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에 차 기자 회견문을 낭독하던 목소리는 곧 구호로 바뀌었다. 10여 명이 제창하는 구호가 몇 안 되는 기자들이 자리를 채운 다소 썰렁한 기자 회견장에 울러퍼졌다.
20일 오전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인천항운노동조합 퇴직조합원모임'은 기자 회견을 열었다. "너무 억울하다"며 복잡한 상황을 설명하는 이들의 요구는 어찌보면 간단했다. 바로 "약속을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현대화기금 공언했던 위원장이 약속 안 지켜"
750여 명에 달하는 조합원이 퇴직한 시기는 지난해 10월 1일, 인천항이 본격적으로 항만 인력 상용화에 들어간 때였다.
상용화가 추진된 계기는 2005년 드러난 항운노조 집행부의 채용·납품 비리였다. 당시 약 20억 원의 근로자 채용비리, 14억여 원의 공금 횡령, 1억여 원의 공사 리베이트 사실이 밝혀지고 노조 간부 35명이 구속기소되면서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정부는 항만 인력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 일용직인 노조 조합원을 상시 고용 근로자로 전환하는 상용화 정책을 추진했다. 상용화의 취지에는 채용 비리의 원인이었던 항운노조의 노무공급독점권을 폐지하는 동시에 구조조정을 통해 인건비를 절감하고자 하는 목적도 포함돼 있었다.
결국 상용화 시행에 들어간 부산항, 평택항 등에서도 약 30%의 조합원들이 퇴직했다. 인천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2007년 6월 취임한 이해우 노조위원장은 조합원을 상대로 노사정을 대표해 상용화 정책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퇴직 조합원은 당시 이해우 위원장이 "현대화기금은 모든 조합원에게 공평하게 분배될 것, 1인당 800만 원가량 될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조합원 여러분 바지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어 주겠다. 위원장을 못 믿겠느냐"고 말했다고 전했다. 현대화기금이란 1997년부터 항만근로자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항운회사들이 공동으로 적립해온 기금이다.
결국 며칠 뒤 조합원들을 상대로 실시된 찬반투표에서 상용화가 가결됐고 1735명 중 상용화로 전환된 981명을 제외한 754명(43.5%)은 퇴직을 해야 했다.
그런데 퇴직 이후 말이 바뀌었다. 이들은 "모든 조합원에게 항만현대화기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던 이 위원장이 항만현대화기금관리위원회에 '퇴직 조합원에게 기금을 지급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결국 지난 2일까지 현직 조합원 1000여 명에게만 1인당 500만 원씩의 기금이 지급됐다.
이에 대해 기금관리위원회는 정부가 지원한 생계안정지원금이 현대화기금을 끌어다 지급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기금을 지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퇴직조합원 측은 "애초 특별법에서 정부가 퇴직조합원에게 예산의 범위 안에서 생계안정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라며 기금위원회의 주장이 부당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리한 상용화 추진이 문제 낳아"
한편, 700명이 넘는 조합원이 퇴직을 당하며 시행된 상용화였지만 여전히 600여 명이 '일용직 근로자'로 새롭게 채용돼 상용화의 취지를 무색케 하고 있다. 인력 배치를 하는 주체가 항운노조에서 인력공급센터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상용화 이전 조합원들과 사실상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는 셈이다.
퇴직 조합원은 "이는 결국 정부가 상용화를 조속히 시행하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적정한 수요를 예측하지 못한채 졸속으로 '반쪽짜리 상용화'를 시행한 결과"라며 "결국 동일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상용직(정규직)과 일용직(비정규직) 간의 임금 및 근로 조건이 차별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상용화가 추진되는 직접적인 계기였던 항운노조의 비리 문제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있다. 퇴직 조합원은 "노조의 전 후생복지부장이 노조복지회관 운영에 쓰이는 경유에 대해 거래업체와 과잉공급 계약을 체결해 약 8000만 원 상당의 유류비를 과잉지급했다고 한다"며 추가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이처럼 상용화 이후 불거지는 문제에 무책임한 정부의 태도도 한 몫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애초 현대화기금은 정부가 매년 20억 원씩 출자하겠다고 하며 조성됐으나 결국 1998년 8억5000만 원을 출자한 것 이외에는 항운회사의 출자로 운영돼 왔다.
퇴직 조합원은 "생계안정지원금은 특별법상 예산으로 지급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정부는 사용자들이 적립해 온 현대화기금을 임의로 전용해 지급함으로써 그만큼의 책임을 면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정부는 2005년 불거진 취업비리 관련 약점을 빌미삼아 항운노조 집행부에 면죄부를 주는 댓가로 (상용화에 대한) 노조 간부들의 협조를 받았다"며 "무리한 상용화 추진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초 약속을 지키라는 것 뿐"
이들은 기자 회견문에서 "지금 정부, 사용자, 노조 집행부 모두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고 있다"며 "조합원들이 당한 배신감은 어디에 가서 하소연을 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의 바람은 큰 것도 아니고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라며 "애초 상용화 추진 과정에서 조합원에게 한 약속을 지켜달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변론을 맡은 맹주천 변호사는 "퇴직 숫자를 늘리기 위해 기금 지급을 약속해 놓고선 하지 않는 것은 사기죄에 대당한다"며 인천항운노조 위원장을 비롯해 노조 전 후생복지부장 등 사기 및 업무상 배임, 유류비 납품 관련 의혹을 받고 있는 이들에 대해 검찰에 수사를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퇴직 후 재가입·재고용을 제한하고 있는 규정에 대해 직업 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를 헌법소원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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