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도 없었다. 따뜻한 봄 햇살만 그 얼굴을 내리쬐고 있었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폐기하라."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을 떠올리니, 어느새 네 번이나 바뀐 계절이 야속할 뿐이었다. 15일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모인 약 300 명의 사람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그저 바보 같이 한 해를 보냈을 뿐이다"
한미 FTA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해 4월 1일, 협상장이었던 서울 하얏트 호텔 앞에서 한 택시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그의 분신에도 협상장은 꿈쩍하지 않았다.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아직 채 세상을 알기 전부터 꽃 배달, 막걸리 배달로 시작해 택시 운전을 하며 먹고 살던, 중학교 학력이 다인 '가방 끈 짧은' 사람이어서였을까? 아니면 한독운수노동조합, 참여연대,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등 각종 '운동' 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사람이 반대하는 것이니 무시해도 된다 여겼던 것일까?
협상은 타결됐다. 그리고 1년. 그 사이 한미 FTA를 밀어붙였던 노무현 정부는 역사 속으로 물러났다. 청와대 주인이 바뀌었고, 한미 FTA 비준 여부를 결정할 국회의사당도 곧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진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귀머거리'다. 타결 전 들끓던 찬반 논란도 수그러들었다. 허세욱 열사의 1주기 추모제에 모인 참석자들이 하나같이 토로했던 "부끄러움"은 그래서였다.
"우리는 그저 바보 같이 열사를 빼앗기고 한 해를 보냈다" (오종렬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대표)
"대선과 총선의 결과, 국회 비준을 막아낸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배종렬 평통사 상임대표)
'한미 FTA 비준' 받아내러 미국으로 날아간 대통령은?
더욱이 꼭 1년을 맞은 허세욱 열사의 첫 기일 아침,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으로 날아갔다.
양국 간 정상회담 테이블 위에는 각종 현안이 놓여 있지만, 청와대는 '한미 FTA 비준'을 위한 토대 마련을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최대 현안으로 꼽고 있다. 대선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각종 실정을 거론하며 '한 표'를 호소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FTA를 놓고는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우리 정부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국 의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자동차 관세 문제 등 자기만의 문제로 한미 FTA 비준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방미를 통해 어떻게든 이런 미국 의회를 달래 비준을 성사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첫 번째 기일을 맞은 추모제 참석자들의 표정이 밝을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였다.
"299명 국회의원 가운데 270여 명이 한미 FTA 찬성"하는 국회는?
한미 FTA 국회 비준동의안을 손에 쥐고 있는 국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이날 추도사를 통해 "이미 (열사가) 알고 있겠지만, 당선된 전체 의원 299명 가운데 270여 명이 한미 FTA를 찬성한다"고 말했다.
한미 FTA 반대를 천명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간신히 5석을 얻어내는 데 그쳤을 뿐, 노회찬 대표의 말대로 총선 결과는 "참혹했다."
더욱이 이날 오전 여당인 한나라당과 제1야당인 민주당의 원내대표들을 회담을 갖고 유례없이 18대 국회 개원 전에 4월 임시국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한나라당은 임시국회 내 비준동의안 처리를 강행할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비록 민주당이 다소 부정적 입장이지만, '처리 반대'가 아니라 '18대 국회에서 하자'는 수준일 뿐이다.
노회찬 대표가 "더 이상 국회는 최후의 보루가 아니다.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길 뿐"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다. 또 이는 참석자들이 말없이 추모제를 지켜보던 두 번째 이유였다.
"이렇게는 갈 수 없는", 갈라진 진보진영은?
세 번째 이유는 이날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 속에 있었다. 한 때, 서울 시내 곳곳을 마비시키며 광화문 네거리까지 가득 매웠던 한미 FTA 반대의 목소리는 1년 사이 곳곳에 숨어버렸다.
게다가 허세욱 열사가 이승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한 깃발 아래 서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 다른 깃발을 움켜쥐고 있다. 허세욱 열사가 스스로 당원임을 자랑스러워했다는 민주노동당은 둘로 나뉘었다.
이날 추모제에는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다 아쉽게 낙선한 노회찬, 심상정 전 의원과 민주노동당 의원으로 18대 국회에 들어가게 된 곽정숙, 홍희덕 당선자, 천영세 대표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천영세 대표는 이날 추도사에서 "갈라진 진보 세력, 이렇게 갈 수는 없지않소"라고 허세욱 열사의 묘소를 향해 호소했지만 노회찬 대표는 "낡은 것과 과감히 결별하고 몸을 더 굽혀 기어서라도 국민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답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추모가 아닌 투쟁입니다"
이제 곁에 없는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 앞서 착잡함이 더 큰 날이었지만, 참석자들은 "다시 한 번"을 다짐했다.
"숱한 죽음을 넘어 풀들이 일어서고 다시 바람에 흔들림"을 알기에(임종대 참여연대 공동대표),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는 법"이기에(배종렬 평통사 상임대표), "당신이 바라는 것은 추모가 아닌 투쟁"인 줄 알기에(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이들은 다시 찾아 올 새로운 봄에는 "더 당당한 모습으로 찾아 와 보고하겠다"며 흰 국화꽃을 허세욱 열사의 봉분 위에 하나씩 조용히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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