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10년 전은 상황이 달랐다. 많은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산별노조는 안 된다"고 했다. 그 시절, 어찌 보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배짱으로 거침없이 산별노조의 깃발을 내 걸었던 곳이 있다. 산별노조의 '맏언니' 전국보건의료노동조합이다.
척박했던 산별노조의 길을 외로이 걸어 왔기에 보건의료노조는 최근의 산별노조 열풍이 반갑다. 하지만 먼저 간 선배로서 걱정도 앞선다. 쉽지 않은 길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홍명옥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산별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난 10년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다.
27일로 산별노조 창립 10주년을 맞는 홍명옥 위원장을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 보건의료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산별의 힘으로 이뤄낸 비정규직 해결 '아름다운 합의'
10년, 긴 세월이다. 보건의료노조는 숨 돌릴 틈 없이 그 시간을 보냈다. 지난 1998년 최초로 산별노조를 만들었을 때부터 2004년 첫 산별교섭을 이뤄내고 지난해 사용자 단체가 구성되기까지, 보건의료노조는 쉬지 않고 달려 왔다.
그 중에서도 보건의료노조가 주목받았던 것은 바로 지난해 비정규직 관련 합의였다. 정규직 임금 인상분의 3분의 1을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 사용하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아름다운 합의'였다.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서 이랜드 등 곳곳에서 계약해지로 온 사회가 몸살을 겪는 와중이었기에 더 돋보였다.
홍 위원장은 "과도하게 집중을 받으면서 부담이 심했다"고 털어놨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지난해 산별교섭의 핵심 과제이긴 했으나 처음부터 정규직 임금과 연동시켜 풀 계획은 아니었다. 너무 칭찬을 받아 쑥스럽다."
하지만 이 합의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이 합의 이후 지부별 실무 교섭을 통해 지난해만 3000여 명의 병원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 뿐이 아니다. 거의 모든 병원에서 단체협약을 통해 "계약 만료를 이유로 해고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정규직 전환이 못 된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을 이뤄낸 것이다. 차별 해소를 위한 기금도 만들었다.
홍 위원장도 "그 때서야 어마어마한 합의라는 것이 실감났다"고 했다.
"정규직 노동자,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기득권층"
그 '아름다운 합의'는 노사 합의를 통해 비정규직 해법을 찾아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지만, 정규직이 자기 임금을 내놓아 이뤄낸 열매였기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기존의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비하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보건의료노조 조합원들은 어떻게 자신의 임금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홍 위원장은 "우리 조합원들은 병원 현장에서 비정규직들과 함께 일한다"고 했지만 다른 곳도 일을 같이하기는 마찬가지다.
산별노조로서 병원 비정규직 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풀어가려는 노력의 결실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1998년 이후 매년 비정규직 관련 요구가 단체협약에 들어가 있었다"는 홍 위원장의 설명은 이를 뒷받침한다. "지부별 단체협약을 통해 규모는 작았지만 매년 수백 명씩 정규직 전환을 해 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합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정규직 양보론에 노조가 무게를 실어줬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홍 위원장은 그와 같은 비판에 강하게 반박했다.
"외환위기 이후 적어도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는 기득권이 됐다. 우리 잘못도 아니고 우리 의지와도 무관하게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기득권층일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연봉 1000만 원 수준인 사람이 수두룩한데 연봉 5000~6000만 원을 받으면 철밥통 얘기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기득권층으로 분류되는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을 위해 양보하는 것을 나쁘다고 비판만 할 수 있냐는 반론이었다.
"정규직 양보론? 산별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임금 등 여러 조건이 좋은 대기업 노동자가 그렇지 못한 노동자를 보듬어 안고 가는 것이 바로 산별정신"이라고 홍 위원장은 강조했다. 보건의료노조 조합원들이 아름다운 합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간 "규모별 특성별 편차를 뛰어넘기 위해 대병원 조합원들이 일정 부분의 손해를 감수해 왔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더불어 홍 위원장은 "투쟁만 해서 비정규직 문제를 돌파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안 되지 않냐"고 되물었다. 선명한 '비정규직 철폐' 구호만 소리 높인다고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지금 우리 힘의 한계가 명확히 있다. 또 투쟁한다고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 와중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우리 바로 옆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러면 투쟁은 투쟁대로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지 않나."
홍 위원장은 "지난해 모든 민주노총 조직이 보건의료노사처럼만 했더라면 수만 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랬다면 정말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도 조금은 따뜻하게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늬만 산별이다" 욕먹던 시간도 길었다
지난해 "어마어마한 합의"를 이끌어내며 주목을 받았던 보건의료노조지만, "무늬만 산별"이라며 욕을 먹던 시간은 지독하게 길었다. 노조를 만들었는데 교섭조차 못 했던 시간이 6년이었다. 산별노조라는 말조차 낯설었던 때, "앞서서" 만들었기 때문에 겪어야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산별노조의 성공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시절에 어떻게 보건의료노조는 산별노조를 세울 수 있었을까? 홍 위원장은 보건의료 산업, 즉 병원이 갖는 사회적 위치가 특별했다고 설명했다.
