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평원을 가로질러 로사리오로 향하다
김영길 <프레시안> 기획위원도 역시 '셸' 주유소를 피하는 분 중 하나였다. YPF라 하는 국영 석유회사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3뻬소 30센타보짜리 커피를 마셨다. 우리 돈으로 대략 1000원쯤 하는 셈인데, 커피는 아주 맛있었다.
로사리오는 농업도시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축산업에서 농업으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는 중이라 한다. 전 세계 곡물가가 급등하고 있는 있는 상황도 그렇지만, 중국에서 막대한 콩을 사들이고 있는 등 교역 확대에 따른 공급량 확보로 축산업이 차지하던 지분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는 중이라 했다.
로사리오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 주변의 끝없는 평원은 이 나라가 얼마나 농업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땅이 넓기 때문에 수확을 한 번 끝낸 땅은 일년 정도 휴경기를 갖는다. 그만큼 땅이 넓다는 것이다. 바로 이게 비옥한 땅의 유지와 농산물의 풍부한 생산량을 보장하고 있다.
체 게바라가 태어난 집은 이제 평범한 아파트
로사리오에는 체 게바라 생가가 있다. 론리 플래닛에도 체가 태어난 집이 있다는 안내가 나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엔뜨레 리오 480번지(Entre Rio 480)를 찾았다.
그런데 웬걸.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체 게바라 생가는, 예전엔 분명 박물관이었다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나타내는 표식이 전혀 없었다. 그냥 일반 아파트였다.
아파트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더니, 이 곳이 작은 박물관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개인이 사서 살고 있다고 했다. 아파트 앞에는 체 게바라가 태어난 곳을 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몇 개월 전 폭우에 그만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그 이후로 죽 버려두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로사리오 시청에서 운영하는 민원 센터에 들렀다.
혁명가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시청 직원에게 '체 게바라 박물관'에 관해 물었으나 자신들도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황당한 느낌이었다. 기가 막힌 우리는 마구 따졌다.
체 게바라의 고향에서 체 게바라가 잊혀지고 있는 게 말이 되는 일인지, 문화재 관리를 원래 이런 식으로 하는지 등을 따졌더니, 시청 민원실 직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오, 우리도 알고 있고, 신경쓰고 있다. 여기에 체 게바라 기념 공원이 또 있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현재 체 게바라 생가와 기념공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체 게바라가 부담스러운 우파
로사리오 정부는 현재 우파가 집권하고 있다. 김영길 위원의 말에 따르면 로사리오 시장은 군정 당시 장교 출신이었던 '부스띠'라는 인물이라 한다.
사회적 의제를 두고, 특히 아르헨티나 청년 단체 소속의 젊은이들이 시위를 할 양이면 체 게바라가 그려진 피켓을 드는 것은 이 곳 아르헨티나에서 매우 일반적인 일이다. 주로 과거사 청산이나, 반미 반제국주의, 에너지 주권 확보, 등을 내걸고 있는 이들에게 체는 그만큼 상징성이 있는 인물이다.
로사리오 시장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혁명가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체 게바라가 차지하는 의미는 이렇게 극명하게 차이 난다.
체의 고향에서 그의 자취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세계인'으로서 국경과 인종을 초월했던 그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지구 반대편의 낯선 동양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에게 이미 고향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떠나온 것 역시, 우리의 고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 곳에 온 것 역시,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어떤 가치를 찾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체 게바라 공원은 아담했다. 정면에 커다란 일러스트레이션이 걸려 있고, 입구 한 편의 가판대에서는 섹시한 여성 모델들을 표지로 한 연예 잡지들과 알록달록한 표지의 퀴즈 잡지들 틈에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공책'이 한권 걸려 있었다. 로사리오의 한낮은 매우 덥다.
'원 달러'라는 인사를 던지는 젊은이들
공원 주위에는 젊은이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앉아 쉬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말했다. 내가 사진을 찍자 젊은이들이 내게 뭐라 외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원 달러'라고 하는 거다. '구걸'이라 치기에는 그냥 '인사' 같았다.
묵직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가 '돈 많은 동양인 관광객' 쯤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멋지게 생긴 젊은이들이 원 달러를 외치는 것은 품위가 조금 떨어져 보이기도 했다.
