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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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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 시인의 죽음'

[기고] 노동자시인 조영관 1주기를 추모하며

몇 년 전, 밤. 혼자 일하고 있던 <삶이 보이는 창>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었죠. 자신은 조영관이라고 했어요. 아니, 이럴 수가. 혹시 <실천문학>에 시를 냈던 적이 있지 않나요. 맞다고 했지요. 2002년, 우연히 실천문학 신인상을 보았었죠.
  
  인천의 건설노동자였어요. 아, 이렇게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박노해의 초기 시에서 느껴지던 것과 같은 진실함과 감동이 거기 있었지요. 언젠가 때가 되면 만나리라 했죠. 그도 놀랬고, 우린 금세 친해졌어요.
  
  1976년 서울시립대에서 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1984년 서울시립대 영문과를 졸업하고는 인천 지역 노동운동에 투신했었죠. 부평의 동미산업 노조 위원장이 되었지요. 해고된 후에는 블랙리스트에 걸려 아예 건설일용노동자가 되어 버린 희구한 선배였죠.
  
  '폼'같은 것은 아예 없었어요. 늘 손톱 밑이 검었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불이 반듯이 개워져 있었어요. 누구든 보았으면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길 사람이었죠.
  
  작년 2월 20일, 구정을 쇠고 올라오는 길에 그가 저 하늘로 갔다는 얘길 들었어요. 충남 태안의 어느 건강원에 있다고 한번 다녀가라 했는데도 나는 못 가봤었죠.
  
  그는 무명이었지만 어느 시인보다 더 아름다운 시인이었죠. 벌써 1주년이 되었다는 군요. 그의 유고시집이 예쁘게 나왔다는 군요. 함께 읽고 기뻐해 주세요. 다음은, 그를 묻고 돌아 온 날 밤 잠 못 들고, 민족문학작가회의 게시판에 썼던 글입니다.
  
  대부분 회원들이 잘 모르는 분일텐데, 조영관이라는 선배 시인이 돌아가셔서 한 삼일 영안실을 지키다 돌아 왔습니다.
  
  알고 보니 박영근 선배와는 1980년 초반 철산동 자취방에 살며 함께 학습하고, 술 먹고, 노래 부르고, 춤추던 일생의 벗이며, 형이었다고 합니다. 박영근 선배가 부르면 다 오지 않아도 꼭 와서 며칠씩 술만 먹는 박영근에게 숟가락으로 밥 떠서 먹였던 선배라고 합니다. 어젠 들어보니 김형수 선배와도 인천에서 함께 학습모임하고 그랬었다고….
  
  그러고 보면 꽤 오랜 인연을 가진 선배이건만 2002년에야 <실천문학>으로 늦깎이 등단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의 경우 당시 등단작품들을 보며 너무 좋았습니다. 아, 아직도 노동현장의 언어로 정직한 방식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리곤 몇 해 만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귀가 부처님 귀처럼 큰 사람이었습니다. 얼굴은 무슨 하회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보나 노동자밖에 못 될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손톱 밑에 현장의 때가 시커멓게 끼어 있었습니다. 손등은 상처투성이였고, 손아귀엔 괭이가 박혀 있었습니다. 후배가 뭐라고, 늘 만나면 그 굵어진 손으로 얼마나 반갑게 두 손을 따뜻이 잡고 놀 줄 모르던지, 미안했습니다.
  
  강원도 어디 건설 현장에 와 있다던 전화 받고는 한참 잊어먹어도 좋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10월 형이 간암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보신각 앞에서 평택미군기지 이전 반대 30일간의 거리예술제를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쌍욕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런 씨팔!"

  
  왜 죽어야 하는 놈들은 멀쩡하고, 저 높다는 하늘은 착하게만 살아온 사람만 데려가려 하는지…. 싫었습니다. 그런 삶들이. 늘 변방이고, 늘 고통이고, 늘 술인 삶이. 실제적인 사회 변화는 이루지 못한 채 모두가 개인의 방 안에서 아프게 살아가야 하는 삶들이….
  
