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지난 20일 발표된 교육과학기술부 업무보고에는 이명박 정부의 대선 공약이었던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 등이 그대로 포함돼 있었다. 정부는 '학교만족 두배, 사교육비 절반'을 목표로 삼았다지만, 이 같은 방안이 사교육 시장을 더욱 늘릴 것이라는 예측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다.
"사교육 광풍의 문제는 공교육이다"라며 정부와 같은 진단을 하면서도 전혀 다른 해법을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그의 이력은 그의 말에 더욱 솔깃하게 만든다. 다름아닌 과학 및 논술 지도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스타강사로 널리 알려진 이범(곰TV·EBS강사) 강사이기 때문이다.
사교육으로 유명세를 탄 그는 몇 년 전, 연 18억 원에 달하는 유료강의 포기를 선언하고 '공교육 강화 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사교육의 폐해를 절감하며 무책임한 공교육을 개선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새 정부 정책의 문제점과 공교육 강화의 '진짜 해법'은 무엇일까? 지난 21일 서울 옥인동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사교육에 대한 인식 현실화되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최근 사교육과 관련해 가장 분분했던 논란은 서울시의회가 통과시키려 했던 24시간 교습 허용안이었다. 약 1주일간 서울시의원-시민단체의 공방이 오가면서 발표가 번복되기도 했다. 사태를 어떻게 봤나?
이범 : 이전부터도 서울시는 원래 10시까지로 제한됐던 학원 교습을 11시까지 허용하고 있었다. 만약 더 늦게까지 하고 싶으면 빛이 새나가는 걸 막고 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사교육계가 별로 체감할 수 있는 논의는 아니었다. 서울시의회가 그렇게 나온 건 느닷없는 일이긴 했지만 학원가에서는 수업시간 규제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이번 일이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는 있다고 본다. 여론이 갑자기 돌아서면서 개정안이 무산됐다. 작년까지만 해도 본고사를 보면 사교육비가 줄어든다던지, 자율형사립고(자사고)가 늘어나면 사교육비가 줄어든다고 주장한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제 사교육 문제에서 대중의 전반적인 의식이 좀 더 현실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소리높여 외쳤던 게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서울시의회의 이 같은 움직임에는 학부모나 학원계의 요구도 상당부분 작용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범: 그렇다. 학원업계 저변이 매우 넓다. 학원 강사 수는 우리나라 전체 교사 수에 맞먹는다. 돈이 많이 흘러드는 곳이기도 하고. 지역마다 세력이 있는 인사들 중에 학원업계 연관된 분들이 상당히 많다. 직접 연관이 없다고 해도 인적 네트워크 속에 상당히 많이 포함돼 있다.
학원업계는 최근 들어 급속히 산업화되고 있다. 때문에 앞으로는 서울시의회 수준뿐만 아니라 국회에서도 학원계의 '로비'가 작용할 것이다. 아직까지 증거가 나오진 않았지만 확실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학원업의 산업화, 위험하다"
프레시안 : 산업화라는 뜻은 학원업이 최근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인가?
이범 : 원래 학원업이라는 게 '산업 이전의 산업'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회사에서 임원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던 직원이 나간다고 해서 그 회사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학원계는 직접 학생을 대면하는 사람들의 자질이나 개인적인 역량에 아주 크게 의존하는 특성이 있는 서비스다. 또 설비투자가 매우 간단한 산업이기도 하다. 그런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된 산업이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 학원업체들이 코스닥으로 가는 걸 막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내년부터 코스닥 등록심사에 여러개 올라오기 시작할 거다. 이에 대해 눈여겨보고 감시를 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그만큼 시장에서는 사교육업계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범 : 나도 투자회사에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 업계가 어떻게 될 것 같냐고. 제가 보기엔 틀림없이 늘어난다고 했다. 특히 영어는 가장 급속히 성장할 것이라고 봤다. 이명박 대통령이 되면서 제 예언을 현실화시켜준 셈이다. 외고, 자사고도 사교육 시장을 계속 늘릴 것이다.
