 방법이 이것밖에 없느냐 하는 문제도 남아 있다. 혈액 안전 정책이 걸어야 할 정도는 헌혈된 혈액을 충실히 검사하고 부적격 혈액을 적절히 처분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부는 이러한 정책도 예산 부족을 핑계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진정으로 혈액 안전을 걱정한다면 이러한 정책에 예산을 투여하여야 한다.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손쉬운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이 모든 말이 '뒷북'이라는 것을 잘 안다. 법이 제정되어 공포된 이상 얼마간은 시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 법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평가를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경과한 후 이 제도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을 때 지체 없이 제도를 폐기해야 할 것이다.

효과도 의심스러운 인권침해 제도가 시행되게 된 것도 갑갑한 일이지만, 더 안타까운 것도 있다. 그것은 이 법이 개정될 때 사회적 논의가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몇몇 언론과 인권활동가들의 외로운 외침이 있었지만 사회적 반향이 없었다. 그리고 반향 없는 외침은 이내 수그러들었다. 자꾸 확인하게 되는 이러한 현실이 한국의 인권 감수성 수준인 것 같아 못내 착잡하다.

(이 글은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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