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이 벅차 오르기 마련이다. 내 경우, 만약 '죽이는' 영화를 불행히도 혼자 봤다면 억울함이 몰려 온다. 극장문을 나서자마자 누군가와 영화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기 때문이다. 28일 언론 시사회를 통해 본 <추격자>도 내겐 일종의 '가슴 벅찬' 영화였다. 지난해 말 호평 속에 흥행에도 어느 정도 성공한 원신연 감독의 <세븐 데이즈>에 필적할만한, 아니 능가한다고 말해도 과찬이 아닐, 또 다른 차원의 '잘 만든 스릴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수다를 나눌 상대를 찾으려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뭐랄까, 말문이 막혔다고나 할까. 그것은 이른바 웰메이드 장르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벅찬 쾌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영화가 각성시킨 현실의 생생한 잔인함 때문에 영화 속 피해 여성들처럼 나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얼얼함. 급히 담배 몇 개비로 이 후유증을 추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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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 |
신예 나홍진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쓴 그의 장편 데뷔작 <추격자>는 '리얼리즘 스릴러'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마땅할 정도로 현실감이 넘친다. 극장 안에 머문 가공의 공포가 아닌, 극장 바깥의 공포를 상기시킨다. 활개치고 다니는 연쇄살인범의 잔혹함이 공포가 아니라, 그의 숙주라 할 수 있는 세상의 끔찍한 무기력, 그리고 그들이 빚어낸 미필적 공모가 실체적 공포다. 그래서 더 공포스러운 것이다. 잊을만 하면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이 터지는 나라에서, 놀러 나간 두 아이가 실종된 지 수십일이 지나도 행적조차 찾지 못하는 나라에서, 예의 영화 속의 공권력도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다. 시민에게 똥물을 뒤집어 쓴 서울시장 때문에 경찰 위신이 땅에 떨어진 사이,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인 매춘부들은 너무나 쉽게 도륙의 대상이 된다. 다 잡아 놓은 범인을 두고 증거와 절차를 따지고 있는 사이, 매춘부 포주인 엄중호(김윤석)가 사적 응징에 나선다. 피해 여성들을 위험 속으로 내몬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이제 공권력을 대신해 연쇄살인마 지영민(하정우)이 시체를 숨겨 놓은 곳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영화가 남다른 지점은, 더 이상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 권력=가부장=수컷'들의 '처연한 삽질'을 등호로 묶어 놓고 냉소적으로 꿰뚫고 있는 감독의 예민한 통찰력이다. 십 수명의 부녀자들이 납치 살해되는 상황에서도 중요한 것은 똥물을 뒤집어 쓴 국가 권력의 허울만 남은 위신일 뿐이다. 용의자를 심문하면서, "너 여자랑 섹스 못하지?"라며 성불구로 몰아가는 공권력의 모습은, 스스로도 불구가 된 남성적 질서에 대한 적반하장적 옹호로 보일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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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 |
게다가 여성의 성을 착취해 돈을 벌던 엄중호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가련한 가부장(공권력)의 가공할 무능력에 혀를 차며 돌연 '진짜 가부장'으로 환골탈태, 정의 회복의 길에 나선다!(영화는 피해 여성 한 명의 어린 딸을 엄중호에게 떠맡김으로써 '유사 부성애'를 그의 행동의 동기로 부여하는 '시늉'을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걸 정당화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성주의적 관점에선 논란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모순의 뫼비우스 띠에서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하고 너무 쉽게 파멸되고 마는 것은, 결국 폭력적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인간성일 뿐이다. 어쨌든, 한국영화의 흐름 가운데 최근 두드러져 보이는 장르영화의 진보는 확실히 환영할 만하다. 더더욱 감독들이 장르 관습에 매몰된 나머지 사회적 맥락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격스러울 정도다. 이제 우리는, 나홍진이라는 걸출한 신예의 탄생을 통해 한국 장르영화의 진일보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2월 14일 개봉.
<추격자>를 논하면서 김윤석과 하정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완성도를 떠받친 많은 부분은 두 배우의 연기 내공에서 비롯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짜>의 아귀로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는 김윤석은 이 영화를 통해 명실상부한 주연급 배우로서의 존재 증명을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줄곧 저예산 영화만 출연하다 고른 대중영화에서 하필 악역을 고른 하정우는 또 어떤가. 필모그래피 관리에 철두철미한 이 젊은 피는, 자신의 연기 영역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방법을 영악하리만큼 잘 알고 있는 배우다. '선'과 '악'으로만 양립시킬 수 없는 두 배우의 아우라를 절묘하게 배합한 캐스팅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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