"학교의 자율성? 사학재단의 자율성만 보장하는 꼴"
프레시안 : 실제로 '학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2008년 교과부 업무보고에 따르면 올해 안에 농어촌 기숙형 공립학교 88개 지정, 마이스터고 20개 지정, 자율형 사립고 도입 방안이 나와있다. 곧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범 : 이명박 정부 교육 공약의 캐치프레이즈가 '자율성, 다양성, 선택권, 경쟁'이다. 자율성과 다양성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볼 수 있다. 기존 학교가 가졌던 답답한 부분, 억압된 부분을 풀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자율성과 다양성은 개인의 수준에서 옹호되어야 하는 것이지 학교나 집단, 단체 수준에서 옹호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결국 그 안에 있는 개인의 다양성, 자율성이 침범하게 된다.
이게 바로 고교 평준화 정책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교육선진국들은 고교 평준화를 하면서 학교 내에서 자율성, 다양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형태로 간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인 많은 국가에서 적어도 성적 순으로 학생을 뽑는 것으로 자율성, 다양성을 키우겠다는 발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공부 잘하는 애들을 줄세워서 뽑는 학교를 계속 늘리려 한다. 그건 학생과 교원 개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키워주는 데에 오히려 역행하는 것이다. 학교 수준에서 자율성, 다양성을 주겠다는 건 사학재단의 자율성, 다양성을 보장한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학교 수준에서 학생 선발의 자율성을 보장하면 당연히 국영수 중심으로 학생을 뽑을 것이고,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엄청난 경쟁이 뒤따를 것이다. 입학 뒤에도 결국 명문대에 많이 보내기 위해 교육이 획일화될 게 뻔하다. 우리나라는 사교육비 지출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적어도 이를 악화시키는 정책을 펴면 안되지 않겠나.
"학부모의 선택권, 자사고 늘린다고 보장될까"
프레시안 : 자사고나 외고, 과학고의 수요가 많기 때문에 이를 늘리면 오히려 사교육 쏠림 현상이 줄어들지 않겠냐는 지적도 있다.
이범 : 자립형사립고를 많이 만들어 학부모의 선택권을 확대해주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붙으면 선택권이 있지만 떨어지면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외고 경쟁률이 5대1이 넘는데 다섯 명 중에 한명만 보장받는 선택권을 어떻게 선택권이라 부를 수 있나.
합리적인 우파라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정책이라고 본다. 고전적인 자유주의자 어느 누구도 자율성이나 다양성을 단체나 집단 수준에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자유주의 전통이 깊은 서구에서 왜 고교 평준화를 유지하고 있겠나. 그렇게 해야만 실제로 자율성, 다양성이 정착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표제어 자체가 다 허위적이다. 자율성, 다양성, 선택권 등…. 유일하게 핵심적으로 남는 건 경쟁이다. 자유주의인 척하지만 자유주의가 아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공교육이 자율성과 다양성과 연관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보는지.
이범 : 기존 평준화 체제 내에서 최대한 학제와 교육과정을 유연화시켜야 한다. 또 이를 위해 교육 관료의 관료적 통제를 철폐해야 한다. 자율성, 다양성은 교사와 학생 개인의 수준에서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핀란드처럼 무학년제 도입까지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특정 교과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이고 의욕이 있는 학생들은 한 두 학년 위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교원의 자율적 판단, 학생의 다양한 요구가 제도적으로 수용될 때 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껏 논의한다는게 수준별 학습이다. 내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정책이다. 어차피 진도 똑같이, 평가 똑같이 할건데 뭐하러 수준별 학습을 하나.
"불시에 보지 않는 진단평가, 사교육만 늘린다"
프레시안 : 새 정부가 내놓은 교육 정책 중 또 다른 핵심은 '기초학력'을 공교육에서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최근 실시된 초등·중학교 진단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추진됐다고 한다.
이범 : 학생들이 열심히 시험공부를 해서 보는건 진단평가가 아니다. 정말 제대로된 진단을 하려면 불시에 봐야 한다. 아주 잘못된 방법론이다.
미국처럼 애초에 내신을 위한 학원이 없는 분위기에서는 날짜를 정해놓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수 평가를 많이 하기도 한다. 크게 보면 미국에서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는 제도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처럼 사교육이 팽창돼 있는 나라에서 이렇게 안이한 방식은 절대 안되는 것이다.
진단평가라고 되어 있지만 마치 선발평가 같은 느낌이다. 어차피 학원에 다니는 상황에서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쓴다. 이미 학부모와 학생 문화가 그런 식으로 왜곡된 상황에서 불시에 보지 않는 한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또 세부적인 안을 보면 진단평가 결과를 단순히 학력수준이 떨어지는 학생을 추려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려는 방법이 나와있다.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유다.