공원에서 만난 또 다른 십대들은 노키아 핸드폰을 들고 자전거 위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들에게 '로사리오 시장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둘 다 웃으며 모른다고 답한다. 한 친구는 아예 "키르츠네르(아르헨티나 前 대통령,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재직했다) 아닌가요?"라며 농담을 던지고 웃는다. 핸드폰에서는 MP3 음악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유로 테크노 풍의 음악이다. 젊은이들은 어딜가나 똑같은 모양이다. 맥도널드 같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어김없이 '히스패닉 힙합'이 흘러나온다.
우리에게 '원 달러'를 외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깔끔한 옷차림과 고급 자전거로 보아 이들은 부유한 집 자식들인 것 같았다.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는 지금이 여름
우리는 라 쁠라따 강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라 쁠라따 중류쯤 되는 지점이다. 멀리 커다란 다리가 하나 보인다. 그 일대가 로사리오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는 곳이라 한다.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 편의점에서 들춰본 로사리오 지역신문인 <시민 신문> 3면에는 강가의 피서객 풍경을 찍은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지금은 여름 휴가 기간이라 사람들이 매우 붐빈다고 한다.
우리는 그보다 조금 아래쪽에 있는 한적한 '스페인 공원'에 들렀다. 푸른 잔디 언덕 위에서 비키니를 입고 담소를 나누는 아르헨티나 아주머니들이 인상적이었다.
"잃어버린 싯귀를 영글게 하는 거리로 나선다"
공원에는 어김없이 조각상들이 있었는데, 내 눈길을 끈 것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까' 흉상이었다. 로르까는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김소월', 혹은 '한용운' 같은 존재다.
체 게바라 역시 로르까의 시를 좋아했다.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서 트럭을 얻어타고 가는 체 게바라가 로르까의 시를 읊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미리 로르까의 시구절을 적어온 수첩을 꺼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다.
나는 벌거벗은 채,
잃어버린 싯귀를 영글게 하는
거리로 나선다.
- 별들의 시간, 집시 민요집(김현창 옮김, 청하)
가난해도 표정은 밝은 사람들
젊은이들이 '원 달러'를 외치는 이 나라 사람들은, 하지만 여유롭게 살아간다.
커다란 농장의 지주 밑에서 노동자로 지내면서도, 직업도 없이 체 게바라 기념 공원 앞에서 노닥거리는 젊은이들도, 'Cliba'라 쓰인 조끼를 입은 청소부들도, 모두 밝은 표정이다.
삶의 밝은 면을 외면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삶이 절대적으로 행복한 것은 아닐지라도, 절대적으로 불행한 것도 아닐 것이다.
행복은 고통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절름발이 이상'이다.
'야만은 불행'이라는 믿음이 낳은 원주민 대학살
신자본주의의 세계 속에서 행복을 재단하는 가치는 '경제적 풍요'다. 다른 방식의 행복은 거부된다.
거리에서 '원 달러'를 인사처럼 외치는 것이 천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국민 경제를 747에 태워 안드로메다까지 날려주겠다는 인사가 대통령을 하는 나라 사람들 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은 지금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식의 낡은 계몽의 논리가 이곳 라틴아메리카에서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았는지 알고 있다.
꽁뜨의 실증주의를 받아들인 라틴아메리카인들은 행복한 원주민의 삶을 천박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유럽으로 향하는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책을 썼고, 19세기 초반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바 았는 사르미엔또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 즉 세계사로의 편입을 위해 원주민 학살을 정당화했다.
그는 '원주민=야만'이라는 등식을 신봉했고, 야만의 제거만이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잘못된 믿음의 결과는 끔찍했다.
"다시 가난하게 살면 된다"
다시 가난하게 살면 된다. 몸도 마음도 다이어트 하면 된다. 고통은 받아들이되 부당한 고통은 피하면 된다. 욕망 없는 고통은 행복하게 사는 삶에 관한 보이지 않는 설명서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체 게바라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풍족하게 사는 것은 정치가들의 욕망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혁명가들의 욕망이다.
욕망하는 고통도 즐길 수 있는 것이 행복의 첫째 조건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이 나라 삶의 여유로움과 '없이 사는 것'을 헷갈려하는 것이라 비난할지 모른다. 혹은 정당화하는 과정이라 비난할지 모른다.
하지만 삶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란 게 절대적이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보면 어떨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