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운데 사태 수습을 정부에만 맡길 수 없다는 목소리가 학계와 시민단체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차라리 복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3년 내 완공'이라는 표어를 앞세운 성급한 복원은 사회적 교훈을 주긴 커녕 제2, 제3의 '숭례문 화재'만 불러올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복원이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할까 두렵다"
"혹자는 상식이 무너졌다고 말한다. 사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숭례문과 같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고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납치돼 결국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숭례문 사건을 지켜보면서 그때의 충격이 자꾸 생각난다."
28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사회단체 문화우리와 참여사회연구소가 개최한 '숭례문, 한국사회에 말을 걸다' 토론회 발제를 맡은 양윤식 한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숭례문 화재에 대한 여론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했다.
양윤식 원장은 "국보 1호도 속수무책으로 불에 태우는 행정당국인데 하물며 일개 국민은 제대로 지켜줄 수 있을까. 국민을 보호하는 일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알고 있다. 문화재적 가치를 논외로 하더라도 정부가 국토와 국민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양 원장은 "숭례문을 복원하고자 한다면 기술적 문제는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우리가 잃는 것이 있다. 나머지 모든 것은 폐기물로 처리될 것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복원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폐기 처분이 잠재돼 있다"며 "복원을 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 두렵다"고 덧붙였다.
"왜 가림막을 비난하냐고? 상식 깨트린 정부 어떻게 믿나"
양윤식 원장은 따라서 "3년 내 200억 원을 들여 복원하겠다"는 문화재청의 계획 자체도 근거없는 발언이지만, 설사 그 계획대로 복원이 된다고 해도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3년 후 숭례문 누각이 장막을 벗고 산뜻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숭례문의 문화재적 가치와 국민의 인식이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며 "복원은 결과로서 주어져선 안되며 과정 자체가 돼야 한다"고 밝혔다.
양 원장은 "물론 '3년 내 복원' 약속을 정책의지라고 생각하면 좋게 봐줄 수도 있지만 정부는 화재 다음날부터 가림막을 치고 포클레인으로 화재의 흔적들을 지우기 시작했다"며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화를 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미 상식이 무너져버린 행정기관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가림막에 대해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 것"이라며 "국민들은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봐라. 그래야 수습하고 대책 세워서 다시 볼 수 있을 때까지 안심할 수 있다. 또 우리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와 희망이 있었다고 본다. 단순히 볼 수 없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서울 중구청은 화재 당일인 지난 11일부터 높이 6m짜리 가림막 설치 작업에 들어갔고 이날 현장을 방문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가림막 높이를 올릴 것"을 지시해 15m 높이의 가림막을 3일 만에 완공했다. 이후 시민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중구청은 가로 20m, 세로 5m 크기의 투명 아크릴을 설치했다. 그러나 항의는 이어졌고 결국 문화재청이 나서 "복원 과정에 필요한 가설 덧집을 설치한 뒤 가림막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가림막을 완전히 철거하기까지는 3개월 가량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며 복구 현장도 '부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양 원장은 "복원은 다양한 소통 통로가 확보되야 하고, 시민들이 화재 현장에 대해서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며 "어느날 갑자기 가림막을 걷어내고 새집이 등장하는 식의 결과로 주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양윤식 원장은 한발 더 나아가 숭례문 복원이 필요한가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를 모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양 원장은 "불탄 숭례문은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역사적 기념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본다"며 "불탄 숭례문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기술적인 복원을 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숭례문은 자살 선택했다"…"시스템 바뀌기 전까지 숭례문 놔둬야"
한편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송도영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과)는 "2008년 한국에서 문화재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음에도 아직도 문화재관리법, 관리체계 자체에 대한 논의는 나오지도 않고 있다"며 숭례문 화재 이후에도 문화재에 대한 논의가 겉돌고 있다고 비판했다.
송도영 교수는 "이번 사건은 숭례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무지와 불감증의 소산이라고 본다"며 "이 사회가 질책의 게임을 벌이는 가운데, 너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결국 국회에서 문화재관리에 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은 것은 문화재관리의 필요성을 말하지 않은 우리에게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며 "문화재청, 소방방재청 등에 대한 비난은 유효타가 아닌 또다른 뒷북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송 교수는 "이런 상태에서 복원만 서둘러 한다면 제2, 제3의 숭례문은 계속 불타오를 것"이라며 "이런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복원하면 안 된다"며 양 원장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는 "관리 시스템, 책임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전에는 파수꾼 몇 명 세워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홍기빈 참여사회연구소 연구기획위원 또한 "숭례문은 사실상 자살을 선택한 것 같다"며 숭례문 화재가 문화재를 '볼거리'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천민 자본주의 사회의 한 예라고 지적했다.
홍기빈 위원은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는 숭례문을 우리는 볼거리 이상의 무엇으로 여겼는가"라고 물으며 "단순히 숭례문 하나를 복원하는 차원이 아니고 서울이라는 공간 전체, 문화의 상품화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 위원은 "전세계 어디에 가도 2000년 이상된 도시 공간은 굉장히 드물다"라며 "그러나 서울이라는 2000년 역사가 담긴 공간이 루미나리에라는 국적불명의 불빛과 볼거리로 전락한 의장대가 멋대로 뒤섞여 있는 흉칙한 몰골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을 계기로 서울의 역사문화가 풍부하게 살아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진화'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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