결국 수준별 반편성 등 그 결과를 내신에서 활용하려는 상황은 사교육시장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저처럼 전수 평가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시행되는 진단평가를 반대하는 이유다.
"철밥통 교육관료가 학생·교원의 자율성, 다양성 가로막아"
프레시안 : 관료적 통제가 공교육 개혁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을 했다. 또 공교육이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여러 토론회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범 : 사실 자사고 100개, 학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가 나온 맥락도 나름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철밥통 교육 관료를 깨려 노력해봐도 쉽지 않다. 학제를 다양화, 유연화하려면 기득권을 해체시켜야 하는 데 그게 어려운 것이다.
이를테면 장학 기능을 없애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교육 관료의 할일이 없어지고 기득권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도전하기 어렵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그 부분에서 개선의 여지가 막히니까 이상한 데를 뚫는 것이다. 새로운 학교를 만들고, 영재교육원을 만들고…. 기존 제도적 틀 내에서 제도를 바꾸는 게 아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교육관료와 타협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또 새로운 사교육 수요가 된다.
결국 철밥통 교육관료와의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그걸 제대로 손대지 않는한 '백약이 무효'라는 걸 알아야 한다. 지금 초·중·고 교육을 꽉 잡고 있는 교육 관료의 세심하고 철저한 통제로부터 교원과 학생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방법은 없다.
학교 교과서는 거의 다 똑같다. 심지어 교사 지침서에는 가르치지 말아야 할 내용까지 명시돼 있다. 교육 과정을 손도 댈 수 없게 만들어 놨다. 이런 상황에서 기형적으로 선택제를 도입하다보니 운영은 파행적으로 되고 선택도 불가능하다.
초년 강사 시절 가장 어이없었던 것 중 하나가 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의 질문에 '학원 가서 물어봐'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교사들이 학교에서 5년 정도 지내고 나면 의욕을 잃는 이유가 뭐겠나. 교원평가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되려면 학교운영위 등이 전반적으로 세련화, 전면화되면서 학교 체제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결국 교육 행정이 중요한 문제다. 선진국에서 교육의 피상만 볼 게 아니라 교원이 얼마나 평등한 구조인지, 교원에 대한 평가는 어덯게 이뤄지는지 등등을 들여다봐야 한다.
"유럽이냐, 미국이냐"…가능성과 인식 사이
프레시안 : 사교육 시장을 억제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이 나오고 있다. 유럽과 같은 대학 평준화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도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범 : 어차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모델은 유럽식 아니면 미국식이라고 본다.
유럽의 대학 평준화 제도는 바람직한 모델이다. 입시지옥, 사교육비, 학벌사회 문제가 한번에 해결된다. 그러나 문제는 사립대가 난립한 우리나라 현실이다. 지금 상황에서 대학 평준화를 이루려면 사실상 혁명을 해야 한다. 프랑스가 그런 경우다. 실제로 68혁명 뒤에 대학 평준화가 이뤄졌다. 현실화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또 다른 모델은 미국이다. 이 모델의 중요한 특징은 '공정한 선발', 누가 엘리트 자격이 있느냐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 대학에서는 성적 이외의 요인이 굉장히 중요하다. 예체능, 인성, 품성 등 학생의 특성이 에세이, 추천서, 각종 첨부자료를 통해 드러난다. 미국 대학 입학사정관들은 '스터디머신'을 원하지 않는다고들 얘기한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은 절대 점수 따라 뽑지 않는다.
또 우리나라는 점수로 줄을 세워서 끊는게 공정성이라고 본다. 그러나 미국에서 공정성은 이미 사회적 함의를 강하게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점수면 흑인들이 훨씬 대학 가기 유리하다. 성적 이외의 요인을 충분히 고려하고 심지어 자라온 환경, 인종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도 점수 이외의 요인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게 돼 있다. 내신 반영 비율을 뺀 나머지 요소들은 대학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모두 성적으로 학생을 뽑는 것이다. 엘리트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은 결국 일본이 나온다. 대학별, 심지어 고등학교에서조차 성적순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는 굉장히 아시아적인 특징이다. 일본도 고교 평준화이긴 하지만 사립학교에 선택권을 줬다. 상당수 사립학교들은 계속 학생을 선발하는 상황이다. 가계 지출대비 사교육비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가 우리나라고 2위가 일본인 원인이다. 그러나 일본은 기본적으로 명문대를 가지 않아도 먹고 살 것을 찾을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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