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처음엔 가벼운 오한으로 시작되더니 기침, 고열, 콧물, 눈물까지 아무리 계속해서 약을 털어넣어도 낫지를 않는다. 꼬박 일주일을 거의 누워 지내다시피 했다.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사는 모양새가 모양새니만큼 전화기를 꺼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콜록콜록, 전화를 받으면 대부분 첫반응은 이랬다. "그러니까 술 좀 작작 마시랬잖아!" 후배들도 말을 삼갈 뿐이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선배, (또) 술마셨어요?" 아니다. 요즘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한 적이 별로 없다. 그냥 감기에 걸렸을 뿐이다. 어쨌든 그렇게 한참 욕을 하든, 혀를 끌끌 차든 하고나서 사람들이 내리는 감기 처방은 하도 가지가지여서, 그 말을 다 듣고 나면 속으로 절로 "정말 가지가지들 하는군"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떤 사람은 고전적으로 헛소리를 한다. "거 있잖아 왜, 소주에다 고춧가루 확 풀어서 한잔 죽 들이키라구." 이런 말 하는 인간들, 평소에도 별로 도움되는 인간들이 아니다. 전문적인 조언도 여럿 된다. 소금물을 코로 들이켜서 입으로 뱉으면 빨리 회복된다, 따뜻한 물을 계속해서 마셔라, 무조건 자라, 무조건 쉬는 게 약이다 등등. 그중에서 소금물 처방을 한번 따라했다가 죽을 뻔 하기도 했다. 어떤 처방의 경우는 해 본 사람만이 하는 게 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일주일째 바깥 출입을 최소화하다 보니 제일 걸리는 게 역시 영화였다. 시간은 가고, 세월은 가는데 못보고 지나가는 영화가 겹겹이 쌓이는 게 베갯잎 머리맡에서도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억지로 일어나 일반 시사회라도 나가려다가가 핑,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왼쪽 귓가에서는 이렇게까지 목숨 걸고 영화봐야해 하는 악마의 목소리가, 오른 쪽 귓가에서는 그래 너는 영화에 끝까지 목숨 걸어야 해 하는 천사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워낙 비몽사몽 간이어서 어느 게 천사고 어느 게 악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감기가 어쩌구 저쩌구 시종일관 변명을 해대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어톤먼트>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든, <주노>든, <데어 윌 비 블러드>든,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3:10 투 유마>든 그 어느 것 하나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덜커덕, 아카데미 시상식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말았다. 뭐, 영화야 타이밍을 놓쳐서 뒤늦게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아카데미와 관련해서 그 어떤 코멘트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는 점이다. 이러니 영화기자 맞냐는 소리를 종종 듣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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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톤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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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번 아카데미는 유난히 뛰어난 작품들이 몰려있는 느낌을 준다. 이언 매큐언의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으니(듣자하니 거의 원작 그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어톤먼트>는 매력이 철철 넘칠 것이다. 현존하는 연기자 중 가장 뛰어난 배우 가운데 한 사람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연을 맡았으니 <데어 윌비 블러드>는 또 얼마나 큰 무게감을 느끼게 하겠는가. 석유왕이 된 한 천민 자본가의 얘기를 그렸다고 하니 이건 <자이언트>를 2000년대식 우울모드로 그려낸 것이 아니겠는가. 유럽의 '미친'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 살인적인 살인 연기를 펼친다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또 어떻고. 아마도 2월말 이 시기는 영화광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닌가 싶다. 한해 최고의 외화들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이다. 영화보기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면 향후 2~3주 동안은 극장 문턱이 닳도록 영화를 보러 나가심이 어떨까 싶다. 지난 몇해 동안 아카데미에서든, 혹은 선댄스나 베를린 같은 영화제에서든 화제를 모으는 게 흥행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 해부터는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의미있는 영화를 찾는 관객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상황이 되면서 오히려 영화시장이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국내영화산업에 대한 처방은 한국영화만이 약이 되지 않는다. 모든 영화가 골고루 들어간 종합 다양성제가 잘 듣는다. 그나저나 어디 종합 감기약 잘 짓는 약국 좀 없을까. 이번 주말에는 어떻게든 영화들을 몰아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영화전문지 '무비위크'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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