  일이 끊긴 작년 겨울엔 러시아 소설을 다 보았다고 했습니다. 문학에 대한 순정이 참 깊었던 선배였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런 착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쉽게 쓰면 안 된다. 먼저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런 선배였습니다. 함께 20여년 살아 온 그의 후배들이 그러더군요. 그 형은 그렇게 문학을 좋아했다고….
  
  
전남 함평 어느 골짜기에서 태어났더군요. 생가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대나무 밭 밑에 조그만 집. 서른 가구도 되지 않을 성 싶은 작은 마을. 함평뜰이 있고, 영산강이 흐르는 참 따뜻한 고장이었습니다. 형은 평생 후배들에게 무엇은 안 된다라는 말을 한번도 안 했다는데, 그 까닭이 그 너른 들과 깊은 강을 보며 살아와서 였을 거라고 모두들 유추하더군요.
  
  술자리에서 들어보니, 한편의 사람들은 형은 운동은 했으되 과학적, 조직적 운동은 안 했다 라고 평가하더군요. 또 한편은 그런 말은 하지도 말아라. 그럼 영관이 형이 운동을 안했으면 우리 중에 누가 운동을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냐고 하더군요.

  
  전 후자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운동을 했다는 그 동문들은 과거 모두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지만. 미안하지만, 소수를 빼놓고는 지금은 모두 웬만큼은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CEO고 무슨 무슨 장이고, 누구는 민노당 지역위원장이고, 누구는 국무총리실에 있고, 누구는 청와대에 있고, 누구는 정치조직의 리더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명함 하나쯤 씩은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연히 동승하게 된 형의 한참 후배의 차도 중대형차여서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영관이 형은 운동은 안 했으되 노동자로 끝까지 살아 버렸습니다. 마지막에도 강원도 어느 곳에 교각을 놓는 공사현장에서 90도 교각을 오르다 떨어져 병원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과거의 기억을 통해 과학적, 조직적 이야기를 하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여튼 그 형이 주는 술을 한 이틀 연짱 받아먹었습니다. 사실 장지까지는 따라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 내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아마도 괜시리 눈물이 더 났던가 봅니다. 생가 앞에 노제를 차리고 그 앞에 영정을 갔다 두는데, 한 사람의 삶이란 뭔가 하는 슬픔이 몰려 왔습니다. 엄마 하며 이 길을 뛰어 왔을 작은 아이 하나가, 배고파 왔는데 엄마는 들에 나가고 없는 집에서 두려움에 떨었을 작은 아이 하나가, 저 들녘을 넘어 서울로 가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이젠 외로운 유골 한 상자가 되어 맨 처음 출발했던 그 시골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게 뭘까 하는 생각에 사무쳤습니다.

  
  산다는 게 무섭고 싫었습니다. 민족이 뭔지, 계급이 뭔지. 그 작은 아이 하나에게 너무도 많은 짐과 술을 부과했을 이 세상이 싫었습니다.
  
  영산강에서, 평생의 동지였던 이젠 모두 오십 줄에 가까운 옛 벗들이, 저기 배에 실려 가는 유골함을 보며 노래를 부르자고 했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자고 모두가 일어섰습니다. 저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구절도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냥 눈물만 주룩주룩 흘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씨팔 왜 이렇게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 이 고생인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왜 자꾸 이 시대는 우리에게 책임을 부과하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생전에 시집이라도 하나 묶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김해자, 백무산, 성효숙 선배, 그리고 실천문학에서 애를 써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모두가 바라지 않았던 유고 시집이 되어 버리고 만 셈이지만, 조만간에 형이 평생 사랑했던 시집 한 권을 보게 될 듯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이 이젠 아니어서 어떤 평이니 덕담도 모두 덧없겠지만, 그런 한 사람의 시인도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저희 속에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가끔 87년 체재 논쟁을 보게 되는데, 사실은 저희 안에도 이렇듯 끝나지 않은 87년을 어떻게 내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관이 형은 그 길에서 노동자의 삶을 택했습니다. 누구의 삶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범한 삶. 전 그렇게 못 살 것 같습니다.
  
