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한마디는 나올 줄 알았는데…."
22일 오전, 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한 직후다. 김 위원장이 기대했던 '한마디'는 '무노조 경영'에 대한 사과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결국 빗나갔다.
"삼성 비리 의혹 쏟아져도, '무노조 경영' 폐해는 외면"
김 위원장은 이날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건희 회장에게 노동자는 여전히 관리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간 노동자들, 이 회장이 특검에 출석할 때마다 특검팀 주위에서 시위를 벌었던 삼성SDI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사과를 빠뜨릴 수 없다는 이야기다.
김 위원장의 이런 안타까움은 뿌리가 깊다. 김용철 변호사가 지난해 삼성 비리 의혹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한 후, 언론은 다양한 보도를 쏟아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도는 김 변호사의 발언을 소개하고, 특검 수사를 중계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김 변호사와 특검의 관심사가 아닌 문제들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숱한 문제를 낳았던 삼성의 '무노조 경영' 방침이 이렇게 외면당한 경우에 속한다.
"'불법 로비' 배경에는 '무노조 경영' 방침도 있다"
하지만 김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과 노동조합에 대한 삼성의 태도는 서로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김 위원장은 "삼성이 공권력을 상대로 불법 로비를 벌여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무노조 경영'이다"라고 말했다. 삼성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을 가로막으려면, 공권력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비자금 조성 의혹 역시 마찬가지다. 김 위원장은 "삼성이 조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비자금은 결국 삼성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빼돌린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노동자들이 공장과 사무실, 연구실에서 혹독하게 일해서 벌어들인 돈이 회사에 쌓이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회장은 삼성 노동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것.
"총수 퇴진은 눈속임일 뿐…노동기본권부터 보장해야"
이런 생각은 민주노총이 이날 발표한 성명에도 담겨있다. 민주노총은 이날 성명에서 "경영쇄신은 총수와 그 측근이 배후로 물러난다고 해서 이뤄질 일이 아니다. 이는 눈속임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결코 근본적인 혁신일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민주노총은 "현장의 고강도 노동착취에도 불구하고 노동기본권을 박탁해 온 무노조경영을 폐기하지 않은 한 쇄신은 가당치도 않는 말"이라고 못 박았다.
민주노총은 이건희 회장의 퇴진에 대한 한국 사회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내용은 이렇다.
"사용자단체는 이건희 회장의 퇴진을 '충격'이라고까지 언급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삼성의 무노조경영으로 노동기본권을 박탈당해 온 노동자들에게는 경영권 불법 세습, 수조원에 달하는 불법 비자금 조성과 세금포탈, 광범한 고위관료 매수에 부당노동행위까지 범죄를 일삼은 재벌에게 제대로 죄를 묻지 못하는 참담한 사회정의의 현실이 오히려 '충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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