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석은 거의 누울 수 있게 되어 있고, 찬 공기는 지나칠 정도로 제공되었다. 2층 버스 맨 앞 좌석에 앉아 해 뜨는 광경을 보면서 눈을 떴다. 버스는 규정 속도를 정확히 지키는 것 같았다.
체 게바라가 살던 집을 찾아서
우리의 목적은 체 게바라가 살던 집이다. 현재는 Museo Casa del Che, 즉 체 게바라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먼저 꼬르도바 시청에서 운영하는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다. 아리엘이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체 게바라 박물관은 꼬르도바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알따 그라시아(Alta Gracia)에 위치하고 있었다.
터미널에서 시에라스 데 깔라모치따 (Sierras de Calamochita) 회사가 운영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사르미엔또(Sarmiento) 역에서 내려 걸어갈 수 있다고 했다.
버스는 20분에 한 대 꼴로 있으며 박물관은 연중 무휴로 운영되고 있다는 정보도 얻었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 버스
꼬르도바에 와서 느낀 첫 인상 몇 가지. 먼저 부에노스 아이레스보다 사람들은 더 친절했다. 거리는 밝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로사리오에서 보던 부랑자나 구걸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테면 나는 어느 도시에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보려면 버스를 타봐야 한다는 가설을 만들어냈는데, 꽤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시내 도로를 미끌어지듯 깔끔하게 달리던 버스는 고속도로에 들어서도 속력을 천천히 올렸다. 중간에 정류장이 없을 경우에도 버스는 결코 과속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다른 차들은 그렇지 않다. 이 곳의 운전자들은 일단, 신호위반은 기본이고,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은 일상이었다.
신호를 지키려고 기다리고 있자면 오히려 무안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바로 그런 무질서가 도로위의 과속을 제어하고 있는 셈이었다. 방어운전은 습관이어야 했다.
하지만 버스는 매우 모범적이다. 쉽게 말해 '착하다'. 물론 어딜 가나 '예외'라는 것은 있으니, 이런 일반 법칙은 100% 신뢰하기 어려운 것일게다.
녹슨 혁명의 자국
현금으로 3뻬소 75센타보(약 1100원)를 지불하고 버스에 올랐다. 사르미엔또 역에 내렸을 때 우리 시야에 들어온 알따 그라시아는 유럽풍의 아기자기한 도시였다. 낮은 집들, 그리고 하얗고, 노랗고, 붉은 집들, 사이로 예쁜 길이 이어지는 곳.
우리는 물어 물어 체 게바라 박물관을 찾았다. 사람들의 기분좋은 친절함은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에 가까워질수록 한적한 이 도시에 관광객들을 실은 차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가족, 연인, 그리고 아이들이 박물관을 찾고 있었다.
모든 길은 집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체 게바라가 여행을 꿈꾸고, 또 여행을 떠나고, 또 돌아 왔던 그 곳.
사람들은 '박제된 혁명'이라 비아냥대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녹슨 혁명'이다. 한때 단단하게 단련되었던 꿈이 있었고, 사람들은 충분히 강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암호는 전 세계에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지만, 해독되지 못한 채 봉인되었고, 열쇠는 녹이 슬었을 뿐이다. 우리는 그런 녹 자국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어린 에르네스또가 먹고, 마시고, 쉬고, 잠을 잤던 곳. 살아 있었음을 강변하는 녹슨 그 흔적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 흔적 위를 덮은 녹을 닦아내는 일은 우리 몫이다. 매우 게으르게, 또 게으르게라도 닦아낼 수 있는 것이 녹이다.
체의 로시난테를 만나다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는 우리에게 가족 관광객의 가장 한 분이 '하뽀네스(일본인)?'라고 중얼거린다. 내가 꼬레아노라고 말하자, 숨겨놓았던 생각을 들킨 듯, 살짝 당황해 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 가장의 다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던 가장 작은 식솔인 노란 머리의 꼬마 여자아이가 체 게바라의 어린 시절을 재현해 놓은 동상의 팔짱을 끼고 우리를 향해 웃어 보인다. 심지어 키스를 하더니, '혀로' 어린 에르네스또를 핥는다. 뭐, 그럭저럭 둘이 잘 어울려 보이긴 했다.
