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유출 사고가 난 지 딱 한 달 만인 1월 7일에는 경기도 이천의 한 냉동 창고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무려 40명이 생명을 잃은 끔찍한 사고였다. 40명 중 13명은 중국인 노동자, 1명은 우즈베키스탄 노동자였다. 지금까지 책임 규명으로 떠들썩하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앞으로 5년간 한국을 이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 일어난 일련의 사고는 의미심장하다. 마치 이 사회의 정체를 알리고, 대책을 촉구하려는 경고 같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근 나온 <대한민국 위험사회>(홍성태 지음, 당대 펴냄)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이 책 역시 "한국은 위험하다"며 각성과 행동을 촉구한다.
피할 수 없는 '위험'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축적된 '위험사회' 논의를 집대성한 <대한민국 위험사회>를 읽어보면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사건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우선 허베이 스피리트 호 기름 유출 사고를 살펴보자. 많은 이들은 이 사고를 아주 예외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명의 위험은 여러모로 근대 이전의 세계를 지배했던 자연의 위험과는 다르다. 이것은 천벌이나 불운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문명의 본질적 속성에 속하는 것이다. (…) 위험은 저기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 더 많은 부를 생산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위험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안타깝지만 유조선에 문제가 생겨 기름이 유출되는 사고는 앞으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전 세계가 특정 지역에서 생산하는 석유에 의존하는 한, 그것을 싣고 원거리를 이동하는 유조선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고의 위험도 상존한다. 당장 허베이 스피리트 호 사고가 난 지 얼마 안 돼 수에즈운하에서 유조선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는 이처럼 위험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위험을 피하려면 "더 안전한 방식으로 부를 생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조선 사고를 근본적으로 막으려면 원거리를 이동하는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방법, 예를 들면 태양, 풍력과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활용하는 '지역 에너지(local energy)'로 전환하는 길이 최선이다.
돌이킬 수 없는 '재앙'
허베이 스피리트 호 사고는 현대 위험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7일 유출된 기름은 채 한 달도 안 돼 남해안까지 피해를 줬다. 앞으로 바다에 가라앉고, 녹아버린 기름은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간 한반도 서·남해안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다. 물론 그 영향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현대의 위험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낳을 수 있다. 곧 핵폭발과 같은 '절대적 위험'이 포함돼 있다. (…) 현대의 위험은 시공간의 제약을 떠나서 지구 전역으로 퍼져가고 대를 물려가면서 그 힘을 발휘한다. (…) 현대의 문명을 떠받치는 수많은 오염물질들이 시공간의 제약을 떠나서 지구 전역에서 모든 생명체에 사실상 영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명박 당선인의 전망대로 (물론 많은 화주는 그 전망을 비웃고 있지만) 경부운하가 건설돼 수많은 화물을 실은 바지선이 그것을 이용한다면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하더라도 사고는 있기 마련이다. 만약 사고가 일어난다면, 수천만 명의 수도권 시민이 의존하는 식수원이 오염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한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다른 재앙도 함께 올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이런 재앙을 막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사고를 피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문제가 되는 기술 자체를 폐기하고 체계(system)의 복잡성을 줄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명의 활화산' 위에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 이 논리대로라면, 없었던 위험을 만드는 운하 같은 것은 애초에 시작해선 안 된다.
극히 심각한 '위험사회'
허베이 스피리트 호 사고 때도 기름 탱크가 '겹'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아쉬움은 이천 냉동 창고 화재 사고에서는 절망감으로 바뀐다. 40명의 생명을 잃고서, 허겁지겁 진행된 사고 원인 조사에서 온갖 추악한 진실이 드러났다. 부실 공사, 부패 사슬 등 그간 수십 년간 '사고 공화국'의 특징으로 거론돼 온 일들이 또 반복되었다.
"한국은 과학의 위험을 통제할 사회적 장치가 크게 모자라고, 또한 공업사회의 조정 체계를 떠받치는 사회 안전망이 크게 부족하다. 이렇게 된 요인은 물론 선진사회와 한국의 구조적 차이(종속성과 억압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그 결과 한국은 서구의 선진사회보다 훨씬 크고 빠르고 다양한 위험을 생산하게 되었다."
미국, 유럽, 일본 어느 곳에도 위험은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런 곳보다 더 위험하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은 "서구를 따라잡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 또 (비록 '졸속 성장'이었지만) 어느 정도 성공했다. 바로 그 성공의 배경에는 "폭력을 이용해 사람을 근대화의 길로 내몰았던" 박정희 정권과 그와 다르지 않았던 후대 정권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졸속 성장' 탓에 부패, 부실이 만연된 위험이 쉽게 사고로 발현되는 '극히 심각한 위험사회'가 등장했다. 1990년대 일어난 일련의 사고는 '서해훼리 호' 침몰(1993년), 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외환 위기(1997년) 등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을까? 이천 냉동 창고 화재는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복지사회
이명박 당선인은 앞으로 5년간 한국 사회를 '위험사회'에서 '안전사회'로 바꿔야 한다. 이런 변화가 가능하게 하려면 세 가지 사회 기반이 닦여야 한다. 민주주의, 복지사회, 생태적 전환. 이 책은 이 세 가지 기반이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바로 '생태적 복지사회'가 제안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복지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돈이 많은 나라이다. 한국의 문제는 그 많은 돈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 매년 수십조 원의 혈세가 불필요한 대규모 건설 사업에 탕진되고 있다. 혈세의 낭비와 자연의 파괴가 함께 진행되는 것이다. (…) '토건국가'의 문제를 바로잡는 것은 그 자체로 복지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 생태주의가 두 축이 되는 복지사회를 이룩해 위험사회를 극복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시민이 아닌 기업, 자연이 아닌 개발을 내세워 '선진화'를 하려는 이명박 당선인은 이 셋 중 어느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그 결과는 뻔하다. 이 당선인 당선 전후 일어난 사고야말로 그 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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