"병원 노동자는 1987년 이후부터 사회 공공성 고민을 해 왔다. 다른 산업이 임금과 근로조건 변화를 놓고 싸울 때 병원 노동자들은 그와 동시에 병실 텔레비전 무료화, 보호자 침대 설치 등 '의료 민주화 운동'을 벌였다. 심지어는 병실 화장실에 휴지를 비치하라는 요구까지 있었다.
그 다음 단계가 의료 개혁 투쟁이었다. 의사들의 촌지 거부, 제약회사와 병원의 리베이트 근절, 직장 보험과 지역 보험의 통합 등을 내걸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업별 노조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욱이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직권중재 적용을 받았던 것도 역설적으로 산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비록 불법이라는 이유로 파업을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직권중재라는 악법을 철폐하는 것도 기업별 노조의 울타리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 그는 또 "선배 집행부와 조합원의 건강성도 한 몫을 했다"고 덧붙였다.
"가장 어려웠을 때? 오히려 산별교섭 성사시킨 후였다"
10년의 시간 동안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냐고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2004년 산별 교섭을 성사시킨 이후"라고 했다.
"차라리 산별교섭이 되기 전에는 기대와 희망이 컸다. 교섭이 안 되는 건 우리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파업 마다 '산별 교섭 쟁취'가 명확한 목표였다. 교섭만 되면 여러 가지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산별 교섭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었다."
'장외 투쟁'보다 '장내 교섭'이 더 어려웠다는 얘기다. 노조의 요구만 명확하다고 교섭이 진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원적인 구조가 남아 있는 조직 체계 아래서 산별 교섭으로 풀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기도 하다. 홍 위원장의 이 말은 산별 전환이 결코 현재 노동계가 겪고 있는 각종 어려움의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4년차 산별 합의를 이뤘는데 조합원들은 "산별 요구가 나에게 별로 와 닿지 않는다"고도 한다. "산별 합의가 너무 선언적인 문구에 그친다"는 말도 있다. "오히려 산별 교섭 후에 현장과의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는 고민이 나올 법 하다.
"기업별 노조 체계에서는 그해 임단협이 끝나면 모든 쟁점이 다 해결된다. 산별은 그렇지 못하다. 거기서 오는 조합원의 실망감과 부족함이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산별 교섭 다운 교섭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것도 있다."
"상층부 중심 산별 전환, 앞으로 나가기 힘들다"
그래서 현재의 산별 논의가 더 우려스러운지도 모른다. 홍 위원장은 "산별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소위 '윗사람들'만 산별을 고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다.
"대기업일수록 정규직 노동자가 아쉬울 것이 뭐가 있나. 중소기업은 산별노조가 절실한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지도부부터 현장까지 한 마음으로 왜 산별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절실히 느껴도 앞으로 나가기가 어렵다. 조직 전환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홍 위원장은 "비록 더디더라도 하다못해 교육을 통해서라도 조합원들이 스스로 '산별 노조가 아니면 대안이 없구나'를 알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10년을 내다보며 시작해야 할 때…갈 길은 멀다"
보건의료노조도 "다시 시작해야 할 때"라는 점에서 "처지는 비슷하다"고 했다. 인터뷰 초반 10년 소회를 묻는 질문에 그가 "재도약을 위한 무거운 책임감"을 얘기한 것도 그런 맥락에 있다.
"흔쾌하고 가뿐하다기보다 앞으로 10년에 대한 중압감과 책임감이 더 무겁다. 처음부터 완벽한 산별로 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가 가야할 산별의 상을 보다 명확히 하면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홍 위원장은 "진정한 산별로 거듭나기 위한 재도약의 조건은 오히려 산별노조를 만들던 10년 전보다 좋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1998년 당시에는 "병원 노동자 두 세 명만 모이면 산별 얘기를 하더라"는 말까지 있었다지만, 그 시절을 전혀 모르는 조합원도 많다. 의료정책 개입을 위한 제도적 틀도 전무하다. 산별 교섭이 안정화 단계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의료기관평가제도 개선, 인력 충원, 필수유지업무제도 등 올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산별노조를 건강하게 정착시켜내 산별을 완성시키는 것이 열 살을 맞는 보건의료노조의 중장기적 과제"라는 그의 임기는 올해까지다. "보건의료노조는 워낙 '빡 세서' 위원장을 2번 한 사람이 없다"며 웃으면서도 그는 "더 수준 높은 산별노조로 거듭나기 위해 쉽지 않은 길이지만 10년의 역사가 준 자부심과 저력이 있으니 할 수 있다고 본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맏언니'로서 보건의료노조가 걸어 갈 새로운 길을 지켜봐달라는 당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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