이 새로 탄생한 연인을 뒤로 하고 우리는 박물관에 들어갔다. 한국인들은 이 곳을 잘 찾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흘끔흘끔 쳐다본다. 동양인은 우리가 유일하다.
박물관은 깔끔했다. 집은 여느 아르헨티나 식 가옥처럼 뒤뜰에 넓은 마당이 있었고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많은 기록물들과 사진들, 읽었던 책, 사용했던 타자기, 그리고 호흡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체의 첫 여행의 발이 되었던 자전거가 있었고,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기록하는 데 일조를 했던 로시난떼, 포데로사 오토바이도 재현되어 있었다. 게바라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도 상영해주었는데, 영어 자막이 없어서 볼 수가 없었다.
소가 인구보다 많은 나라
박물관을 나서는데, 관광객 한 분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서 온 저널리스트라 했더니, 자신도 저널리스트란다. "오, 반갑습니다." 하지만 더듬거리는 영어라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우리는 보고, 반하고, 사랑할 수 있는 정도의 대화 시간을 들여 통성명을 했다.
오라티오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분은 마르 델 플라타 부근에 살며 이 곳으로 관광을 왔다고 했다. 자신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고, 주로 아날레스 (Anales)라는 '축산업 전문 잡지', 그리고 깜뽀 (Campo)라는 농업신문에 글을 기고한다고 했다.
소가 인구보다 많은 이 나라에서 '축산업 신문'은 한국의 'IT 신문' 쯤 될 것이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라티오 씨는 자신이 쓴 기사가 담긴 신문 한 부와 잡지 한 부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스페인어로 된 것이라 우리가 읽을 수 없는 사실이 안타깝다며, 그리고 자신의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나중에 시간 되면 훑어보라고 했다.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헤어졌다.
먼저 지나간 자는 자유롭고, 좇는 자는 괴롭다
누군가의 자취를 좇아 본 적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너무 오래 전에 패어서 흔적이 희미해진 바퀴자국이나, 닳아버린 신발자국, 그리고 흑백 사진 몇 장으로 남아 한때 살아있었음을 강변하는 증거물들, 누군가의 자취를 좇는다는 것은 지나온 길만 볼 수 있고, 지나갈 길은 볼 수 없는 물길을 바라보는 행위다.
혹은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 하늘 길을 더듬더듬 만지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부딪히고 채이고 하는 행위다. 그러다보면, 좇는 자는 먼저 지나간 사람보다 더 고통스럽다.
먼저 지나간 자는 자유롭고, 우리는 그 흔적을 따라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더 무겁고 힘든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이제 그 시작점을 잡은 셈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를 더듬는 행위가 어떻게 미래를 주조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한국에서.
"체 게바라는 한 장의 티셔츠로 족하다"
우리는 과거를 지배했던 가치의 상실을 슬퍼한다. 자주 추억하고, 감상에 빠지고, 현실을 개탄한다.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소위 '386' 세대들은 자신들이 고수했던 '숭고한' 가치가 박물관에 걸려있는 도살된 사슴 옆 자리쯤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10대, 20대의 몰가치성을 염려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추억을 상기하는 고약한 한 방식일 뿐, 우리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 줄수 없다. 정말 20대에게 충고를 해 주고 싶다면, 이한열 박물관을 꾸미고, 전태일 동상을 청계천에 세우고, 때가 되면 광주를 방문해 사진을 찍고 오는 것보다, 10대, 20대 들에게 이한열 티셔츠나, 전태일 배지를 달고 거리를 활보하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리에게 체 게바라는 박물관보다는 거리에서 입고 다니는 한 장의 티셔츠로 족할지 모른다. 모든 근사한 박물은 사실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 만드는 추억행위일 뿐이다.
바릴로체로 떠나다
우리는 체 게바라가 국경을 넘었다는 바릴로체를 찾았다. 바랄로체에서 '일곱 호수의 길'을 따라 약 4시간 거리에 있는 산 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San Martin de los Andes)에서 체 게바라가 머물렀던 작은 창고를 찾아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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