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보건의료단체연합과 공동으로 <식코>를 직접 본 국내 보건의료인의 감상을 몇 차례에 걸쳐 싣는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다른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함께 봐요 '식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을지의대 김명희 교수(예방의학)가 네 번째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앞선 필자들의 '식코' 감상문들을 통해 독자들은 미국 보건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이다. 오늘은 좀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물론 돈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이야 말할 나위없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불합리한 체계 안에서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고 있는 선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보험회사의 이윤을 위해 환자의 청구를 부당하게 기각했노라고 고백하는 의사의 얼굴에 드러난 자괴감, 병원비 걱정을 덜었다는 생각에 좋아라하는 환자 가족에게 보험 지급 거절이라는 청천벽력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전화 상담원의 눈물, 약관 위반을 찾기 위해 저승사자처럼 환자들을 쫓아다니던 자신의 과거를 혐오하는 추심인의 냉소, 세계 최고 부자 나라에서 돈 때문에 환자를 내다버리고는 어쩔 수 없노라고 변명하는 병원 경영진의 피곤한 표정….
한편, 1990년대의 대대적인 인수합병 전쟁 후 본격적인 '영리 산업'이 되어버린 보건의료 체계 속에서 고뇌하는 의사의 모습은 <닥터 솔로몬(Solomon)의 딜레마>(미국 PBS, 2000년)에 잘 그려져 있다.
보스턴의 토박이 솔로몬은 나비넥타이와 깨끗한 흰 가운의 전형적인 의사 '선생님'이다. 환자들의 평판도 좋아 지역 100대 명의(名醫) 목록에도 빠지지 않는 그였지만, '케어그룹(CareGroup)'에 속하고 나서 곤혹스러운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부인과 암이 발견되어 상급 병원으로 의뢰가 필요했던 그의 환자는 '케어그룹'에 속하지 않은 병원으로 가고 싶어 했다. 안 될 일이다. 보험회사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 병원은 안 된다고 솔로몬이 이야기하자, 환자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돈 때문에 저를 그리로 보낼 수 없다는 거죠?" 솔로몬은 "네, 그래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고, 14년 된 단골 환자와의 관계는 이렇게 끝나버렸다. 또 다른 의사, 케어그룹의 진료부장인 닥터 사알(Saal)은 동료 의사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처음에는 의사가 직접 경영진이 되니 든든하다고 좋아하던 동료 의사들이, 이제는 자기를 예전의 보험회사 직원 보듯이 하며 "도대체 그 일을 왜 하고 있냐?"며 비아냥댄다는 것이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픈 이들과 그들 가족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만 밝히던 보험회사의 행태를 스스로 반복하고 싶은 의사도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캐나다 혹은 쿠바 사람들에 비해 원래 '못된' 사람들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착한 아들딸이고 존경받는 부모이며 따뜻한 이웃이자 동료인 이들이 왜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나? 그저 자신의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인데….
자, 이제 오늘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차례다.
내 옆 침대에 누워있던 이웃 환자가 어느 날 병원비 때문에 강제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아도 아무렇지도 않을 자신이 있는가? 눈물로 애원하는 환자 가족들에게, 약관이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다며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릴 자신이 있는가? 단골 환자의 눈을 마주하면서, 계약 조건 때문에 다른 병원으로 가면 안 된다고 설득할 자신이 있는가? 내 일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동료 의사에게 돈! 돈! 돈! 채근할 자신이 있는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는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나 체계가, 바로 그 평범한 이들을 괴물로 혹은 천사로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나 체계를 선택하고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다.
미국 사회를 엿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서로에게 괴물은 되지 말자. 미래의 어느 날, 인간이었던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보며 괴로워하는 그런 괴물은 되지 말자. 무엇을 위해 우리가 그렇게 변해야 하는가?
■ <식코> 감상을 더 읽으려면… ☞"이것이 미국의 '진짜' 모습이다" ☞"찢어진 손가락, 직접 꿰매야 한다면?" ☞"어머니는 알고 계실까"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