  주변 분들과 상의해서 '조영관 노동자 시인장'으로 치러 드렸습니다. 워낙 작가회의 활동 자체를 안 했던 선배라 어려웠지만 작가회의 여러 선생님들, 선배님들이 함께 이름 걸어 주셨습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형을 좋아했던 후배의 한 사람으로 마지막까지 선배님 잘 가셨다는 보고 말씀 남깁니다.

  
  작년 이맘때 우리는 모여 그를 보내는 작은 추모의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의 고향인 영산강으로 떠나기 전이었죠. 한숨도 못 잤던가 봅니다. 새벽 6시, 병원 근처 피시방으로 갔습니다. 무슨 말이고 적어야 했지요. 시를 써내려가는데 그때서야 참았던 눈물 한 줄기가 뺨을 적셔 왔어요. 입술 끝에 걸린 눈물은 짜디짰어요. 짜디짠 게 인생인가 봐요.
  
노동자 조영관 잘 가시라
  - 송경동
  
  잘 가세요. 형
  비참도 우울도 분노도
  산자의 고통도 이젠 모두 벗고
  치렁치렁 얽혀들던 늦은 밤
  그러고도 늘 먼저 깨어나야 하던 이른 새벽
  못다 이룬 사랑도 절망도 꿈도 모두 잊고
  잘 가세요. 형
  
  이젠 챙겨야 할 연장이 없겠군요
  그래도 잘 살았어요. 암요. 걱정마세요
  예전처럼 노래라도 한 곡 부를까요
  걸판지게 꺾정이춤이라도 한판 춰볼까요
  개구쟁이들처럼 물놀이라도 한판 할까요
  시대와 역사를 향한 빛나는 눈동자들이었다가
  외로운 방, 말없는 술잔이 되기도 했던
  우리의 슬픔과 곤혹에 대해선
  이젠 말하지 말아요
  암요. 기쁨이고 따뜻한 날들이었어요
  최선이었고 최대의 행복이었지요
  
  가시다 아쉬우면 저 별들처럼
  가끔 우리의 쓸쓸한 눈동자를 바라봐 주세요
  그리곤 삶의 허름한 모퉁이 어디에선가
  다시 봐요. 인적이 드문 어느 산길에서나
  먼지바람이 휭하니 부는 낯선 객지 공사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띄엄띄엄, 쓸쓸하게 들리는
  망치소리로나 만나요
  누군가 또 다쳤다거나 외로워한다면
  그게 형인 줄 알께요
  누군가 또 여리거나 아프다면
  그게 형인 줄 알께요
  
  증오할 일보다 사랑할 일이 많아요
  암 그렇지요. 미워할 일보다
  그리워해야 할 일이 더 많아요
  누구보다 더 높이 올라갈 일보다
  내려가야 할 일이 더 많고요
  이룰 일보다 버릴 일이
  커질 일보다 작아질 일이
  더 많지요. 그럼요. 그렇지요
  
  잘 가세요. 형
  가서 다시 또 뵈요
  헤어져도 헤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 기억할께요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길
  훼손되지 않은 노동자의 영혼으로
  작은 이름으로 떠나가는 형의 삶이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짧은 날들이었지만 사랑했어요
  형. 잘 가세요.
  
  (2007년 2월 22일 추도식 때 읽음)
  
  

  * 고 노동자시인 조영관 1주기 추모제 및 첫시집 출판기념회
  
  - 일시 : 2008년 2월16일(토) 오후 3시
  - 장소 : 서울 만해 NGO교육센터(02-2261-2265)
  - 문의 : 장달수(011-9094-2152)·이병욱(011-358-6604)
  - 유족 : 조영선(02-3482-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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